전진을 위한 후퇴
”나는 그동안 배운 걸 모두 폐기하고 나만의 기법을 다시 새로 터득해야 했다. 재건하려면 먼저 대대적인 해체 작업을 해야 했다. 완전히 철거한 다음 처음부터 다시 지어야 했다.“
- R. A. Dickey / 미국 메이저리그 투수 -
장래가 촉망받던 야구선수 R.A. Dickey는 1996년 텍사스 레인저스팀에 투수로 입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하지만 게약서 서명 직전, 메디컬 테스트에서 오른쪽 팔꿈치에 인대가 없다는 사실을 알게된다. 강속구와 회전을 통한 변화구를 구사해야하는 투수의 입장에서는 치명적인 결함이었다. 그는 곧바로 연봉이 8만 달러 이하로 떨어지고 마이너리그의 가장 낮은 등급으로 내려보내졌다.
그는 좌절하지 않았다. 마이너리그에서 7년 넘게 고군분투한 끝에 메이저리그에 복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하지만 진척이 없다는 평가를 받으며 곧바로 마이너리그로 다시 강등되었다. 다음 시즌에도 한 번의 기회가 주어졌다. 복귀 후 첫 경기에서 3회 만에 홈런 6개를 맞으며 또 다시 마이너리그로 강등되며 텍사스 레인저러스에서 영원히 퇴출되었다.
투수는 보통 20대 중반에서 후반에 전성기를 맞고 30대 초 무렵 은퇴한다. 서른한 살인 디키는 복귀하기에는 너무 늦은 나이가 되었다. 정체가 길어지면 쇠락하게 된다. 외과 의사는 시력과 반사 작용이 나빠지면서 정체되고 쇠락한다. 과학자들은 뇌 신경세포가 죽으면서 정체하고 쇠락한다. 운동선수는 체력과 속도가 줄면서 필연적으로 정체하고 쇠락한다. 적어도 우리는 그렇게 넘겨짚는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현실은 훨씬 고무적이다
디키는 그 이후 밀워키, 미네소타, 시애틀의 마이너리그를 전전하며 무려 10년 사이에 30번 이상 이사를 하는 수모를 겪게 된다. 시즌이 없는 어느 날 봄, 디키는 가족의 생계를 위해 악어들이 득실거리는 늪에서 골프공을 주어 파는 일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희망은 준 것은 '너클볼(Knuckleball)'을 연마하는 것이었다. 그의 투구폼을 유심히 보고 있던 코치가 '너클볼' 훈련을 제안한 것이다.
너클볼(Knuckleball)은 무서운 속도로 살벌하게 회전하면서 날아가지 않고 천천히 가능한 밋밋하게 날아간다. 손가락으로 공을 감싸지 않고 두 번째와 세 번째 손가락의 손톱 끝으로 공을 파고든다. 이 두 손가락의 마디가 공에 닿지 않고 공중에 붕 뜨기에 이 투구 방법에 너클볼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너클볼은 공이 회전을 하지 않고 공중에서 이리저리 미친 듯이 오락가락하기 때문에 타자들이 당황해 허둥지둥한다. 마치 축구에서 ‘무회전 볼’을 차는 것과 흡사하다.
너클볼은 큰 힘이 필요하지 않고 팔을 혹사하지도 않으므로 투수로서의 수명을 몇 년 연장해준다. 그러나 너클볼은 방망이도 치기도 어렵고 글러브로 받기도 어려운 만큼이나 던지기도 어렵다. 그리고 디키도 너클볼을 던지기보다 터특하기가 한층 어렵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너클볼을 제안한 코치조차 가르쳐 본 적이 없다. 너클볼을 가르쳐주는 교과서나 지침서도 없었다.
그는 모든 것을 걸고 자신이 그동안 걸어왔던 길을 되돌리기로 결심한다. 정상을 향해 걷다 보면 정체기가 오기 마련이고, 정체기에 도달하면 방향을 바꿔 후퇴하거나, 다른 쪽으로 바꿔야 한다. 경로 이탈이 꼭 집중력을 분산 시키지는 않는다. 오히려 에너지원이 될 수도 있다. 산을 오르다가 정체되면 제자리에 가만히 있기보다 발길을 돌리는 게 낫다.
2010년 뉴욕 메츠팀이 서른다섯 살인 디키를 선발할 무렵, 그는 탄탄한 실력을 갖춘 메이저리그 투수가 되어 있었다. 디키는 서른 다섯 살에 자신의 성장을 가로막는 벽을 완전히 박살냈다. 마이너리그에서 자신의 야구 인생 대부분인 14년을 보낸 그는 메이저리그에 복귀했다. 그해 그는 평균자책점 부문에서 가장 우수한 투수 상위 10위에 들었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산 정상에 도달해 있지 않았다. 2012년 겨울, 디키는 아프리카 최고봉인 킬리만자로산을 등반하기로 했다. 그가 10대 때 그 산에 대한 헤밍웨이의 소설을 읽은 이후로 꿈꿔온 도전이었다. 디키는 자선기금을 모금하기 위해 등반했다. 메츠팀은 그를 말렸고, 심지어 부상을 당하면 그와의 계약을 무효화할 권리를 명시한 서신까지 보냈다.
디키는 다가오는 시즌에 연봉을 몰수당하는 위험을 감수하고, 등반을 밀어붙였다.
"왠지 모르지만 내 평생 그 어떤 때보다도 나 자신이 왜소하다고 느꼈다. 뭔가에 완전히 도취된 기분이었다."
같은 해 디키는 그의 야구 경력에서 최고의 시즌을 누렸다. 투수로서는 전성기가 한참 지난 서른일곱 살에 디키는 대단한 성취를 이뤘다. 그는 처음으로 올스타 경기에 참여했다. 그는 메츠팀 역사상 1안타만 허용하고 32이닝 연속 무실점 기록을 세웠다. 그는 리그에서 스트라이크아웃 부문 선두를 달렸고, 너클볼 투수로는 최초로 사이 영(Cy Young) 최우수 투수상을 받았다.
그는 뉴욕 메츠팀과 여러 해에 걸쳐 수백만 달러 연봉을 받는 계약을 맺었다. 그와 동급에 속하고 그보다 성적이 우수한 투수 아홉 명 가운데 여덟 명은 이미 은퇴했고, 나머지 한 명은 다시는 메이저리그로 복귀하지 못했다. 그러나 디키는 이제 막 자신의 숨은 잠재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그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게 된 비결은 다른 이들의 도움을 받아 구축한 '데이터와 자료' 덕분이다. 서로 다른 수많은 원천에서 비롯된 조각들을 모아 '자신만의 방법론'을 만드는 데는 한참이 걸렸다. 그러나 그의 코치가 그를 다시 원점으로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그는 정체기를 절대로 벗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정체기에 빠졌다고 끝이라는 징후는 아니다. 정체기는 최고점을 찍었다는 징표도 아니다. 정체기는 가던 길을 되돌아서 새 길을 찾을 때가 됐을지 모른다는 신호다. 정체기에 빠지는 이유는 엉뚱한 방향으로 진행하고 있거나, 엉뚱한 길을 택했거나, 연료가 바닥났기 때문이다. 추진력을 얻으려면 뒤로 물러서서 다른 길을 개척해야 한다. 그길이 애초에 여러분이 가고자 했던 길이 아니라고 해도 말이다.
그길이 낯설고 굽이치고 험한 길일지 모른다. 진전으로 향하는 길은 직선이 아니다. 직선으로 향하는 길은 보통 고리 모양으로 굽이치며서 펼쳐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