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은 평생 두 번 울었다. 그 한 번은 1987년 광주를 찾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민주열사들이 묻힌 망월동 공동묘지를 찾을 때이고, 두번 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 합동 분향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할 때이다. 이번에 공개된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1987년 광주를 방문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2시간 남짓 걸리는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나가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기억되고, 보관된 필름만 가지고 선생의 일대기를 표현하기엔 2시간이 부족했으리라, 편집을 위해 검토한 기록물 시간만 1700시간 분이라 하니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수고스러움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번 영상이후 후속편이 예고되어 있다.
故 김대중 대통령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제작되고 지난 1월 10일 개봉한 ‘길위의 김대중’을 보고 왔다. 2시간 넘게 다큐멘터리로 편집된 영상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상영내내 안타까움과 분노를 느끼게 했다. 내가 피상적으로 알고 있거나, 왜곡되게 알고 있었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해 실체를 알게됨과 동시에 왜 지금은 그런 위대한 정치인이 나오지 않는가?란 안타까움과 분노인 것이다. 그는 우리나라 15대 대통령이며, 영원한 선생님으로 불린다.
김대중 선생은 그냥 단순히 우리가 알고 있던 것처럼 인동초, 남아공 넬슨 만델라나 필리핀의 아키노와 비교하는 정치인이 아니다. 선생은 사업가이며, 철학자이고, 사상가이며, 인권운동가이고, 예언가이다. 그리고 놀라운 것은 평생을 공부하는 노력가인 것이다. 전두환 군부독재시대에 광주민주화운동의 주범으로 조작되어 내란죄로 사형을 선고받고 옥살이를 하는 동안에도 옥중에서 600여권의 책을 정독하고, 영어공부를 독학으로 섭렵했다. 영상에서 보면 일본에서는 유창한 일본말로 응했으며, 미국 망명시절에는 유명한 티비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영어로 인터뷰하고, 영어로 연설하였다. 역대 대통령 중에 이렇게 해박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대통령을 본 적이 없다.
목포 앞바다에 있는 ‘하의도’란 섬에서 태어난 선생은 어머니의 의지로 목포로 건너와 성공한 청년 사업가로 성장한다. 하지만 해방이후 이승만 정부의 부패한 정치 현실과 6.25전쟁으로 인한 암울한 백성들의 현실을 직면하며, 국민을 위한 현실 정치인으로 입문한다. 정치인으로서 뛰어난 언변과 혜안을 가지고 있었으나, 현실 정치판은 냉혹하였고, 4번의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다. 이승만 정권이 4.19혁명으로 무너지고, 장면정부가 과도기인 대한민국의 이끌고 있을 때, 대변인으로 발탁되어 본격적인 청년 정치인으로 성장하여 결국 강원도 보궐선거에서 5번 만에 국회에 입성하게 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국회의원이 되는 즉시 박정희의 쿠데타로 의회가 강제 해산되면서 그의 옥중생활의 시작을 알린다.
[7대 대통령 선거에 야당 후보로 나선 선생은 박정희의 영구집권 야욕을 예견한다]
젊었을 때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국민을 위한 정치 신념이 확고한 ‘행동하는 양심’ 이었다. 행동하지 않은 정치는 죽은 정치라 선언하고 당시의 박정희 군사독재 정권에 정면으로 부딪혔다. 당시의 정치 신인임에도 불구하고 40대 기수론을 앞세워 김영삼과 이철승을 제치고 신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선 선생은 선거에서는 이기고, 투표에서는 아깝게 90만 표 차이로 박정희에게 져, 그 이후로 위기감을 느낀 정적으로부터 온갖 탄압을 받으며 인동초(忍冬草)의 세월을 보내게 된다. 70년대 초에 치뤄진 7대 대통령 선거 당시, 수백만명이 모인 장충공원 선거 유세는 지금도 역대급으로 회자되고 있다. 당시 초등학교에 갓 들어간 내가 듣기에도 어마어마한 유세현장이었고, 그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말을 잘하는 사람으로 선생을 뽑는 사람이 많았다.
[일본 망명시절 선생은 중정 요원들에 의해 납치되고 죽을 고비를 넘긴다]
선생은 7대 대선 패배이후 예견한대로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위해 만든 유신헌법(1972년)에 결사 항쟁하며 일본 망명길에 올랐으며, 일본에서 외신들을 통해 한국의 군사독재의 부당함을 알리고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하는 과정에서 73년 8월 8일 박정희가 사주한 중앙정보국 요원들에 의해 일본 그랜드 팰래스 호텔에서 납치당한다. 하지만 미국의 개입으로 당시의 한국의 미국대사관을 통해 박정희에게 압력을 가하여 극적으로 살아남는다.
[197년 10월 26일 박정희의 장기 집권이 심복 김재규 손에 마감하게 된다]
그 이후 일본 망명길에서 귀국한 이후 가택연금과 구속을 반복하며 탄압을 당하던 선생이 다시 현실 정치에 복귀하게 된 계기는 79년 10.26사태로 박정희가 죽은 후에야 가능하게 된다. 오랜 독재에서 해방된 국민들은 민주주의에 대한 열망이 컸으나, 또 다시 신군부의 쿠데타로 약속된 '서울의 봄'은 오지 않았다. 오히려 신군부의 계략으로 '빨갱이'로 조작되며, 내란의 수뇌로 사형선고까지 받게 된다.
[중정의 오랜 고문 이후 전달된 신문에서 광주사태를 알게 된다] 신군부에 의해 간첩과 내란음모로 조작되는 과정에서 진술을 강요당했으며, 중앙정보부의 모진 고문을 받고 있을 때, 광주는 계엄군이 점령하여, 수많은 양민을 학살하게 되고 있음을 나중에야 신문을 통해 알게 된 선생은 대성통곡하였다고 한다. 자신으로 인해 광주시민들이 희생을 당했다고 하는 자책감과 이런 사태를 예견하고도 미리 막지 못한 무능함으로 스스로 자괴감에 빠져들기도 하였다.
[전두환 독재정권에 대항하여 광주시민들이 붕기하였다] 전두환을 중심으로 한 신군부의 정권욕 희생양으로 광주의 시민이 대상이 되었고, 그 사태의 수괴로 김대중을 지목한 것은 '전두환' 또한 '박정희'처럼 김대중 선생을 가장 두려운 정적으로 본 것이다. 광주민주화운동과 함께 국가 내란죄를 덧씌여 선생은 '사형선고'를 받는다. 이 모든 것이 전두환 일당의 계략에 의한 것이며, 무고한 시민들은 정의감과 의협심으로 시작된 시위가 그들의 간악한 함정이었음을 훗날 알게 된다.
[사형선고를 받고 옥중생활을 하면서도 끊임없는 독서와 글쓰기는 계속되었다] 선생은 옥중에서 사형을 앞두고 있는 과정에서도 국민을 위한 민주주의만 생각하고, 정적에 대한 극단적인 반대를 하는 극좌가 아닌 타협과 관용, 대화를 주장하는 보수 민주주의자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그는 빨갱이도 극진적인 좌경도 아닌 민주주의와 평화를 주창하는 현실적인 정치인이었다.
[중앙정보부 직원이 이희호 여사와 함께 미국 망명을 회유하고 있다] 사형을 앞두고 있던 사형수였지만, 미국을 비롯한 민주세력의 지지와 도움으로 사형에서 무기로 감형되어 목숨을 건졌으며, 옥중에 있는 동안 600권이 넘는 책을 정독하였고, 언어공부에도 열성을 보였다. 훗날 미국 망명길에 영어 인터뷰와 영어 연설이 가능한 것도 그 때 배운 영어가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오랜 옥중 생활로 몸이 상한 선생에게 이희호 여사를 통해 미국 망명을 회유하고, 그 것도 모자라 직접 정보원이 선생에게 획책하는 영상이 그대로 공개되었다. 이 장면은 전두환 정권이 선생의 사사로운 모든 행동을 녹화하고 감시하고 있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777일간의 미국 망명길에 선생은 오직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헌신했다] 777일간의 미국 망명길에서 선생은 우리나라 민주화를 위해 미국 전 지역을 순회하며 강연만 150회 이상하고, 각종 티비 프로그램에 참여하여, 독재를 불식시키고, 민주화를 위해 지원해 줄 것을 호소한다.
민주주의를 해 달라는 것이 아니다.
민주주의는 우리가 할 테니 독재정권의 지지를 철회하고,
민주주의를 할 수 있는 여건만 만들어 달라.
먼 타국에서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망명길에 있으면 통상 현실 생황에 안주하며, 자신의 안위만 생각할 텐데, 망명생활 내내 우리나라의 민주화를 위해 미국 정제계 인사들을 일일히 찾아다니며 지지를 호소하고, 각종 미디어와 단체를 찾아, 쉬지 않고 강연을 이어갔다는 것은 그가 얼마나 대한민국을 사랑하는지 알 수 있었다.
[오랜 미국 망명길에서 귀국하는 선생은 수많은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다] 1985년 2월 8일, 2년여의 미국망명을 뒤로 하고, 대한민국의 민주화 투쟁을 위해 귀국을 강행한다. 당시 불과 6개월 전에 필리핀의 야당 인사인 아키노가 미국 망명길에서 귀국하는 마닐라 공항에서 암살되는 사건이 있었기에 선생의 귀국 결단은 매우 위험한 행보였다. 하지만 미국의 국회의원, 경제인사, 가수 등 저명인사들이 귀국 길에 동행하면서 그런 불상사는 없었으며, 미리 공항에 대기하고 있던 안기부 요원들에 의해 바로 가택에 감금되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 이후 처음 찾는 광주에서 오열하고 있는 김대중] 선생은 평생 두 번 울었다. 그 한 번은 1987년 광주를 찾아 광주민주화운동 당시 희생된 민주열사들이 묻힌 망월동 공동묘지를 찾을 때이고, 두번 째는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날 합동 분향소를 찾아 유족을 위로할 때이다. 이번에 공개된 영화 '길위에 김대중'은 1987년 광주를 방문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끝을 맺는다. 2시간 남짓 걸리는 다큐멘터리가 이렇게 시간가는 줄 모르게 지나가는 건 나만의 느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기억되고, 보관된 필름만 가지고 선생의 일대기를 표현하기엔 2시간이 부족했으리라, 편집을 위해 검토한 기록물 시간만 1700시간 분이라 하니 영화를 제작하는 사람들의 수고스러움도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이번 영상이후 후속편이 예고되어 있다.
한 사람의 위대한 정치인을 조명하는 단순한 다큐멘터리로 보기엔 너무 아깝다. 12.12 사태를 극화한 '서울의 봄'에서 보인 열정이 '길위에 김대중'으로 옮겨가기를 바란다. 자신이 지지하고 응원하는 정치인을 떠나, 우리나라 역사의 한 획을 차지하고 있는 한 인간으로써 김대중을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어록 중 가장 마음에 와 닿는 글귀로 마무리 하고자 한다.
정치인은 상인적 현실감각과 서생적 문제의식을 함께 갖춰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