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절약해주는 새로운 기술은 그게 어떤 것이든 우리 활동의 리듬과 흐름을 가속화한다. 결국 새 기술은 우리에게 더 많은 시간을 선물하는 게 아니라, 일거리만 더욱 부풀린다.” 세계적 석학 제러미 리프킨(Jeremy Rifkin)의 명언이다.
전자레인지와 디지털카메라 등 최신 시간 절약 기술이 속속 선보이며 거추장스럽기만 한 요리와 촬영을 초고속으로 바꿔놓으며, 마치 우리에게 무한한 시간을 약속해주는 것만 같았다. 그럼에도 기묘한 일은 이런 모든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상황은 거꾸러 굴러간다. 어째서 시간은 절약하면 할수록 더 부족하게만 느껴지는 걸까?
원래 최신 기술과 경제 발달은 고된 업무와 일상을 손쉽게 해주고 내키지 않는 일의 부담을 덜어주며 즐기고픈 것을 할 여가 시간을 많이 만들어주자는 취지가 그 바탕이었다. 하지만 시간의 풍요로움은커녕, 오히려 시간이라는 귀중한 자원이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는 안타까움에 시달릴 따름이다.
그럼 그동안 얻어낸 휴식을 위한 시간은 도대체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물론 과거보다 훨씬 더 적게 일하는 사람들이 없는 것은 아니다. 또 이런 사람들 덕분에 평균적으로 자유시간이 예전보다 늘어난 게 아닐까?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전혀 그렇지 않다고 경제학자들은 말한다. 지난 세월 순수 근무시간이 줄어든 대신, 학습에 들이는 시간은 수직 상승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배워야 한다는 강박관념 탓에 정보의 처리와 소비에 들이는 시간이 몰라볼 정도로 많아진 것이다. 그리고 온갖 기술 발달이 이루어졌음에도 살림을 하는 데 드는 시간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이에 대해 사회학자인 파킨슨은 “어떤 일이든 그것을 처리하는 데 시간이 많이 주어질수록 작업량 또한 그만큼 늘어난다.”라고 말한다. 즉, “우리가 기술로 시간을 절약하는 그만큼, 우리의 욕구와 요구 또한 증가한다.”는 것이다. 100년 전만 하더라도 깨끗한 옷, 깔끔한 집, 화려한 코스 요리가 사치로 여겨졌다면, 오늘날 이런 것은 보편화 되었다. 그리고 이런 원칙은 거의 모든 생활 영역에 적용된다. 이메일, 팩스, 전화 등을 이용한 커뮤니케이션은 1900년대 우편을 이용하던 것에 비해 상대가 안 될 정도로 빨라졌지만, 그 결과 우리는 예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많은 커뮤니케이션에 매달린다.
본래 업무 단순화를 위해 고안된 이메일은 어느새 시간을 잡아먹는 고문도구가 되고 말았다. 갈수록 더 빠른 자동차, 열차, 비행기 등은 여행을 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절약해주는 것 같지만, 현실은 다르다. 여행 경로를 줄여주는 대신 더 많이 더욱 자주 여행을 다니게 하는 것이다. 이로써 우리가 여행과 수송으로 쓰는 시간은 100년 전이나 똑같아지고 말았다. 만약 우리가 선조와 똑같은 음식, 여행, 오락에 만족한다면, 우리는 시간의 파라다이스를 만끽하리라.
그런데도 우리는 차고 넘칠 정도로 시간을 얻으면서도 늘 시간 부족에 허덕이는 역설에 시달리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듣는 ‘시간 관리 세미나’에서는 일반적으로 어떻게 해야 일하는 시간을 보다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까에 집중하지, 어찌해야 좀 더 여유를 누릴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뒷전이다. 시간 관리 기술로 더 많은 업무를 더 짧은 시간 내에 해결할 수 있는 직원은 능력이 뛰어나다는 칭찬을 듣기는 하겠지만, 이내 훨씬 더 과중한 업무를 부여받을 게 틀림없다. 결국 스트레스의 수위는 예전보다 더 높게 치솟을 따름이다.
이탈리아의 심리학자들이 티롤 남부 지방 산촌 농민들의 생활습관을 연구하다가 놀라운 발견을 했다. 농부들을 상대로 일과 여가 시간을 어떻게 보내냐고 묻자, 그 둘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냐는 대답이 돌아온 것이다. 심리학자들은 놀란 나머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농부들은 그저 자기들이 해야 할 일을 할 따름이라고 했다. 젖소의 젓을 짰으며, 밭의 잡초를 뽑아주었고, 사이사이 아이들에게 옛날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며, 저녁이면 아코디언 연주를 즐겼다. 뭐가 마땅히 해야 할 의무이고 무엇이 놀이인지 구분하지 않았다. 더 많은 시간을 갖게 된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물음에 산골 사람들은 아주 당연하다는 듯이 “지금처럼 똑같이!”하고 대답했다.
시간이 부족하다는 느낌은 시간과는 별 관계가 없으며, 어떤 태도와 관점을 갖느냐에 달린 것이다.
자신의 삶이 어떤 조건을 가져야 하는지 스스로 결정하고 통제할 수 있어야만 한다. 자신이 무얼 해야 할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은 스트레스에 덜 시달렸으며, 더욱 건강했다. 한정된 시간에 얼마나 많은 일을 하느냐는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업무량의 정도보다는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는 게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자신의 시간을 다스릴 수 있는 지배권을 갖는 것이야말로 시간 부족과 끊임없는 압박감에서 해방시켜주는 가장 중요한 열쇠 가운데 하나다. 참다운 휴식을 누리기 위해서는 아직 한 가지가 더 필요하다. 그건 바로 끊임없이 산만함에 시달리지 않고 순간의 행복을 충분히 음히할 줄 아는 능력이다.
우리가 무언가 정말 제대로 맛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는 맛보는 대상이 아니라 온전히 그것에 집중할 수 있는 능력에 있다. 하지만 통상적인 가치관은 정 반대 방향을 지향한다. 더 많은 기회를 가지고 더욱 풍요한 상품을 소비할 때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통념이 그것이다. 우리가 지금껏 배운 행복한 인생이란 잔고가 두둑한 계좌, 더 큰 집, 보다 빠른 자동차, 내키는 대로 떠나는 해외여행이었다. 무한해 보이는 선택 옵션이 우리의 ‘다중 선택 사회’가 약속해주는 행복이며, 저마다 최신 유행에 따라 행복해질 수 있다고 유혹한다.
198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대다수 사회학자들은 더 많은 선택지가 실제로 행복을 보장해준다고 믿었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날이 갈수록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동안 사회심리학자들이 확인했듯, 그 반대가 진실이었던 것이다.
덜 누리는 것이 더욱 많은 기쁨을 준다.
완벽하지 못했던 세상에서는 좀 부족할지라도 기꺼운 마음으로 받아들이며, 언젠가는 더 좋아지겠지 하는 기대감으로 즐거웠다. 그러나 어떤 욕구에도 맞춤한 상품을 제시하는 현대 상품 세계는 부족함을 용납할 줄 모른다.
미국의 심리학자 배리 슈워츠(Barry Schwartz)는 끊임없는 부의 증가가 결국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불행에 빠드릴 것이라고 확신한다. 슈워츠는 그 원인의 하나로 인생의 모든 영역에 걸친 선택 자유의 증가를 꼽는다. 도대체 뭐가 뭔지 한눈에 조망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많은 상품 혹은 방송 채널들 사이에서 어느 하나를 선택해야만 하는 사람은 자유를 맛보는 게 아니라 치솟는 스트레스에 시달릴 뿐이다.
부유할수록 불행해진다는 슈워츠의 주장에 좀 지나친 부분이 없진 않다. 어느 정도의 부유함은 만족스러운 인생을 위해 무시할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아주 기본적인 욕구조차 충족시키지 못하는 사람이 기쁜 얼굴을 하는 것은 힘든 노릇 아니겠는가? 하지만 시간에 쫓기는 듯한 느낌은 우리가 지나치게 많은 상품과 선택 가능성을 누리느라 치르는 대가이다.
휴식은 연습이 필요하다. 언제나 본능적인 충동에만 끌려다닐 게 아니라. 때로는 버리고 비울 줄도 알아야 한다. 온전히 의식적으로 포기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말이다. 무거운 짐을 버릴 때 풍선은 비로소 날아오른다. 종종 선택 가능한 것의 가짓수를 줄임으로써 어떤 만남이나 활동의 순간을 오롯이 완전하게 맛볼 줄 알아야만 한다.
덜 누린다는 의미는 우선, 자신이 시간의 주인이 되는 느낌을 가지는 것이다. 또한, 늘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더 나은 대안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것을 포기할 줄 알아야 한다. 이런 현명한 포기야말로 바로 ‘지금’이라는 유일한 순간에 온전히 주의를 모으고 집중할 수 있게 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