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 날지 못했다
“여러분 각자는 그 정기선보다 놀라운 생물체이며 더 긴 항해를 해야 합니다. 저는 여러분에게 ‘오늘만의 구획’을 만들어서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는 것이 안전한 항해를 보장받는 방법임을 알 만큼 확실하게 기계 장치를 배울 것을 권유합니다. 배의 상갑판 중앙에서 그 커다란 차단벽이 제대로 작동하게 하십시오. 살아가면서 단계마다 버튼을 눌러 그 강철 문이 죽은 과거를 격리하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또 다른 버튼을 눌러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격리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비로소 안정해집니다. 오늘에만 충실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과거를 격리하십시오. 죽은 과거가 죽은 사람들을 묻게 하십시오. 어리석은 사람들을 죽음의 길로 인도하던 어제를 격리하십시오. 어제의 짐 위에다 내일의 짐을 얹어서 오늘 지고 간다면 강한 사람도 주저앉게 됩니다. 과거와 같이 미래도 완벽하게 격리하십시오. 미래는 바로 오늘입니다. 내일은 없습니다. 구원받을 수 있는 날은 바로 지금입니다. 미래를 걱정하는 사람은 정력 낭비, 정신적 고통, 근심이 계속해서 따라다닙니다. 철저하게 격리하십시오. 모든 곳을 차단벽으로 막은 다음 오늘만의 구획에서 사는 습관을 들일 준비를 하십시오." - 윌리엄 오슬러 경 / 예일대학 연설 -
그 어느 때보다 자신있었다. 1년 넘도록 철저히 준비해 왔고, 서울시에서 주최하는 중장년 창업컨설팅에도 참여하여, 전문가들로부터 각종 조언과 사례를 들었으며, 창업 경연대회도 직접 참여도 하고, 다른 사람들이 창업을 준비하거나, 경연하는 현장 참관도 수차례 하였으며, 사업계획서와 발표자료를 만드는 데 몇 달간 온 정성과 심여를 기울였다. 주변 전문가들인 지인들에게 미리 사전에 자료를 전달하고, 의견을 물었으며, 피드백을 참조하여 내용을 다듬고, 업데이트 하기를 수차례 반복하였다.
그렇게 하여, 1차 서류심사는 예상대로 쉽게 통과되었다. 사업계획서가 나름 경쟁력있게 작성되었다고 자부하고 있던 터라, 나로써는 당연한 결과였다. 그리고 발표자료 작성과 발표는 불과 열흘 안에 이루어지고, 그 누구보다 발표는 자신이 있었기에, 이 또한 무난한 통과를 낙관하였다. 오히려 통과는 당연하고, 1등으로 통과할 것을 목표로 삼고, 주변에 공표하고 알렸다.
하지만, 1등은커녕, 30등 안에도 못 들고 탈락이란 통보를 받는 처참한 결과를 나았다. 그 순간 하늘이 노랬다. 예상치 못한 결과에 대해 마음을 추스릴 여력이 없었고, 뭔가 잘못된 것이라 생각했다. 심지어, 해킹에 의한 잘못된 결과를 보낸 것이 아닌가 싶었다. 하지만, 악몽의 하루를 지나 다시 곰곰이 보내온 문자와 메일을 보니, 점점 현실로 다가왔다. 해킹에 의한 오류 통보였으면, 오래 지나지 않아 문제가 있었다고 문자라도 와야 될 상황이었다.
더 최악인 것은 그 때가 주말을 바로 앞에 둔 금요일 저녁이라는 것이다. 당초 예정된 날짜보다 3일이 빨랐고, 담당자는 당초 예정된 날보다 더 늦어질지 모른다는 안내를 했기에, 발표전까지는 강진에 내려가 ‘남미륵사’에서 주최하는 남해당화 꽃 구경을 갈 계획이 잡혀있었다. 남도에서 벚꽃과 남해당화로 수놓은 아름다운 경치를 보고 오면, 기분좋은 합격 소식을 받을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런 저런 이유로 마음의 상처는 깊어갔다. 현실부정을 넘어, 원인을 알고 싶었다.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그날 발표도 그렇고, 제출한 계획서나 발표자료에 훔잡을 것이 없이 완벽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의 의구심과 불신의 마음이 ‘이의신청’이라는 제도적 절차를 밟기로 결심하게 했다. 담당자에게 긴 메일을 써서, 사실을 확인해 보고 싶다고, 처음엔 읍소하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결과를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나보다 더 잘하고 우수한 팀이 선정되는 것은 무어라 할 말이 없지만, 나보다 못하고, 부족한 팀이 나대신 선정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사실을 알아야 납득을 하고 받아들이며, 다음을 기약할 수 있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나의 일주일은 어느 누구에게도 터 놓지 못한 채, 힘겨운 절차와 프로세스를 통해 싸우고 있었다. 명백한 절차상의 하자도 있었고, 평가위원들의 역량 부족에서 공정한 평가가 아닌 뇌피설로 평가한 정황도 파악되었다. 하지만 이미 엎지러진 물을 주어담을 만큼 우리나라 공무원들은 유연하지 않았다. 일주일 이후에 잡힌 '이의제기 심의위원회'에 참석하였다. 5명의 심사위원이 배정되었고, 준비된 사전자료를 토대로 이의신청에 대한 타당성에 대해 설명하는 시간을 가졌다. 주어진 시간을 초과하여 진행된 심의위원회는 형식적으로 흘러갔다. 공감하는 눈치가 보임에도, 동조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심지어 운이 나빴다는 말도 안되는 변명도 있었다. 최대한 강하게 어필하면서도 이런 태도라면 주어담기엔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고 돌아왔다.
그 후로 또 일주일이 지났다. 이미 정해진 수순으로 심의위원회 결과를 보내왔다. 예상과 한치의 오차도 없이 내용은 변명으로 채워졌다. 일부 평가에 오류가 있었으나, 대세에는 지장이 없다는 예측된 답변이었다. 다음으로 준비한 상급기관과 국가를 상대로 민원을 제기해야할 판국이었다.
하지만, 민원을 제기하려는 당초의 생각을 접었다. 이 또한 무의미한 시간의 낭비를 초래하고, 내 마음의 상처는 더 깊어질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악법도 법이고, 오심을 한 심판도 심판이다. 인연이 없는 것을 붙잡고 있을 이유가 없어졌다. 억울하고, 분하지만, 이런 나의 열정과 에너지를 그런 무의미하고, 소모적인 것에 낭비하는 대신, 지금 하고 있는 일에 쏟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런 나의 마음다짐에도 쉽사리 현실로 돌아올 수 없었다. 그런 와중에 나에게 큰 영감을 준 것이 데일 카네기의 글이다. 그는 두려움과 걱정에 대해 단호하게 말한다. 지난 과거에 연연해 하지 말고, 오지 않는 미래에 대해 걱정할 필요없이, 오로지 '현실에 충실'하라고 주문한다.
앞에서 언급한 오슬러 박사의 예일대학 강연의 의미는 내일을 준비하는 데 어떤 노력도 하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그는 지혜와 열정을 총동원해서 오늘 가장 잘하는 일에 집중해야 내일을 잘 준비할 수 있다고 말했을 뿐이다. 그것만이 내일을 준비하는 유일무이한 방법이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해 생각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날로 족하니라.
- 오슬러 경 -
시스템 에어컨으로 유명한 월리스 H 캐리어는 사업상 어려움이 닥치면, 최악의 상황을 생각하고, 해결방안을 찾고, 즉각적으로 행동에 옮긴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걱정할 때 우리의 마음은 흐트러지고 결단을 내릴 수 없다고 하고, 굳게 마음먹고 최악의 상황을 받아들이면 막연한 생각들을 물리치고 문제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다고 말한다. 즉 최악의 상황을 인정하면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 그것은 역으로 이제는 무엇이든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결할 문제가 생겼을 때 지나치게 생각하다 보면 반드시 혼란과 걱정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사실 조사가 끝났는데도 또 생각을 거듭하면 해로운 순간이 있습니다. 결정을 내린 다음에는 뒤돌아보지 말고 행동해야 하는 순간이 있습니다.
- 월리스 H 캐리어 -
지난 과거에 대해 인정하고 털지 않으면 앞으로 한 발자국도 나아갈 수 없음에 오늘 이자리를 빌어 훨훨 털어버리고 다시 날아가려 한다. 어쩌면 찬란하게 빛날 수 있었지도 모르는 악몽같은 2024년 4월을 오늘로 마감하려 한다. 그 무엇보다 가장 힘들었던 것은 나 자신보다는 나에게 기대가 컸던 동료, 친구, 가족, 지인들의 시선이었다. 이제 이런 모든 것도 선박의 차단벽으로 막고, 오늘만의 구획을 만들어 나만의 새로운 영역으로 가꿔야 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