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절 아침에 일을 생각하다
오늘은 노동절이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오늘 하루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운 날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늘은 일에 대한 생각을 정리해 보려 한다.
통상적으로 일은 하기 싫은 것, 저주, 심지어 벌로 여겨지기까지 한다. 일은 목적을 위한 수단이며, 다른 무언가를 하기 위해 마지못해 하는 것이다. 우리는 돈을 벌어야 세금도 내고, 휴가도 가고, 내가 사고 싶은 것도 살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매달 일정 급여를 받는 대신, 자신의 시간과 노동을 대가로 지불한다. 일이 즐거울 수 없다. 출근시간이 지옥이고, 퇴근시간만 기다려지며, 주말과 공휴일이 그리워진다.
일을 저주로 보는 개념은 고대 그리스까지 거슬러 올라가 산업혁명 시대까지 이어지며, 지금까지도 사람들이 일에 갖는 생각과 느낌에 영향을 준다. 어쩌면 그리스 신인 제우스가 시지포스에게 영원히 무의미한 노동을 반복해야 하는 벌을 내린 데서 시작됐을지 모른다. 시지포스는 거대한 바위를 가파른 언덕 위로 밀고 올라가 굴러 떨어지면 또다시 밀고 올라가야 하는 벌을 받았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일을 굴욕으로 보았다. 그들에게 일은 사색과 지식 습득에 전념하는 이상적인 삶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로마인들의 시각도 비슷했다. 우리나라 조선시대의 양반들 시각도 마찬가지다.
산업혁명이 일어나면서 새로운 방식의 일과 새로운 형태의 고난이 생겨났다. 일이 길어지고 힘들어졌으며 고통스러워졌다. 증기의 개발로 석탄 가루를 들이마시며 폭발 위험을 무릅쓴 채 등골 빠지게 힘든 교대 근무를 하는 탄광의 광부들을 생각해 보라. 직조 기계에 손가락이 잘려나가는 직물 공장 노동자들도 있다.
프레더릭 테일러(Frederick Taylor)는 철강회사의 공장 감독이었는데, 강철판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를 관찰하여 노동자들이 제품을 더 빨리 생산해 낼 수 있는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덕분에 공장 노동의 효율성이 높아졌지만, 노동자들은 더 지루해졌고, 마음을 빼앗긴 채 기계의 일개 부품으로 전락했다.
하지만, 4차 산업혁명을 맞이하여, 지금의 경제 환경과 일의 본질은 세계적으로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 급변하는 기술과 진화하는 사회적 규범들 때문에, 이제 표준화된 과정과 장기적인 계획보다는 민첩성, 혁신, 협력, 속도 등이 점점 소중해졌다.
그 결과 일의 본질도 변했다. 판에 박힌 작업들이 자동화된 덕분에 건강을 해치는 육체적 긴장, 몹시 지루한 찰리 채플린식 단순노동, 지게차 사고 같은 일들이 줄어들고 있다. 제조업과 농업을 비롯해 육체적 노동이 힘든 다른 분야에서도 일의 육체적 부담은 줄어들고 있다. 리더십, 커뮤니케이션, 분석 능력이 가장 귀한 대접을 받으면서, 세상을 선도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일의 본질은 이처럼 빠른 속도로 진화하는 데, 일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각은 여전히 변하지 않고 있다.
그대들은 항상 일이 저주이고 노동이 불운이라는 말을 들어 왔다
그러나 나는 그대들에게 말한다
그대의 일은 대지의 가장 먼 꿈, 그 꿈이 탄생했을 때부터
그대의 몫이었던 꿈 한 조각을 그대가 채우는 것이다
노동을 멈추지 않고 살아갈 때
그대는 진심으로 삶을 사랑하게 되고
노동을 통해 삶을 사랑하는 것은
삶의 가장 깊은 비밀에 다가가는 것이다
- 칼릴 지브란 -
레바논의 시인 '칼릴 지브란'의 말처럼, 일을 인간에게 없어선 안 될 요소이자, 각 개인이 의미를 찾는 데 꼭 필요한 열쇠이며, 삶에서 성취감을 찾을 수 있는 길로 생각하면 어떨까?
일은 우리를 인간답게 만드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다. 이제까지 우리는 일이란, 입에 겨우 풀칠이나 하는 불운한 사람들에겐 참고 견뎌야 하는 것이고, 운 좋게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사람들이라면 피할 수 있는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 종교적으로는 일의 근원을 원조라 했다. 하지만 아담과 이브는 원죄 때문에 벌을 받았지만, 일 자체는 벌이 아니었다. 고통이 벌이었다. 벌은 유쾌하지 않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의 필수 요소인 일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
주변에 자신에게 주어진 일을 소명으로 생각하고 열정을 다해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일 자체가 삶의 원동력이고 성취감의 도구였다. 그들은 갖가지 도전 앞에서 낙담하기보다,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가 생겼다며 흥분했고, 도전을 기회로 생각했다. 일은 참고 견디는 게 아니었다. 일은 좋은 것이었으며, 각자의 지적 능력과 창의력을 발휘하는 길이었다. 일은 ‘행복을 추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수단이자, 자신의 꿈을 달성하게 해주는 원천이었다.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을 쓴 '빅터 프랭클(Viktor Frankl)'은 끔찍한 경험과 고통 속에서 어떻게든 의미를 찾아내려 한 사람들이 살아남을 가능성이 더 높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삶이 쾌락이나 권력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고 결론 내렸다. 삶은 의미를 추구하는 것이며, 여기서 의미란 성취감과 행복에 이르는 궁극의 길이다. 그는 사람이 일, 사랑, 용기 이 세 가지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무언가 ‘중요한 일’을 하는 도중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역경을 극복하는 ‘용기’를 얻는 경우가 많다고 생각했다.
이처럼 일은 단순히 고달프고, 괴롭고, 지루한, 생계를 위한 마지못해 하는 노동이 아니라, 내가 의미있는 삶을 살아가는 데 가장 근원이 되고, 개인적인 행복을 넘어 주변에 공유함으로써 세상에 도움이 되는, 그래서 성취감과 희열을 맛보는 가치로 봐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