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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별 정착기

<아지트>

by 도란도란 Mar 11.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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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기에 걸렸다. 열까지 났다. 난로 위의 주전자가 된 기분이었다. 물이 끓어오르고 곧 뚜껑이 열릴 듯 요란하게 달그락거리는 주전자. 내 머리도 뚜껑이 있다면 곧 열릴 것 같았다.   

  

  “변소만 가면 한세월이더니 과학동아는 또 누가 거기 갔다 놓은 거야?”     


엄마가 물수건으로 내 이마를 연신 닦으며 말했다.  

   

  “아… 빠….”     


  “또 아빠야? 따뜻한 방은 놔두고 왜 다들 거기 가봐. 도통 이해할 수가 없다니까.”     


아빠는 이것저것 파는 일을 했다. 요즘은 냄비랑 그릇, 프라이팬을 팔았다. 아빠가 뭘 파는지는 알고 싶지 않아도 알 수밖에 없었다. 창호지 바른 문은 모든 소리를 생생하게 통과시켰다. 초등학교 때부터 친구였다는 엄마와 아빠는 자주 다투었다.     


  “3만 원짜리 냄비 하나 팔고 30만 원이나 하는 전집을 사주는 게 말이 돼?”     


  “세상살이란 게 다 상부상조야. 내 거 팔았으면 나도 하나 사주는 게 사람의 도리지, 안 그래?”

    

  “수지타산이 안 맞잖아. 당장 가서 환불해.”     


  “월부야. 한 달에 3만 원씩 10개월. 내가 매달 그 집 가면 되지 않겠어? 다음 달은 3만 원짜리 프라이팬 팔고 올게. 약속! 그리고 우리 현이가 또 책을 좋아하잖아.”  

   

아빠는 엄마 손을 끌어당겨 억지로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지키지 못할 약속이었다. 아빠는 엄마에게 평생의 원수요, 나에게는 산타였다. 전래동화전집, 세계문학전집, 학생 대백과사전, 월간 과학동아 등을 월부로 부지런히 사다 날랐다. 덕분에 나는 산골에 살아도 책 속에 묻혀 있었다. 그러나 학습지 아이템풀은 싫었다.



아이템풀은 엄마와 함께 신대륙으로 떠나는 신나는 탐험인 줄 알았는데 엄마의 차력 쇼를 보게 했다. 나는 동네에서 유일하게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한글을 읽을 수 있었는데, 엄마의 차력 쇼를 보았기 때문이다. 아빠의 상부상조로 산 아이템풀을 매일 풀어 엄마의 수지타산에 부응해야 했다.   

  

특히 아이템풀의 '하버드 수학'은 꽤 어려웠고 계속 틀리거나 이해를 못 하면 엄마는 부들부들 떨다 손에 잡고 있던 연필을 엄지 하나로 반동강을 냈다. 마치 내 허리가 반동강 나는 기분이었다. 나는 악착같이 글자를 익혔고 더 악착같이 수와 기호를 익혔다.

 



그 전화를 받은 건 감기에 걸려 꼼짝없이 방에 누워있던 때였다. 며칠을 앓고 있는지 오늘이 무슨 요일인지 가물거렸다. 까무룩 잠이 들었다 깨면 어느새 밤이 되곤 했다. 자느라 통 먹지를 못했다. 그날은 엄마가 밀린 빨래를 얼른 해오겠다며 빨래터로 갔고 집에 혼자 남았다. 나는 여전히 잠에 빠져 있었고 전화벨이 울렸다. 기어서 전화기로 갔으나 끊어졌다. 잠시 뒤 다시 벨이 울렸고 떨리는 손으로 전화기를 겨우 들었는데 놓치고 말았다. 바닥에 떨어진 전화기에 귀를 대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마치 들어본 듯 친근했다.    

 

  “지지지…직직직 우우우마아아악네네네이이이이

모오오모우우야야야…바아야바야야야나야야나.”   

  

이내 전화는 뚝 끊겼다. 이건 암호다! 우리 별에서 나에게 전화를 걸어 메시지를 남긴 거다. 내가 지구에 불시착했단 걸 우리 별에서 드디어 알아낸 것이다. 나는 까먹을까 봐 전화기 옆에 있는 메모지에 적었다. 손에 힘이 없어 덜덜 떨렸다.


지지지직직직우우우마아아악네네네이이이이모오오모우우야야야바아야바야야야나야야나


떨리는 손으로 메모지에 메시지를 옮겨놓고 또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꿈에서 나는 빨간 숯불로 변했다. 어느 순간 물 위에 둥둥 떴고 숯불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나는 숯불인데 물이 줄줄 흘렀다. 점점 작아졌고 곧 영영 없어질 것 같았다. 내 존재가 사라지기 직전에 꿈에서 깼다. 엄마가 물수건으로 내 이마를 닦고 있었다.    

 

  “깼어? 10시간을 내리 잤어. 이 땀 좀 봐. 다 젖었네. 옷부터 갈아입자.”     


  “엄마, 나 배고파.”     


엄마는 부리나케 나가 곧 양은 밥상을 들고 왔다. 물에 만 밥과 작은 소반 두 개에 김치와 깻잎이 있었다. 내가 밥 한술을 뜨면 엄마는 김치를 쭉 찢어 밥 위에 올려 주었다. 또 한술을 뜨면 이번에는 깻잎을 쪽 찢어 올려 주었다. 뒤꼍에 묻은 장독에서 갓 꺼내 온 김장 김치는 살얼음이 있어 씹는 순간 아삭하니 시원했다. 살 것 같았다.

부엌 옆문으로 나가 지하의 광에서 꺼내 온 깻잎장아찌는 짭짤하니 입맛을 돋웠다. 물에 만 밥을 허겁지겁 먹었다.


  “천천히 먹어. 체하면 안 돼.”    

     

  “엄마, 밥 또.”    

   

  “밤 12시가 넘었어. 소화 안 돼. 자고 내일 먹어.”    

 

김치와 깻잎장아찌가 나를 살려주었다. 다음 날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나흘을 꼬박 앓았다고 했다. 앓은 건 난데 엄마 얼굴이 더 창백했다.

  

  다시 바깥에 나왔을 때 세상이 달라 보였다.     


나는 아지트가 필요했다. 우리 별에 메시지를 보내야 다. 마당에 서서 어디가 아지트로 좋을지 둘러보았다. 한눈에 들어온 곳이 비닐하우스였다.

     

  ‘바로 저기야!’     


한겨울에도 춥지 않은 곳, 그 안에선 열대과일이 자랐다. 분명 자라기는 했는데 쑥쑥 자라진 않았다. 좀 자라 열매를 맺더라도 익지는 않았다. 통 열매를 맺지 못하는 파인애플, 아무리 기다려도 결코 노랗게 익지는 않았던 연두색 바나나가 있는 곳. 내가 사는 산골 동네는 전국에서 연평균 기온이 가장 낮은 지역이다. 애초에 그들이 자랄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는데 아빠는 비닐하우스 안에 열대과일을 심었다. 왜 그랬을까.     


나는 매일 턱을 괴고 앉아 연두색 바나나를 보며 언제 익나 기다렸다. 바나나는 끝내 노랗게 물들지 못했다. 비닐하우스는 여러모로 아지트로 쓰기에 적당했다. 쑥쑥 자라진 않아도 어쨌든 자라는 키 큰 열대식물과 겨울에는 쓰지 않는 농기구들이 곳곳에 있어 숨을만한 장소가 많았다. 우리 별에 메시지를 보내는 일은 철저하게 비밀이어야 했다. 내가 외계인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면 지구인들은 나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다. 실험 대상이 된 내 모습을 떠올리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럼 우리 별에 무엇으로 메시지를 보낼 것인가. 우리 별은 다른 별에 비해 유난히 밝고 반짝였다.   

  

  ‘그래! 반짝반짝 빛나는 것들을 모으자.’     


엄마의 거울이 깨진 파우더팩트, 뒷마당에 묻혀 있던 하얀 조개껍데기, 칠성 사이다 유리 조각, 개울에서 주워 온 투명한 돌과 하얀 돌, 할머니네서 몰래 빌려온 상아색 접시. 빛나는 것은 모조리 가져다 아지트에 숨겼다.     


거울이 깨진 파우더팩트에 비친 내 모습은 정말 외계인 같았다. 초록색 사이다병의 유리 조각에 비친 내 모습도 영락없이 외계인이었다. 겨울의 햇볕도 강렬했고 비닐하우스 안으로 들어온 빛에 깨진 거울을 비추자 은빛 햇살이 반짝였다. 우리 별이 내게 밤마다 별빛을 보냈다면 나는 낮에 햇살을 모아 보냈다. 우리 별은 분명 아주 머나먼 곳에 있을 테고 오직 빛만이 가닿을 수 있다.      


  “응답하라. 응답하라. 여기는 지구! 바아야바야별, 응답하라. 나야야나 지구 불시착. 구조 요청.”     


우리 별에서 내게 전화로 전해준 메시지를 해독했다. 우리 별의 이름은 ‘바아야바야’내 이름은 ‘나야야나’다. 앞부분은 아직 해독하지 못했다. 더 연구해야 다. 나에겐 매달 우편으로 오는 과학동아가 있고 스티븐 호킹 박사가 들려주는 우주 이야기가 함께 한다. 결국 해독에 성공할 것이고 우리 별에 메시지도 전달할 것이다.  

   

  나는 우리 별로 돌아간다.  

   

아지트와 연두색 바나나


며칠 뒤, 막내 이모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노란 바나나 한 다발을 사서 우리 집에 왔다. 나는 아지트에 앉아 연두색 바나나를 보며 노란 바나나를 까먹었다. 그리고 번득이듯 떠올랐다.


  내가 외계인인 증거가 다!        

화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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