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고 산후우울증이 없었다.
정확히는 우울증이 오려다 달아났다.
아이를 낳자마자 주변 사람들의 한마디, 행동 하나가 화살처럼 찌른다. 무딘 촉이라서 아프다고 하기보단
짜증이 난다.
'왜 자꾸 찔러!'
별거 아닌 행동들에 잠을 못 자고, 모유수유한다고 애쓰는 몸뚱이가 아우성을 치는 것이다. 남편은 일을 나가서도 나를 걱정하고, 집에서는 불편하지 않게 모든 일을 도맡아 해 줬다.
미안함에 나도 쉽사리 화내지 않고, 찌르는 느낌을 무시하려고 노력했다. 그럼에도 한 번씩 펑, 펑, 터지는 울음과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덜 우울해질 수 있는 '선택'을 하는 것이었다.
어떻게?
아이와 내가 적응하는 방법을 말이다.
직수로 모유수유를 하려고 시도하다가 안 돼서 유축을 했다. 모유가 많은 편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노동이 너무 힘들었다. 잠이 많은 사람인지라 밤 시간에 4시간 이상을 못 자니 힘들었다. 아이가 울지 않더라도 유축 시간을 맞춰야 했기에 2시간에 한 번씩 알람을 맞춰놓았다.
아이가 깨지도 않았는데 일어나 유축을 하려니 울화가 치밀었다. 낳기도 내가 낳았는데 먹이는 것도 내가 이렇게 온몸이 바스러져야 하나...
결국, 현타가 오지 않는 선에서 결정했다. 이틀에 한 번은 남편이 밤을 새우고 나는 유축을 안 하고 4시간은 쭉 자기로 말이다. 다행히 유축을 미룬다고 해서 가슴이 저려 일어나야만 하는 일은 없었다.
아이와 나만 할 수 있는 선택의 기로에서 우리 가정 모두가 선택해야 하는 순간이 왔다. 복직을 하고 싶었던 것이다.
지금은 하등 신경 안 쓰는 말들이 그땐 응어리가 되어 뿌리가 박히는 듯했다.
"왜 벌써 일 나가?"
"애가 코로나 걸리면 어떡해?"
"어린이집을 벌써 보내?"
"모유 잘 나오니까 수유 계속해봐."
등등
나 같아도 궁금해서 물어볼법한 얘기들을 흘려듣는 게 그땐 가슴에 남아 '버러지 같은 여자'라는 인두가 새겨졌다.
행복하려는 선택에도 행복할 수 없을 것 같으면 인터넷 망령은 SNS를 떠돈다.
그러다 '괜찮아 네가 그러는 건 평범한 현상이야.'
글 한 줄, 영상 한마디에 엉엉 운다.
어떤 날은 아이 재우려고 틀어놓은 유튜브에서 [꿈을 꾸는 문어]라는 노래를 들었는데
꿈에선 꿈꾼 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노래 가사에 애기를 안고 그렁그렁 눈물을 흘렸더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50일이 넘으니 아이가 '인간'의 반열에 오르며 밤낮의 패턴이 잡히기 시작했다. 밤잠이라는 걸 비슷하게라도 자주니 한결 노동력이 줄게 됐다.
아이 60일 즈음에 취업이 되고, 대학원 입학도 결정되었다. 이번에도 나는 덜 후회할 '선택'을 했다.
회사 다니며 대학원을 병행하면 피곤해서 죽을 줄 알았는데 신생아 육아 안 하고, 모유수유 한다고 가슴이 터져 아플 것이 사라지니 우울함과 분노감이 눈 녹듯 사라졌다.
가끔은 한 낮이나 수업 중에 아이가 세상에 존재하는 어미라는 사실을 망각할 때도 있었다. 아이에게 모진 엄마가 되는 것 같아 미안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새 나의 행복은 아이에게 녹아들어 우린 그렇게 불행하지만은 않은 삶을 공유할 수 있었다.
적응의 시간이 두 달이 지날 무렵, 남편이 육아휴직에 들어갔다. 휴직 전 풀 맞벌이였을 땐, 이만하면 괜찮다는 마음으로 버틴 기분이라면 한 사람이 휴직을 하며 전업육아를 하니 천국이 따로 없었다.
일단 마음이 가볍다. 둘 다 밖에 있으면 '만에 하나'라는 상황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이 첫 번째 근심의 이유였고, 퇴근한 두 사람 모두 다 집안일은 세컨드 잡이었기 때문이었다.
잔꾀나 게으름을 1미리도 허용할 수 없는 영역이 꽤 스트레스였다. 내가 스스로 허용한 게으름만큼 상대는 강제 배려당하고 힘들어할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한 명이 휴직을 하고 전업주부가 되면 그러한 스트레스에서 자유롭다는 것이 부부에겐 가장 큰 이점이 된다. 그렇다고 내가 해야 할 몫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그건 태만이니까. 대신, 요청하는데 거리낌이 없어진다.
"요거는 내가 할게. 그동안 이것 좀 해줄래?"
풀 맞벌이일 땐, 왜 또 나한테 시키지,라는 부담감이 서로 있어서 이런 말 하나도 조심스러워 부담이 되기 때문이다.
휴직자가 생긴 육아 부부는 이런 부담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질 수 있어 행복해진다.
남편이 차려놓은 식사에 퇴근해 숟가락만 뜨고 분유만 주면 되니 문밖에서 눈치 보던 산후우울님은 연기처럼 날아가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