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엄마가 되다.
남편은 결혼하는 해에 대학원 박사과정을 시작했다. 남편에게 대학원은 본인의 인생을 바꿀 수 있는 마지막 찬스 같아 보였다. 일찍이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학업에 신경을 쓸 수 없었던 남편은 느지막이 시작한 공부에 끝을 보고자 했다. 연애를 시작하기 전에는 석사과정을 밟겠다며 나를 꼬시더니 이번에는 박사과정을 밟겠다며 우리 아빠를 꼬셔내 결혼을 승낙받았다. 자식들이 원하는 만큼 학업에 증진하지 못해 불만족이던 아빠는 남편의 박사플러팅에 홀딱 넘어가서는 딸을 보내는데 일말의 고민도 없어 보였다.
학업에 신경 쓰느라 남편은 직장인이기보다는 학생에 가까웠고 내가 벌어오는 월급과 남편이 간간히 가져오는 수입으로 우리는 신혼을 견뎌냈다. 두 명의 수입이 겨우 생활할 만한 금액이다 보니 자연스럽게 자녀계획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되었다.
삼 남매의 맏딸로 자라온 나는 어느 맏이나 그렇듯 무한한 책임감에 짓눌려 자랐고, 때문인지 내가 누군가를 평생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두렵고도 무서웠다. 아이가 태어나면 평생 그 아이를 보살피고 돌봐야 한다는 책임감은 돌덩이처럼 크게 느껴졌다. 나는 그 당시 생소한 '딩크족'이라는 단어를 찾아냈고 이거야 말로 내가 원하는 가정의 형태라고 느꼈다. 지금에서야 많은 이들이 비혼에 딩크를 이야기하지만 내가 결혼한 2012년도만 해도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지 않는다는 것은 굉장히 낯설고 특이한 축에 끼는 일이었다. 무한한 책임감보다는 낯선 곳에 합류하는 게 낫겠다 싶어 온종일 '딩크족'을 검색하며 딩크족 카페에 가입했고, 글들을 정독하며 딩크족의 장단점을 분석하기 시작했다.
틈만 나면 남편에게 딩크족으로 살면 좋은 점에 대해서 이야기했지만, 가정의 소중함을 꿈꾸는 남편에게서 동의를 얻어내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부부의 온전한 합의가 있어야만 성립될 수 있는 결정이 한쪽에서 삐그덕 거리니 힘을 잃어 가기 시작했다.
현실을 살아가다 보면 내가 계획했던 일들은 어느새 저만큼 멀어져 있고, '나는 그저 눈을 뜨고 밥을 먹고 잠을 자며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었구나' 하고 깨달을 때가 있다. 딩크족이니 아이니 하니 계획도 멀어진 채 그저 하루를 꼬박 살아가던 어느 날 아랫배가 콕콕하고 쑤셨다.
'설마?'
출근을 하며 불안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고, 발걸음은 약국을 향했다. 약국에 도착해서야 개미만 한 목소리로 '임신테스트기요'라고 말하고 화장실 문을 딸깍 하고 걸어 잠갔다. 나 혼자 확인할 용기가 나지 않았지만 확인을 하지 않는다고 있었던 일이 없었던 일이 되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나는 흐릿하게 그어진 두줄을 보게 되었고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나는 예상에 없던 엄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날 저녁, 나는 남편을 만나 눈물을 뚝뚝 떨어트리면서 이제 어떡하냐는 말만 되풀이했던 것 같다. 엄마가 될 거라는 사실이 기쁘지도 않았고 기대가 되지도 않았다. 그저 사막 한가운데서 길을 잃은 것 마냥 막막하기만 했다. 이 모든 게 꿈이기를 한참을 바랐다.
그리고 그날의 행동이 멋쩍고 무색하리만큼 현재 나는 귀여운 두 딸의 엄마로 살아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