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당신의 첫 서른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다.
이상하게 당신 생각이 났다.
김광석 가수의 ‘서른 즈음에’의 서른은 어땠을까.
매 하루는 멀어지기보다는 숨 막힐 정도로 가까워지고, 담배연기는 매워져 어느새 더 이상 연초를 피지 않은 채 타르 없는 수증기와 한숨만 내뿜으며 살아간다. 되려 최영미 시인의 잔치가 끝난 서른이 나와 비슷하지 않을까.
‘(중략)잔치는 끝났다
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 둘 지갑을 챙기고 마침내 그도 갔지만
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
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
여기 홀로 누군가가 마지막까지 남아
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
그 모든 걸 기억해내며 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것을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
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
(중략)
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코로나를 핑계로 건배 소리는 멀어진 지 오래되었고, 동지여!를 부르던 붉은 띠를 동여맨 청년은 어느새 공천만 바라보며 넥타이를 조여맸다. 한숨을 쓰고 간 형은 서른을 보지 않은 채로 젊은 날만 보내고 있다. 술을 마셔도 괜찮았던 2017년 겨울 그날에는 평소보다 더 많은 술을 마셨던 기억이 있다. 안주는 여전히 한숨이었고, 유독 술잔이 빛나던 날이었다.
아직도 행정법이니 형법이니 이해가 되지 않는 이론보다는 인과관계만 파악해도 쓸 수 있는 이혼서면이 더 편한 주말이다. 나이 지긋한 의뢰인은 서른부터 사랑해서 아들의 서른을 보고나서야 현실에서 돌아서려 한다고 이야기했다. 청춘도 바치고 돈도 바쳤으니 이제는 혼자 지내고 싶다고. 공감 없는 이해로 그 입장에서 다른 사람을 설득하는 글을 쓰려한다. 생각해보니 거짓부렁일까 겁나고, 정리되지 않는 글이 삐죽 나도 몰래 튀어나올까 겁난다.
‘매일 이별하며 살고 있구나’
이별이 더 달콤해지는 두 번의 서른을 맞은 사람은 자신이 떠나보낸 것도 아니고, 떠나온 것도 아니라 한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잊혀져는 간다고 한다.
가끔은 당신의 첫 서른은 어땠는지 물어보고 싶다.
가슴 속이 텅 비어 아무것도 찾을 수 없는지, 새벽이 오기 전 환하게 불을 밝혀 무대를 다시 꾸밀지, 미쳐버린 시인의 말로처럼 서른을 보지 못한 채 아직 스물의 당신으로 머물러 있는지. 서른 하나의 첫 주말 속에서 이상하게 당신 생각이 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