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7년차 콘텐츠 기획자편-
“글이 재미있고 잘 읽히기는 하는데…… 결론이 왜 이렇게 나는지 잘 납득이 안 돼.”
첫 기획안을 제출하고 받은 평가였다.
기억은 사라져도 감정은 남는다더니, 회사에 처음으로 제출한 기획안이 어떤 내용이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당시의 감정은 생생하다. 적잖은 충격이었다. 팀장님은 충격에 빠진 나를 불러다 앉혀 놓고 이렇게 조언해 주었다. 아이디어가 번뜩이는 게 내 장점이지만, 아이디어를 도출하는 과정이 직관적인 것 같다고.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은 과정을 거쳐서 생각할 수 있을지 되짚어 보라고 말이다. 그 뒤로 꾸준히 업무를 하며 ‘논리적인 설득력’을 위한 업무 방식을 만들었다. 이 글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위한 나의 고군분투기다.
“왜 어떤 날은 앞머리가 있고 어떤 날은 앞머리가 없어요?”
어느 날, 주간 회의에서 팀원이 물었다. 하이브리드처럼 앞머리가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내가 신기했던 모양이다.
“아침에 샤워할 때 머리까지 감으면 있고, 샤워만 한 날에는 넘겨요.”
그렇다. 나는 매일 아침 일어나서 샤워를 한다. 머리는 감을 때도 있고, 감지 않을 때도 있다.
무슨 당연한 소리냐고? ‘배고프니까 밥 먹었다’랑 똑같은 말 아니냐고?
에이, 왜 이러십니까. 직장인이라면 누구나 눈곱만 떼고, 대강 이만 닦고 출근하고 싶은 마음을 이해하잖아요. 침대 위에 5분이라도 더 눕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일찍 일어나 샤워를 하는 데에는 큰 이유가 있다. 샤워를 하면서 하루 동안의 업무 계획을 세우고, 콘텐츠 아이디어와 구성을 떠올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출근은 9시에 했지만, 실상 내 업무는 8시 30분부터 시작한 셈이다.
(물론 책상 앞에 앉아서 노트북을 켠 순간부터 업무 시간으로 체크하니까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오전 8시 30분.
샤워를 할 때는 스마트폰을 꼭 가지고 들어가야 한다. 차가운 물을 맞아 대뇌가 깜짝 놀라 열일을 하는지, 온 설비를 모조리 돌리는 공장처럼 아이디어가 쑥쑥 튀어나온다. 샤워를 하는 순간에는 내가 바로 셰익스피어고, 광고 천재 이제석인 것처럼 느껴진다. 떠올린 아이디어를 까먹을까 두려울 정도다. ‘빅스비’를 부르고, 음성 노트를 남겨 둔다. 미쳤다. 오늘 업무 벌써 다 끝냈음.
오전 9시.
출근해서 루틴하게 해야 하는 업무를 처리한다. 캘린더를 운영할 때는 새로 등록된 사업 리스트를 확인했고, 사이트 올라갈 글을 쓸 때는 간밤에 있었던 뉴스를 최신순으로 훑어봤다.
요즘은 어제 발송한 알림톡에 수신자들이 얼마나 반응했는지 데이터를 체크하는 업무를 주로 한다.
가끔 졸린 머리가 확 깨어날 정도로 CTR(Click-Through Rate: 클릭률)이 높게 나올 때가 있는데, 그럼 샤워에서 느꼈던 뿌듯한 감정이 계속 유지된다.
역시 나는 천재인가 봐.
오전 10시 30분.
데이터 확인을 마치고 좀 더 집중해야 하는 업무를 시작한다.
자, 이제 꿈에서 깰 시간이다. 보통 이때에 아침에 샤워하며 남겼던 음성 노트를 확인한다. 천재적인 나는 사라지고, 보통의 내가 노트북 앞에 앉아 인상을 쓰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본다. 이 아이디어를 내보겠다고? 진심이야? 분명히 2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렇게 부풀었던 아이디어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쪼글쪼글해 보인다.
오후 12시 30분.
기획안을 쓰기 시작한다. 똑같은 일을 하는 주변 지인들을 보면, 기획안을 쓰지 않는 사람도 많지만 나는 꼭 기획안을 쓴다. 나도 사람인지라 쓰기 싫을 때가 있지만, 너무나 귀찮을 때는 이렇게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콘텐츠를 만드는 일은 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를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이해를 돕기 위한 <크레이지 아케이드> 플레이 화면, 출처=넷마블)
게임 <크레이지 아케이드>는 유저들이 맵 안에 물폭탄을 설치하고, 상대 유저가 물폭탄에 맞게 하는 게임이다. 게임에서 이기려면 상대방의 행동을 유추해서 물폭탄을 잘 설치해야 한다. 이게 어떤 면에서 콘텐츠를 만드는 일과 비슷하냐고? 콘텐츠를 접한 사람은 그동안의 경험과 갖고 있는 지식이 모두 달라 제작자가 의도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독자를 사로잡으려면 게임 맵 안에 물폭탄을 설치하는 것처럼, 독자나 시청자의 생각의 흐름을 유추해 적절한 정보를 줘야 한다. 그러니까 기획안을 쓰는 일은 맵을 어떻게 플레이할지 플레이 계획을 짜는 일과 비슷한 것이다.
오후 1시.
워드를 켠다. 기획안을 구체적으로 작성하기 전에 질문 리스트를 만들어야 한다. 이때부터는 내가 독자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독자의 입장에서 어떤 점이 궁금할지를 생각해 본다. 예를 들자면 이렇다.
■ 콘텐츠의 기획 의도: 로잉 머신을 판매한다.
■ 콘텐츠를 보는 사람들이 궁금해할 만한 점 (나라면 이런 게 궁금할 거야)
1. 로잉 머신이 뭔데?
2. 로잉 머신을 사면 나한테 어떤 점이 도움이 되는데?
3. 왜 너희한테서 로잉 머신을 사야 하는데?
- 타사 제품과 비교했을 때 이 로잉 머신의 스펙이 좋은가?
- 이 가격이 제일 저렴한가?
- 지금 사면 구매 혜택이 있나?
4. 로잉 머신이 요즘 인기가 있나?
- 인스타그램에 자랑할 수 있나?
- 인플루언서들이 사용하나?
- 미디어에 자주 노출되나?
5. 로잉 머신과 연계되어 활용할 수 있는 제품이 있을까?
오후 2시 30분.
떠올린 질문들을 논리적으로 분류한다. 여기서 논리적이라 함은, 내가 ‘이 순서대로 읽어야 논리적이다’라고 제안하는 순서다. 보통은 꼭지를 서론, 본론 1/2/3, 결론으로 정리한다. 글이 길어지면 독자가 끝까지 읽지 않고 이탈하기 때문이다.
(혹시 이 글도 중간에 읽다 마시는 건 아니죠……?)
오후 3시 30분.
앙상한 가지에 살을 붙일 시간이다. 질문마다 어떻게 대답할지 예상 답변을 작성한다.
써야 하는 내용을 앞서 본론 1/2/3으로 분류해 두었지만, 예상 답변을 작성하다 보면 내용이 비슷해 하나로 합쳐야 하는 질문을 발견할 수 있다. 어느 정도의 분량이 나오지 않는 질문은 다른 질문과 묶어 꼭지를 구성하기도 하고, 콘텐츠의 결에 맞지 않거나 너무 앞서 간 질문은 삭제한다. 콘텐츠의 내용과 분량은 사실상 여기에서 결정된다.
예상 답변을 정리할 때는 정보의 정확성을 검증하는 데에 심력을 기울인다.
요즘은 회사 정책을 소개하는 콘텐츠를 주로 제작하기 때문에 유관 부서에서 자료를 전달받는 일이 많은데, 전달받은 내용 외에도 유관 부서에서 작성한 내용들도 살펴보곤 한다. 회사 메신저에 키워드를 검색해 업데이트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도 확인한다. 관련 뉴스 기사들을 참고하기도 한다.
오후 5시 30분.
기획안이 어느 정도 꼴을 갖췄다. 슬랙에 작성한 기획안과 함께 메시지를 남긴다.
- 팀장님, 기획안 정리해서 공유드립니다. 내일 시간 되실 때 확인 부탁드려요!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궁금증이 생겼을 것 같다. 나도 글을 쓰면서 느꼈다. 사실 일반론적인 얘기 아냐? 이 루틴이 정말 업무에 도움이 되었다고? 이 궁금증에는 이렇게 대답할 수 있을 것 같다.
띠링!
- 정말 기획안 잘 쓰시네요! 보니까 이해가 쏙쏙 돼요!
오후 6시.
상쾌한 기분으로 퇴근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