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장인 17년차 서비스 기획자편-
#문서작업은 코스트코처럼
허니콤보를 먹을까 고추바사삭을 먹을까? 이 정도의 고민과 의사결정은 즐겁다.
하지만 우리는 즐겁지 않은 의사결정을 끝없이 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퇴직연금의 종류를 고르라는데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고, 기획자인 나에게 어떤 식으로 개발을 해야 할지 기획 쪽에서 의사결정을 해달라는 사람들 앞에서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면서 무슨 말인지 알아듣는 척하면서 회의를 해야 한다.
서비스 기획일을 하고 있는데, 일을 할 때 참 고민이 많다..
우리 프로덕트를 어느 방향으로 이끌어 갈지, 고객에게 어떤 가치를 전달해야 할지 이런 멋있는 고민도 있긴 있는데 이런 고민 말고, 평소에 항상 나의 시간을 잡아먹는 건 정말 모래알 같이 작디작은 고민거리들이다.
문서를 어떻게 쓸지에 대한 고민이 늘 크다. 부끄럽지만 위에서 말한 것처럼 “멋있는 고민"이 아니다.
새 위키페이지를 생성하고 나는 가끔 멍하게 빈 페이지를 바라보게 된다.
오랫동안 쳐다보면 하얀색 문서에서 뭔가 생성이 되지 않을까?
안 생겨요.
우선 타이틀은 뭐라고 할까? 무슨 무슨 “프로젝트"라고 할까? “정책서"라고 해야 할까? “기획서"라고 쓸까? 요즘엔 기획서라고 하면 모양 빠지는 것 같은데… 앗 영어를 포함하면 윗 분들이 싫어하는 것 같은데? 띄어쓰기는 어떻게 하지?
“할인 상세 정책”이라고 썼다가, 음 “옵션 할인 정책서”라고 썼다가… 지우 고를 반복하게 된다.
메뉴/옵션 할인 상세 정책 (음…)
메뉴/옵션 할인 기획 (기획서? 가 낫나?)
메뉴와 옵션 할인 (기획서 타이틀 같지가 않다. 책 제목 같다)
메뉴와 옵션 할인 도입 (도입? 이란 단어가 어색하다)
할인 중 메뉴 개발 (이상해 이상해)
메뉴/옵션 할인 기능 개발 (개발만이 주인공처럼 보이잖아?)
메뉴 할인 신규 개발 (아 첫 번째가 제일 나은 것 같다…)
타이틀에서 충분히 시간을 낭비하고 나면 이제 그다음 본문으로 넘어가게 된다.
자 이제 문서의 시작은 “배경"으로 할까? “background”로 할까? “과제의 한 줄 요약?”으로 할까?
아무래도 문서를 딱 처음 열어서 읽어보는 사람은 그래서 이 문서가 뭔지를 알려주면 좋아하지 않을까?
아닌가 그건 타이틀을 보면 알 수 있는 건가. “배경과 목적"으로 적을까? 아니면 배경과 목적을 따로따로 각자의 타이틀로 있는 것 이 좋을까? 근데 또 따로 쓰다 보면 결론적으로 똑같은 내용이 반복되는 것 같기도 하다.
앗 “용어정리"는 이 밑에 들어가도 될까? 사실 용어를 모르는 사람이 읽는다면 “용어정리"가 그 무엇보다 도 제일 먼저 나와야 하는 것 아닐까? 이렇게 자잘 자잘한 정신병적 의사결정 파티를 하다 보면 시간이 정말 잘 가는데 막상 문서에 적은 내용은 얼마 없다. 타이틀에서부터 배경과 목적, 그리고 그 뒤로 용어정의, 핵심 요구사항, 관련경로, 상세 정의 (본문), 담당자와 일정, 기타, 인덱스 등등까지 내려가는데 한세월이 걸린다. 막상 이 고민이 끝나면 내용을 채워 넣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진도가 잘 나가는 것 같다. 사실 문서에서 이 정도 고민을 하는 건 사회 초년생 때를 생각해 보면 양반이긴 하다.
“라테는"이야기를 조금 해보자면, 호랑이 담배 피우고 스마트폰 없던 시절, 즉 내가 신입사원이던 시절에는 기획자는 기획서를 파워포인트로 쓰던 시절이 있었다. 새로운 문서를 쓸 때 파워포인트는 위키보다 더 사악하다. 위키는 어느 정도 문서의 틀이 고정이 되어있지만 (예를 들어 본문의 폰트 사이즈는 한 가지로 정해져 있어서 이거에 대한 고민은 아예 없다), 파워포인트는 좋게 말하면 자유도가 아주 높고,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미칠 일이다. 하안색 파워포인트에 배경 색깔부터 장표의 템플릿 디자인을 어떻게 해놓을지 어디다 선을 그을지 폰트는 뭘로 할지 등등 위키보다 백배 천배의 마이크로 의사결정을 요구한다. 그리고 발표를 위한 장표 위주의 툴이다 보니까 결국에 눈에 보기 좋게 장표를 예쁘게 단장하고, 이미지 작업을 하고, 간격을 맞추고 하는데 노력을 안 할 수가 없고 소위말해 “막일"을 한 장표와 하지 않은 장표는 확연하게 차이가 났다.
그렇기에 상대적으로 위키는 훨씬 쉬운 도구이다. 고민할게 덜한데, 고민을 여전히 할 수밖에 없다.
그래도 줄간격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보단 문서 내용에 대해 (비록 포맷적인 부분에 대해 고민을 많이 하지만) 고민을 하는 것은 발전이 아닌가 싶다. 어떤 형태로 문서를 써나갈지에 대한 고민이 줄어들수록 문서 안에 들어가는 순수 내용에 대해 시간을 투자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지는 것 같다.
파워포인트에서 위키로 넘어가면서 느낀 발전을 한번 더 느끼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또 잠시 따로 고민을 해보았는데, 오랜 시간이 지나 드디어 답을 나름대로 찾았다. 나의 문서들을 “코스트코"처럼 해야겠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코스트코는 다양한 종류의 상품을 가져다 놓지 않고 MD가 잘 select 한 한 개 혹은 한두 개의 상품만 가져다 놓기 때문에 고객들이 오히려 고민이 없어서 더 쉽게 많이 산다고 한다.
특히나 코스트코는 어느 정도 퀄리티 있는 상품을 잘 골라놓았다는 믿음이 깔려있어서 한 명의 고객인 나는 믿고 사는 편이다. 나도 문서 쓸 때 그렇게 해야겠다!라는 생각을 하였다. 문서 쓸 때 매번 고민하지 말고, 최적화된 포맷들을 만들어 놓자!!! 그리고 다시는(?) 고민하지 말자. 그래서 나는 나의 미래 기획서들의 프레임이 될 수 있는 기획서의 포맷들을 만들기 시작헀다. 하나 잘 만들어놓고 앞으로는 문서 시작할 때 배경이란 단어를 쓸지 인트로라는 단어를 쓸지 고민하지 않겠다는 다짐과 함께!
다만 문제는 이 포맷을 만들면서 또… 고민이 많아졌다.
앞으로의 수많은 케이스들을 다 담을 수 있어야 하는데 정말 고심 고심해서 단어를 선택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렇게 또 느릿느릿.. 하지만 포맷을 만들어가고 있다. 언젠가는 내가 만들어놓은 믿음직한 포맷을 가져다가 복붙하고 (지금보다) 빠르게 기획서를 쓸 수 있는 날이 오길 바란다.
그리고 가끔은 코스트코에서 파는 벌크 사이즈의 토마토소스 1개를 사는 것보다는, 마트에 가서 예쁘게 깔린 여러 종류의 토마토소스를 구경하면서 골라보는 재미도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나 자신이 너무 효율화되었다고 생각하면 다시 돌아가서 고민을 해볼 수 있을 경지까지 이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업무 환경 개선은 쇼핑으로
돈으로 해결할 수 있는 것은 쉬운 일이다(서울에서 집 사는 거 빼고).
그리고 동시에 돈을 쓰는 일은 즐거운 일이다. 그래서 나는 항상 돈을 쓰고 있는데 최적화된 업무 환경을 위한 돈도 아끼지 않고 쓰는 편이다. 일은 좋든 싫든 항상-매일 거의 하루종일 해야 한다. 그런데 조금이라도 이 일을 하는 과정이 편하거나 즐거울 수 있다면 그건 투자할만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회사는 재택 러버들이 많다. 그래서인지 출근해서 일하는 분들의 모습을 보면 매우 불편해 보이는 분들이 많다. 보통 본인들이 일을 오랫동안 하는 집의 재택 공간에는 키보드도 놓고, 거치대도 놓고 그 외에도 이것저것 많은 것들을 구비해 놓고 쓰시던데, 회사 오면 덜렁 노트북하나 테이블에 올려놓고 쪼그려서 일하시는 분들이 많다. 사무실 출근을 자주 하지 않아서 대충 오시는 분들도 있고, 사무실이 너무 싫어서 사무실에 그 어떤 투자도 하고 싶지 않은 분들도 있는 것 같다. 사무실에서는 최소한의 시간만 보내고 빨리 이 공간을 떠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진정한 일은 집에서만 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도 있다.
나는 이 회사에서는 좀 특이한 사람 중 하나로, 사무실 출근을 선호한다.
이건 옳고 그름이 아니라 그냥 취향의 이슈인데 나는 재택 러버들을 보면서 왜 저렇게까지 사무실을 싫어하지?라는 생각을 하고 그들은 나를 보면서 졔는 왜 저럴까?라는 생각을 하는 것 같다.
잠시 요지를 벗어났는데 돌아가보자면 아무리 재택을 사랑하는 사람도 가끔은 사무실에 나와야 하고, 아무리 사무실이 좋은 나도 가끔은 재택을 할 일이 생긴다. 그래서 나는 회사와 집 업무공간을 동일하게 세팅을 해보았다 똑같은 거치대와 똑같은 키보드, 그리고 똑같은 마우스와 충전기를 기본적으로 맞춰 놓았다.
왔다 갔다 하면서 매번 자리에 앉을 때마다 부산스럽게 세팅을 하는 시간과 번거로움을 줄이고 싶었다.
앉자마자 바로 할 일을 할 수 있는 효율을 만들어 내고 싶었다. 옛날처럼 고정된 한 곳에서만 일할 수가 없기 때문에, 왔다 갔다 두 곳의 공간에 일하게 되면서 생기는 번거로움을 최소한으로 줄이고 싶었고 이건 실제로 효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사무실에 도착해서 앉을 때, 그리고 아침에 일어나서 일해야 할 때, 혹은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집으로 이동해서 추가적으로 일해야 할 때, 나는 이미 거치대와 키보드와 마우스가 다 세팅이 되어 있어서 노트북만 올려서 연결하면 된다. 간단하다. 그리고 사무실도 집도 동일하게 편안하다.
일하는 공간의 효율을 높이려면 일에 최적화되어있는 공간인 사무실을 벤치마킹하는 것이 좋은 것 같다. 예를 들어 집에는 나의 취향에 따라 주로 노란 조명으로만 설치를 해놨는데 이케아에서 산 노란 조명들은 여러 개를 켜놔도 해가 지고 나면 업무를 하기에는 좀 침침한 부분이 있다. 그래서 얼마 전에 회사의 1인 회의실 공간에 모니터를 밝혀주기 위한 보고 조명을 보고 감탄을 하며 모델명을 받아 적었다. 업무 하기 좋은 밝기를 넓게 제공해 주는 조명은 크고 길어서 위에서부터 모니터와 맥북을 충분히 잘 비추어 주었고, 빛의 온도도 조정이 가능했으며, 테이블 위에 안정적으로 고정되는 하반신? 이 묵직한 디자인이었다.
사야겠다 사야겠어.
한번만 더 “라테는" 이야기를 하자면 예전에 매일 출근하고 고정 좌석이 있던 시절에는 데스크 꾸미기가 꽤나 재미있는 일이었다. 맥시멀의 끝을 찍던 시절에는 내 자리에 나만을 위한 미니 음료수 냉장고까지 비치를 해 두었었고, 자리에 화분에서부터 액자는 물론 구피라는 물고기를 회사분에게 분양받아서 키우기까지 했었다. 아쉽게도 지금은 “스마트" 오피스의 좌석 시스템 때문에 매우 미니멀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아쉬운 대로 집에 있는 재택 데스크라도 예쁘게 꾸미고 있다. 앉았을 때 기분이 좋은 자리만큼 일하기 효율이 좋아지는 공간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줌 회의를 하면 뒤에 허세 가득한 나의 예쁜 책장과 책들이 보이고, 일을 하다 고개들 들면 내가 좋아하는 아트들이 벽에 걸려있으며, 바닥에는 발 시리지 말라고 프랑스에서 사 온 발매트가 깔려있고, 가끔 데스크 위에는 딥티크 향초 불에 까루셀이 빙글빙글 돌고 있다.
입지면의 앱로그 정의 같은 것을 하는 세상 지루하고 딱딱한 일을 할 때, 딥티크 베이의 향긋함이 조금이라도 나의 분노를 치유해 주기 때문에 돈 값 한다고 생각한다.
매일매일 일해야 하는 나의 공간에 조금이라도 마법을 더해주는 쇼핑은 아끼고 싶지 않다.
쇼핑은 일에 도움이 된다라고 우겨본다.
#업무 마인드는 등산할 때처럼,
“올라가야 되는데 왜 길이 내려가는 거죠?!!”라고 북한산에서 내가 진심 버럭하고 화를 낸 적이 있다.
옆에 아주머니가 웃으셨다. 어쩌다가 회사에 비공식 기획자-개발자 등산모임에서 활동을 하게 된 나는 사실 등산을 혐오하던 사람이었는데, 그냥 사람이 좋고, 등산하고 나서 먹는 삼겹살이 좋아서 등산을 다니다 보니 점점 산에 정을 붙이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이제는 정산에 올라가기 전에 갑자기 내리막길이 나와도 예전처럼 화를 내지는 않는다.
왜냐면… 거의 모든 산에 그런 구간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도 그렇구먼.,.. 이렇게 생각을 하게 된다.
회사일은 등산과 비슷한 것 같다.
그래서 나는 등산을 하는 나를 떠올리며 회사 생활을 하면서 마음을 가다듬어 보려 한다. 정상에 올라가기 전 내리막길이 있어서 내려가면서 아까운 고도를 다시 깎았다가 힘들게 헉헉대면서 다시 올라가야 하는데,
우리의 업무도 늘 재검토가 필요하고, 배포를 했다가도 롤백을 해야 한다. 늘 있는 일이니 너무 화를 내지 말자.
산에 올라갈 때 늘 힘들고 숨이 찬다. 특히나 아직 갈길이 많은 초반 산길에는 왜 내가 이런 선택을 또 해서 산행을 하고 있는지 후회가 밀려오면서 스트레스가 치솟는다. 마치 새로운 업무가 교통정리가 안될 때처럼.
하지만 등산도 업무도 하다 보면 나만의 페이스가 생기고 결국 죽겠다 죽겠다 하지만 어찌 저지 정상이 보이기 시작한다. 다만 정상이 보일 때 “설마 저기가 정상이야? 저기까지 올라가야 된다고? 말도 안 돼"라고 말을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밑에서 올려다보는 산의 정상은 항상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일도 그러하다 과연 이 프로젝트가 오픈이 되긴 되는 걸까? 싶다.
중간중간 “여기서부터는 능선이에요"라던가 “이 산엔 능선이 많아요"라던가 “곧 능선이에요"라는 식의 말을 듣는다. 개인적으로 산에서 가장 잘 들리는 거짓말 중 하나가 “능선"인 것 같다.
능선이 있어봤자 어차피 우리는 위로 올라가야 한다. 그런데 자꾸 능선이라는 달콤한 말로 사람들을 위로하려 한다. 난 아직까지는 능선이 있어서 편히 걸어 다녔던 산이 기억이 나질 않는다. 아마도 “간단한 업무" 같은 게 능선 같은 것 아닐까.
세상에 간단한 게 어딨 음? 맨날 간단하다고 해놓고 검토하다 보면 고구마 줄기에 주렁주렁 뭐가 달려서 올라온다. 하지만 능선이던 아니던 계속 가다 보면 정상은 언젠가는 오르게 된다. 산의 정상도, 프로젝트의 오픈도 “잠시" 기분이 좋다. 정상에서 경치도 구경하고 사람들과 김밥도 나눠먹고, 가끔 운이 좋으면 운해 같은 장관을 볼 수 도 있다. 다만 세상에 진정한 끝도 정상도 없다. 다시 내려가야 하고 내려가는 것도 일이다. 프로젝트가 끝나면 성과분석을 해야 하고, 후속 프로젝트를 해야 한다. 하지만 그래도 산을 갓 올라가기 시작했을 때의 그 고통을 생각하면 내려가는 길은 상대적으로 발걸음이 가볍다.
하산해서 먹는 삼겹살과 술 한잔처럼 또 맛있는 것이 있을까.
이 맛에 등산을 하지!!! 라며 즐거워한다. 그렇게 다음 산행이 예약이 되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다.
업무도 그렇다. 하지만 등산도 업무도 업 앤 다운이 있고 즐거울 때도 있고 힘들 때도 있고, 정상에서 기분 좋고 하산해서 기분이 좋았다가 다시 시작이 되면 또 힘들고 그렇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등산도 일도 할만한 것 같다라고 나는 나 자신에게 타이른다.
지금 너무 힘들면 '아, 나는 등산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제일 힘든 시점이거나 깔딱 고개 어디쯤인가 보다'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