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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82 소울메이트 부부의 생각들
by 지미준 Aug 06. 2018

생존운전: 나는 남편의 대리기사

기로에서 


"여보, 일어나. 지금 잠들면 안 돼."  

 

옆에 앉은 남편의 정신이 가물가물했다. 나의 바람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자꾸만 고개를 떨구었다. 낯선 곳. 의지할 것이라곤 이제 나 자신과 전화기 뿐. 집으로 가는 갈림길에서, 나는 선택을 해야 했다.  


"경로를 이탈하여 재탐색합니다." 

 

아. 집으로 가야 하는데. 잘못 선택했다. 시간은 벌써 새벽 2시인데. 고속도로에서 갈림길을 잘못 골랐다. 왔던 방향으로 10킬로미터가 넘는 거리를 되돌아간다. 만취한 남편은 아무리 깨워도  소용이 없다. 나 면허 딴 지 1년도 안 됐어 여보. 잠들면 안 돼. 날 도와줘야지. 


집에 가야 한다고.


나의 운전선생님 


1종 보통 수동 면허를 따고 싶었다. 시어머님이 시골에서 트럭을 능숙하게 운전하시는 모습이 그렇게 멋있을 수가 없었다. 어머님은 우리의 이삿짐도 실어주셨고, 시골에서 수확한 배추도 실어다 도시에 내다 파셨고, 옮겨야 할 짐이 있으면 트럭으로 거뜬하게 옮겨내신다. 


트럭 운전을 할 수 있다면 여러모로 쓸모가 많을 듯하여 어머님을 졸라 시골에서 운전을 배웠다. 수동이라 시동을 몇 번이나 꺼뜨렸다. 그래도 어머님은 화 한 번 안 내시고 잘 가르쳐주셨다. 시동생의 운전선생님도 어머님이셨다.  

학원에 다니지 않고 운전면허를 따려니 트럭을 직접 연습해볼 기회가 많지 않았다. 어머님이 시골에 계시기 때문에 연습하려면 주말마다 내려가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한 번은 시골에 내려온 김에 시험까지 보자는 어머님 말씀에 문경 시험장으로 가서 일단 접수부터 했다. 연습도 몇 번 못 해봤고 코스도 전혀 모르는데 말이다.  


 

1종 스틱의 로망.


나는 그날의 마지막 지원자였다. 평균속도는 25킬로. 기어 변속중에 시동 꺼짐. 차선 변경 시 후방 미확인(사고 날 뻔). 타력 주행. 주차 실패 등등등. 그래도 시험장을 출발해서 끝까지 꾸역꾸역 차를 끌고 오기는 했다. 감독관이 웃으며 점수를 말해준다.  


"22점이네요." 


엉망인 건 알았지만 22점밖에 안 될 줄이야. 내가 마지막 순서가 아니었더라면 난 이미 코스 중간에 탈락해서 차에서 내려야 하는 운명이었다. 감독관도 내 운전실력이 어이가 없었던지, 공부 좀 하라고 끝까지 운전을 시켜주었던 것이다. 


충격의 22점 성적표를 받아 든 후, 남편이 말했다. 


"우리 차가 승용 오토인데 1종 따려 너무 애쓰지 말고 우선은 2종을 따는 게 어때? 지금 바로 트럭을 끌고 다닐 것도 아니고, 당장 시내에 잠깐씩 다닐 수 있는 정도만 가능하면 되잖아." 


남편의 말에 일리가 있었다. 그래. 수동은 너무 어렵다. 그때부터 곧바로 우리 차로 도로주행 연습을 시작했다. 운전선생님이 어머님에서 남편으로 바뀌었다. 


시골에서만 연습하다가 도시에서 차를 몰아보니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남편은 초긴장 상태. 하필 첫날 비가 내렸다. 게다가 해 질 녘. 이런. 차선이 안 보인다. 남편의 목소리가 점점 고조된다. "지금이야, 끼어들어!" 


아. 못 끼어들었다. 그래도 다행이다. 남편이 화내지 않았다. 하남 시내를 두 바퀴쯤 돌았나.  남편은 잘했다고 칭찬을 해주었다. 내가 진짜 잘한 건가? 급피로해졌다. 운전이란 이렇게 피곤한 거구나. 매일 왕복 2~3시간을 운전하던 남편이 그렇게 피곤해했던 이유가 이거였구나. 


 

30분이나 운전했더니 피곤하구나.


대리기사가 되었다 


강남 운전면허시험장에 접수를 하고, 시험 하루 전에 4가지 코스를 모두 돌아보았다. 인터넷에 코스 정보가 많은 게 얼마나 고마운지 모른다. 인터넷 동영상으로 코스를 봐 두고 시험 전에 남편과 함께 미리 돌았더니 단번에 합격했다. 83점. 삼십 대 중반이 되어서야 운전면허 소지자가 되었다. 


남편은 흑심을 품었다. 그는 나를 자신의 대리기사로 만들겠다는 욕망으로 그토록 성심성의껏 운전을 가르쳤던 것이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술자리가 있으면 운전은 틀림없이 내 몫이다. 내가 술을 잘 못 마시니 안주나 실컷 먹고 대리운전해야지 뭐. 


나는 진화하고 있다. 처음에는 옆자리에 남편이 있어야만 운전이 가능했다. 후진주차는커녕 전면주차도 지시 없이는 불가능했다. 어느 날, 바깥에 나가 있던 남편이 집에 둔 차를 끌고 어디로 좀 와달라고 했다. 나는 덜덜 떨었다. 나 혼자서? 어떻게? 그런데 어라? 혼자서도 해보니 된다. 운전 자신감이 두 배로 상승했다.  


처음에 잘 못 보던 내비게이션도 이제는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야생에 홀로 내던져지니 생존본능이 깨어난 듯하다. 여전히 주차는 어렵고 삐뚤빼뚤하지만, 남편의 대리기사로서 이 정도면 손색이 없지 싶다. 얼마 전엔 차로 20분 거리의 병원까지도 혼자 잘 다녀왔다. 우리 운전선생님들께 늘 감사해야겠다. 


운전 자신감이 두 배 상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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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도 하고, 취미로 음악도 만들고, 소설가도 되고 싶은 욕심쟁이 82년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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