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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미준 Oct 18. 2018

영화 <더 헌트>와 김포 보육교사 자살 사건

누군가의 거짓말로 시작된 사냥


영화 <더 헌트>(2012)에서 주인공 루카스는 한 소녀가 질투심에 내뱉은 거짓말 때문에 아동 성추행범으로 몰린다. 마을 사람들은 '순수한' 아이의 말만 믿고 루카스가 호소하는 진실에 귀 기울이지 않는다. 그렇게 루카스는 아무 죄도 없이 집단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더 헌트>는 관객에게 진실을 보여주고 관객을 주인공에 감정이입하게 만든다. 관객은 주인공의 자리에 나를 대입해 그가 겪는 부당함에 분노한다. 한편, 주인공에게서 한 발 물러나 마을 사람으로 빙의했을 때는 분노가 아닌 찝찝함을 느낀다. '내가 저들의 입장이었다면 나는 과연 올바르게 판단할 수 있을까? 올바른 판단의 근거는 무엇일까? 나도 저 상황에서는 결국 저들처럼 행동하지 않을까?' 그래서 이 영화는 꽤나 불편하다.


영화 <더 헌트>



나도 어딘가에서는 집단의 일원


평소에 나는 '긴지 아닌지 모르겠으면 닥치고 있자'라는 신념이랄까, 뭐 그런 게 있어서 양쪽의 입장을 다 듣기 전에는 웬만해선 판단을 잘 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험담을 하거나 듣는 것도 싫어하고, 편향적 색깔을 갖는 것도 싫어하며, 첫인상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도 경계하려 한다.


얼마 전 김포에서 한 보육교사가 자살한 사건이 있었다. 기사내용에 따르면 오해에서 출발한 사건이 눈덩이처럼 커지면서 집단이 개인을 괴롭힌 끝에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것이라고 한다. 오해가 있다면 풀면 되고, 잘못이 있다면 처벌을 받으면 된다. 상식적으로는 그렇다. 그런데 집단에게 상식과 진실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듯하다. 힘없는 개개인이 모여 이루어진 집단은 어느새 힘을 갖게 되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힘없는 개인을 공격하기도 한다. 때로는 상식을 벗어난 행동을 하기도 하고, 진실을 무시하기도 한다. 그저 집단으로서의 힘을 시험해볼 제물이 필요했던 걸까 하는 생각이 든다.


김포 맘카페 사건을 접했을 때, <더 헌트>와 같은 찝찝함을 떨칠 수가 없었다. 나 자신이 힘없는 개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어딘가에서는 집단의 일원이기 때문이다. 내가 만약 그 카페의 일원이었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 나도 내 입장만이 옳다 여기고 진실이 뭐든 간에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며 무고한 사람을 희생시키려고 했을까? 갑자기 무서운 생각이 든다. 내가 좋아했던 연예인이 어느날 뉴스에서 범죄 용의자가 되어 나타났을 때, 나는 크게 실망해 그의 범죄를 기정사실화해버렸다. 나중에 무혐의가 밝혀지고 고발자가 무고죄로 처벌을 받게 되었을 때도, 나의 머릿속에 그 연예인은 변함없이 범죄자였다. 누군가는 진실의 힘을 믿는다지만 내가 보는 진실은 그리 힘이 세지 못한 것 같다. 상식과 논리도 감정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고 하지 않는가.




문명과 원시 사이


히틀러의 선동으로 집단 최면에 빠진 대다수 독일 국민은 소수의 경고 섞인 목소리를 무시했고, 이는 유대인 600만 명 학살(실제 희생자 수가 그보다 적을 거라는 논란은 있다)이라는 희대의 살인극을 낳았다. 최면에 빠진 집단은 자신들의 믿음만이 진리라고 여겼을 것이다. 혹은 각성을 했더라도 집단의 힘에 굴복해 침묵했을 것이다. 어쩌면 인간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진화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집단의 힘을 스포츠 경기나 불우이웃돕기 같은 일에만 쓸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문명을 이룩했지만 여전히 원시적인 집단의 행동. 이것을 진화라고 해야 할까, 퇴화라고 해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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