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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해솔 May 10. 2024

성장통과 외로움 사이

성장한 걸까 무뎌진 걸까

어릴 때부터 홀로 있는 시간을 유어하던 나는 친구들을 수도 없이 만들었다. 만날 친구가 없으면 온라인 게임에서 친구를 만들었다.


지점 이동이 잦던 아버지 따라 전학을 자주 다녀야 했던 상황 탓에 이런 현상은 더욱 심해졌다.


초등학교 5곳, 중학교 2곳, 그리고 다행히도 고등학교는 1곳. 내가 다녀야 했던 학교의 수다.


우리 어머니께서도 아직 나의 어릴 적 모습을 기억하신다.


"너는 어느 학교로 전학을 가던, 꼭 그날 친구를 집에 데려오더라."


친구를 집에 데리고 오면 어머니께서 해주신 맛있는 떡볶이를 먹기도 하고, 함께 게임을 하며 금세 친해졌다.


내가 쾌활하고 외향적이라서 다행이라시던 어머니.


그러나 그건 어떻게든 외롭지 않기 위한 유년기의 몸부림이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는 문과 반 중 절반 이상이 나와 인사를 하는 사이였다.


대학에 가서도 이런 현상은 이어졌는데, 캠퍼스에서 몇 발자국 걷지도 않았는데 누군가와는 항상 인사를 하는 나를 본 동기가 말했다.


"이제부터 네 별명은 삼보일사야. 세 발자국에 인사 한 번씩."


삼보일사. 언뜻 들으면 상당히 매력적인 칭찬이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알고 지내다 보면 정말 친한 사람은 별로 없기 마련이다.


고등학교와 달리 대학은 수업이 고정되어 있지 않았고 단체로 급식을 먹지도 않았다.

나는 외로움에 떨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의 친구인데 정작 나와 밥을 먹을 사람은 없었다.


다들 처음 겪는 무리생활에서 생존하기 위해 삼삼오오 그룹을 만들었고, 나는 남들이 보기에는 모두와 친하지만 누구에게도 속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1학년 1학기의 어느 날, 홀로 식당에 앉아 밥을 먹다가 울먹였던 기억이 있다.


"저 학생은 맨날 혼자 와서 카드로 계산해!"


식당 아주머니가 모든 손님들이 들으라는 듯이 크게 외친 직후였다.


지금이야 가게가 카드를 거부하면 큰일 나지만 내가 신입생이었던 2008년도만 해도 암암리에 카드를 기피하던 게 허용되던 분위기였다.


외로움을 잊기 위해 동아리 생활에 시간을 쏟았다. 결국 졸업할 때 내가 거쳐간 동아리의 수는 7개였다.


남들이 보기에 나는 힙하고 활동적인 학생이었다.

어릴 적 전학 첫날 무조건 친구를 데려오던 아이처럼.


이런 고민을 주변에 이야기하면 딱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같은 말을 했다.


"저런, 성장통을 겪고 있네. 시간이 지나면 다 나아질 거야."


그로부터 16년이 지난 지금.

나는 홀로 해외여행을 다닌 기간만 180일 가까이 되고, 어디를 가든 혼자서 당당히 걸어 다닌다.


식당에서 밥을 홀로 먹는 것은 물론이고 카페나 영화관까지.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도 평일 오후에 홀로 텅 빈 명동성당 신자석에 앉아있다.


나는 그때 성장통이라 했던 그 사람의 말처럼 성장을 한 것일까, 아니면 여전히 외롭지만 감정에 무뎌져서 괜찮은 척을 하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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