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 졸업을 한 학기 앞둔 시점에 1년 휴학을 하고 과외비로 여행경비를 모아 스물일곱, 홀로 73일간의 유럽여행을 떠났었다. 선후배들은 취업이 얼마나 힘든데 미쳤냐며 걱정했었다.
참 신기한 일은, 그때까지 대기업 취직 등 보통의 삶을 권하시던 부모님께서는 오히려 수긍하셨다는 것이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공항 리무진 창 밖으로 막내아들의 기나긴 첫 해외여행을 흐뭇하게 바라보시던 아버지의 얼굴이 아직도 떠오른다.
어려운 환경에서 자수성가하신 부모님 두 분 모두, 제대로 된 해외여행을 경험해 본 적이 드무셨음에도 자녀는 다양한 경험을 많이 해서 큰 물에서 놀기를 바라신 것일지도 모르겠다. 부모님만이 지지하셨던 내 인생 첫 일탈은, 주위의 우려와 달리 현재까지도 삶에 중요한 영향을 끼치는 가치관의 성장으로 이어졌다.
휴학처럼 서른둘 나이의 퇴사도 모두가 말릴 때 결정하고는 공인노무사 시험을 다년간 준비하다가 시원하게 말아먹었지만, 오히려 작가가 되는 결과로 돌아왔다. 주위에서는 내가 작가가 된 게 신기한가 보다.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는 학부, HR 일반대학원, 국제 NGO HR직원, 공인노무사 시험 준비라는 과정을 거쳐온 삶을 돌아보면 이상한 일은 아니다.
지인 중 한 명은, 내가 시간을 가치 있게 써 왔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라고 했고 다른 한 명은 끈기 있게 해 왔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마, 두 사람의 말도 일리가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좀 더 정확한 답은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나에게 글은, 답답하고 불안한 상황에서 세상에 내가 살아있다고 외칠 수 있는 수단이었다.
그 불안과 답답함은 당연하게도 퇴사를 선택한 결과이다. 그리고, 마찬가지로 지금도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나는 불안과 답답함으로 힘들어하는 대신 '자아'를 찾았고, 이를 기반으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한 글을 쓴다.
삶이 이제야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살아남기 위한 노력들이 기적적으로 연결되며 살아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삶은, 한계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다. 걷다가 아름다운 풍경이 보일 때 잠시 멈춰 숨을 한번 내쉬고는 사진을 찍으며 행복해하다가 다시 오늘을 걸어가는 것이다.
작년, 노무사 시험에 떨어졌음을 지도교수님께 알렸을 때 지도교수님은 1년 더 공부하기를 권하셨다. 지금까지 HR로 쌓아 올린 커리어가 아깝게 느껴지셨을 듯하다. 나는 잠시 고민하다가 교수님께 말씀드렸다. 생각지도 못하게 작가가 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발견한 저의 자아가 삶을 행복하게 만든다고 말이다.
더 이상 직무 커리어로 성장하고 더 많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를 누리게 되는 길에 대한 관심이 줄었다고, 작가가 된다는 것은 나를 찾았음을 의미한다고 했다. 이제 가치관이 비슷한 조직에서 HR 직무를 다시 수행하며 사회에 기여하고, 내 작가로서의 자아를 쌓아 올리는 것이 더 의미가 있다고 설명드렸다.
하지만 HR직원 겸 작가로 살기로 마음먹었다가 전업작가로 살아가기로 결심한 계기가 있었다. 산책 중에 아직도 나는 스스로가 만든 벽 안에 갇혀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였다.
누구도 나에게 HR을 하며 살라고 강요한 적이 없었다. 그저 경영전략이 좋아 진학한 자교 대학원에서 우연히 HR로 전공을 틀어야 했고, 그 결과 국제 NGO의 HR직원으로 일을 했을 뿐이었다. 공인노무사 시험준비도 나에게는 그저 HR 직무 성장의 연장이었을 뿐이다.
노을이 지는 석촌호수를 산책하다가 HR이라는 작은 돌을 주워서, 호수에 퐁 하고 던졌다.
<헤르만 헤세>의 소설 <수레바퀴 아래서>의 주인공 '한스 기벤라트'처럼 수레바퀴 아래에 깔리지 않기 위해, 다시 한걸음 걷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