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 소수자의 독백, '나는 나일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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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글쓰기에 앞서 마음이 무겁다.
풀어보려고 하는 내용이 무겁기 때문이다.
지난달에는 김기홍 활동가가 그리고 이번 달에는 변희수 전 하사가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우리가 모두 알다시피 그들은 성 소수자였다.
내가 관람한 수많은 뮤지컬 공연 중에는 LGBT라는 소재로 퀴어 문제를 풀어낸 작품들도 꽤 많이 있다.
<헤드윅>, <렌트>, <킹키부츠>, <제이미>, <록키호러픽처쇼>, <쓰릴 미> 등이 기억나고 연극으로는 <거미여인의 키스>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를 하고 싶은 <라카지>가 있다.
작품의 배경은 프랑스 남부의 휴양 도시인 '상트로페즈'라는 곳이고 거기에는 전설적인 클럽인 '라카지오폴'이 있다.
춤과 음악과 낭만이 흐르는 클럽을 운영하는 게이 커플과 이제 스무 살이 되는 두 사람의 사랑하는 아들이 나오는데 '조지'와 그의 아내 '앨빈', 그리고 '장미셸'이 그들이다.
모두에게 존경받는 리더 '조지'는 클럽 <라카지오폴>의 주인이며, 앨빈은 폭발적이고 감성적인 가창력으로 공연마다 기립 박수를 이끌어 내는 클럽의 전설적인 가수 ‘자자(ZAZA)’이기도 하다.
그렇게 평화롭게 삶을 살아가던 그들에게 어느 날 중대한 사건이 발생한다.
아들인 '장미셸'이 그의 애인인 '앤'과 결혼을 하겠다고 폭탄 발언을 한 것이다.
이게 왜 폭탄 발언이냐 하면, 신부 쪽 아버지는 게이의 존재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 극보수주의 진영의 거물 정치인이었기 때문이었다.
상견례를 치러야 하는데 난리가 날 수밖에 없었다.
사랑하는 아들의 결혼을 무사히 치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조지'는 이미 이혼해서 남이 돼버린 전처를 급히 호출하고 '앨빈'은 삼촌으로 분하여 위기를 넘기자고 제안한다.
자존심 하나로 평생을 살아온 라카지의 안주인 '자자'(앨빈)는 눈물을 머금고 제안을 수락하지만, 친모보다 더 아들을 사랑하며 키운 자신의 존재를 떳떳하게 드러내지 못하는 상황에 깊은 상처를 입게 된다.
우리가 '부성애'와 '모성애'라는 표현을 쓸 때, 그것은 반드시 '남자'와 '여자'가 지니는 자식에 대한 가없는 사랑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내가 프리랜서 생활을 하는 동안 아내는 직장 생활을 하고 있어서 나는 어쩔 수 없이 몇 년 동안 초등학교에 다니는 딸아이의 저녁밥을 지어서 먹였다.
우리 아이가 나중에 집밥이 그리워질 때 엄마(여성의) 손맛이 아니라 아빠(남성)의 정성을 기억한다고 해서 그게 잘못된 일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은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는 데 있어서 남녀를 구별하여 차등적으로 선별하여 채택하지 않는다.
조건 없는 사랑이 위에서 흐르면 절대적인 수용을 통하여 신뢰 관계를 형성하게 되는 것이다.
'앨빈'은 부모의 한 사람으로서 겉모습으로 차별 당하지 않고 자랑스럽게 아들의 잔치 자리에 참석하여 아낌없는 축하를 보내고 싶었다.
아이가 어릴 적부터 보아 왔고 또한 기억하고 있는 그 모습 그대로 말이다.
내가 접한 뮤지컬 작품들에서 퀴어 문제는 이렇게 성별의 문제를 넘어선 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다루며 관객에게 질문을 던지곤 했다.
물론 공연을 본다고 해서 관객들이 성 소수자들이 처해 있는 어려움을 모두 완벽하게 이해하고 공감하며 동참을 하게 된다는 뜻은 아니다.
어찌 보면 오히려 예술을 통해 접한 현상들이 현실의 문제를 가리고 자기 위안으로 변질될 가능성이 더 클 수도 있다.
한때 대한민국을 휩쓸었고 지금도 심심찮게 등장하는 조폭 소재의 영화들이 있다.
대중들은 영화를 통하여 깡패 집단의 내부를 들여다 보겠지만 그들이 보는 장면들은 현실이 아니고 자칫 실상과 다르게 미화가 되거나 왜곡될 확률이 높은 것이 사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이 필요한 이유는 예술가들이 현실 너머에 숨어 있는 진실에 빛을 들이대고 그림자처럼 생기는 허상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림자를 통하여 본체의 모습을 가늠해 볼 수 있다.
나는 양심에 손을 얹고 곰곰이 자문해 본다.
'과연 나는 공연을 통해 알게 된 성 소수자들의 문제를 감상적이 아니라 합리적으로 파악하고 공감하는 것일까'라고.
솔직히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없는 어려운 문제이다.
머릿속으로는 어떠한 편견 없이 그들을 바라봐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만약에 사랑하는 내 자녀가 동성애자가 되거나 혹은 성 소수자인 배우자를 선택하겠다고 결정을 내린다는 극단적으로 폭력적인 상상까지 하지는 않더라도 김기홍과 변희수라는 소수자의 죽음 앞에서 깊은 탄식을 뱉어내지 못하는 나 자신의 수준을 고백한다.
다만 뭔가 얘기를 해야 하고 글을 써야만 할 것 같은 지금의 상황에서 내가 마지막으로 얘기하고 싶은 문학적 표현은 다음과 같다.
'그들은 어쩌면 수적으로 얼마 안 되는 少數者가 아니라 1과 자신만을 약수로 가진 素數者일 지도 모른다.
그들에게 자신을 제외한 '1'은 "인간은 성별, 계급, 나이, 인종 등에 의하여 차별당하면 안 된다"라는 인간의 존엄성에 관한 정언명령(定言命令)이 아니겠는가'라는.
부디 고인들께서 편견과 혐오가 없는 세상에서 영면하시길 기원한다.
*영상: 앨빈이 엄마가 아닌 삼촌의 모습으로 상견례에 참석하기로 동의한 후 서글픔을 가누지 못하고 '나는 나일 뿐'(I am what I am)이라는 넘버를 부르는 장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