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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쾌대 Apr 09. 2024

친구를 보다

오늘 일지

"이 책은 정부미야. 작년에 나왔어야 했는데 일 년 묵었다는 말이야. 근데 오늘이 어쩌다 보니 4월 8일이네 그려..."


옛 친구를 만나 선물하며 속내를 전했다. 그 친구와 나는 1997년 4월 8일, 강남구 신사동에 있는 어느 건물의 한 평 짜리 사무실에서 창업을 했다. 공교롭게도 그곳은 408호여서 '앞으로 사통팔달하게 될 운명'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던 기억이 난다.


이후 7년 동안 우리는 디자인과 IT 분야의 벤처회사 파트너로 서울의 홍대ㆍ테헤란로와 뉴욕의 맨해튼과 홍콩과 천당과 지옥을 지나면서 동고동락하며 온갖 경험을 함께 나눴다. 속된 말로 '마누라보다 더 뼛속 깊이 아는 사이'가 된 것이다.


이제 어느새 우리는 늙었다. 어렸을 적, 햅쌀을 도정하여 비싸게 팔리던 일반미와 달리 1년, 2년, 심지어는 3년씩이나 공공 창고에서 묵었다가 시중에 풀려 싼 값에 유통되던 정부미처럼 초라해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으로 지내는 집 안의 밥상에서는 이상하게도 찬바람이 분다.


내 소중한 친구이자 엑스 파트너는 오늘, 알 수 없는 미지의 세계를 향한 호기심이자 에너지에 이끌려 먼저 그 영역을 개척한 자들이 누리는 엄청난 프리미엄과 그들을 추종하는 후발자들이 만들어가는 카르텔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일반인들이 감내해야 하는 삶의 진부함과 이 모든 현상이 결국은 죽음에 대한 공포와 거기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본능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보다 더 강력한 힘은 없지 않겠느냐는 의견 등을 뜨겁게 토로했다. 그 사이에 뜨거운 커피가 식는 줄도 몰랐다. 헤어지고 나서야 미처 친구에게 전하지 못한 얘기가 떠올랐다.


'친구야, 얼마 전에 기초생활 수급을 받는 지인께서 투병 생활을 하느라 관청에서 지급받은 정부미를 다 소진하지 못하고 몇 부대나 보관하고 있다가 내가 후원하는 시설에 기증해 달라고 부탁하신 일이 있었어. 난 그걸 시설에 전달했고 거기에서 함께 생활하는 삼십 명의 무의탁 발달장애 식구들은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밥상을 받았는지도 모르겠다...


친구야, 우리는 어쩌면 지겹게 오래 살고 힘겹게 오래 버텨야 할 지도 모르겠지만, 그런 날들을 지나더라도 우리가 항상 오늘처럼 반갑게 인사를 나눌 수만 있다면, 그래도 죽음이 만연한 세상이 어쩌면 살맛이 나는 곳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렇지 않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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