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내가 참여하는 독서 모임(강좌)에서 이 책을 선정하고 토론을 했다. 기초 발제에서 나온 질문이 이 책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는 것 같아서 옮겨 본다.
"여러분은 한국적 상황이나 우리의 일상에서 이 책의 저자가 말하는 방법이나 대화법을 적용할 수 있다고 보시나요? <벽을 뚫는 대화법>은 20세기 후반, 미국 즉 서구문화를 배경으로 하는 곳에서 워크숍 프로그램으로 창안된 것이자, 주로 환경운동이나 공익활동가를 대상으로 한 것으로 보입니다. 특히 논리적 분석과 프로세스를 중요시하는 서구인의 스타일에 기반한 진단과 해법입니다. 더구나 서양과 동양의 소통 문화에는 차이가 있어 서구인은 직접적 의사소통을 하는 반면 우리는 간접적 의사소통을 하고, 직접적인 표현을 꺼려하는 편입니다. 게다가 갈등을 처리하거나, 견해와 이견을 나타내는 방식에도 차이도 큽니다."
이 책은 개인보다는 주로 조직 간 갈등을 분석하고 그 해결책을 모색하기 위한 여러 실천적 방안을 제안하는 내용을 담고 있어서, 개인적인 인간관계에서 소통이 막혀 갈등을 겪는 사람들은 책에 몰입하기에 다소 무리가 있어 보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에서 토론자들의 의견이 모아지고 여러 의견들이 나왔던 두 가지 주제가 있어서 이를 소개하려고 한다.
1. 진정성의 문제
토론 발제문을 다시 한번 인용해 본다.
누구나 진정성 있는 사람을 좋아합니다. 우리는 진정성 있는 사람이란 ‘열정이 있고, 솔직하고, 타협하지도 굴복하지도 않고 일관된 생각과 행동을 하는 사람’이라고 이해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진정성은 저자가 말하는 ‘정적 진정성’(p.57)에 가까워 보입니다. 저자는 정적 진정성을 지닌 사람은 ‘자기 생각과 의견이 확고하고, 자아를 고수하고, 극단적인 확실성이 있고, 경직되어 있고, 사과를 하거나 자신의 생각을 굽히지 않는다’고 요약합니다(p.57 표). 저자는 “정치적 성향을 넘어 함께 번영하고 혁신을 이루는 곳에서는 역동적이며 살아 있는 다른 종류의 진정성이 작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p.56)고 말하며 진정성의 정의를 다음과 같이 시도합니다. “진정성은 자신이 만들고자 하는 세상과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그에 상충하는 말이나 행동을 솔직하게 인정하는 것이다.”(p.58)
토론자들은 우리 사회에서 '진정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위선적인 태도에 대해 심도 있게 비판했다. 주로 진보 진영의 활동가, 소위 말하는 운동권 세대에 속하는 이들에게서 이런 모습을 많이(지겹게) 지켜봤다는 토론자들이 지적하고 있는 것은, 위의 인용문에서 나오는 <정적 진정성>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확증 편향에 사로잡힌 외골수 원칙주의자'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나는 이미 작년부터 참여한 작은 시민 운동 단체에서 이런 유형의 회원을 접하며 그동안 직접적인 접촉을 피하며 거리를 두고 있던 터여서 금방 이해가 되는 대목이었다. 순혈주의라고 불러도 좋고, 시대착오적인 꼰대라고 불러도 무방한 이런 부류의 사람들과 대화를 시도하려면 '피할 수 없는 고통은 즐겨라.'라는 명언을 가슴에 품고 협상 테이블로 나가야 할 노릇이다. 그는 말로는 상대방이 얘기하는 상충되는 말이나 행동을 솔직하게 인정한다고는 하지만, 결국 자신이 만들어 키워 온 프레임에서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을 이미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진정성이란 아름다운 언어 뒤에 추하게 자라고 있는 이 독선과 아집을 대화 몇 마디로 어떻게 제거할 수 있단 말인가. 그 자신도 해결하지 못하는 고질적인 병에 가까운 증상인 것을.
2. 대화의 중요성
갈등과 대립은 스스로 생명력을 지닌 것처럼 처음에는 거미줄처럼 아주 미약하게 시작하지만, 나중에는 배를 정박시키는 밧줄처럼 견고하고 단단하게 관계를 옥죄고 결국 상호 파멸에까지 이르게 만드는 속성이 있다. 이를 위한 해결책의 실마리로 책에서 발제한 토론의 제시어는 '존재 방식'이었다.
저자는 대화와 관계의 교착상태에서 ‘극단적 대립을 뚫고 이해와 합의, 창조적 행동에 이르는 성공적으로 찾는’ 일에 대해(p.14) 모색하고 연구했습니다. 저자는 자신의 연구 결과를 다음과 같이 요약합니다. 어젠다를 추진할 수 있게 해 주는 ‘시나리오’나 ‘화두’는 존재하지 않는다. 고구마처럼 답답한 대화 상황을 타개하려면 ‘해야 할 일’을 찾지 말고 좀 더 근본적인 변화, 다시 말해서 ‘존재 방식 way of being’을 변화시켜야 한다. … 교착상태와 양극화는 사람들이 자신의 확고한 견해, 굳어진 생각, 존재 방식에 얽매여있을 때 지속된다.(p.14)
나는 책을 읽고 토론을 하면서 '인간의 존재 방식'에 관하여 짧게 생각해 보는 시간을 가졌다.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승자독식'과 '적자생존'의 이념을 지닌 사람들은, 그 가치관과 인간관과 세계관으로 인해 인생사를 결국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으로 설정하고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전쟁과 죽음에 가까운 레토릭이다. 그는 일생 동안 전쟁을 치르며 손에 쥔 전리품이 주는 기쁨과 그 성과를 지키기 위해 타인이 침범하지 못할 높은 벽을 둘러쌓고 지낼 것이다. 고차원의 지능체가 이를 관찰한다면, 그 벽을 일컬어 <감옥>이라고 명명할 것이 분명함에도 말이다. (사실 자유만, 딱 그 한 가지만 포기한다면, 감옥처럼 의식주가 완벽하게 해결된 파라다이스도 없다고 말해도 딱히 틀린 말은 아니다)
감옥의 죄수라는 존재 방식을 거부하고 존엄하고 고귀한 자유인의 방식으로 생명을 유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 타인과의 연대와 협력, 그리고 이를 위한 대화와 협상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 아닐까 한다. 우리는 사실 모두 대화와 협상을 바라고 원하지만, 사실 거대한 조직과 진영 안에서 한낱 개인으로 무력함을 느끼며 의욕을 상실한 경험을 많이 경험하며 지내는 것도 사실이다. 어떻게 하면 그런 강력하고 구조적인 감옥에서 탈출할 수 있을까? 많은 토론자들이 미국의 신화적인 이주자 노동운동가 세자르 차베스(p.31)와 한 학생이 나눈 대화에 격하게 공감하였기에 이를 인용하며 마치기로 한다.
한 학생이 그에게 ‘어떤 방식으로 사람들은 단결시키는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먼저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지. 그다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는 거야.”
학생이 다시 물었다. ‘그게 아니라 어떻게 단체/거대조직을 결성하셨죠?’
차베스는 똑같이 대답했다. “먼저 한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 그다음 다른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면 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