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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그리스인 조르바_니코스 카잔차키스

책을 읽고

by 김쾌대

현대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자 '20세기 문학의 구도자'라고 불리는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대표작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인 조르바>를 읽었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인 '나'는 작가의 명칭에 걸맞게 '구도자'의 모습으로 독자에게 다가온다. 그는 무엇을 구하고 있었던가?


"조르바, 내 말이 틀릴지도 모르지만, 나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고 생각해요. 소위, 살고 먹고 마시고 사랑하고 돈 벌고 명성을 얻는 걸 자기 생의 목표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또 한 부류는 자기 삶을 사는 게 아니라 인류의 삶이라는 것에 관심이 있어서 인간은 결국 하나라고 생각하고 인간을 가르치려 하고, 사랑과 선행을 독려하지요. 마지막 부류는 우주 전체의 삶을 살려는 목표를 가진 사람입니다. 사람이나 짐승이나 나무나 별이나 우주 만물, 우리는 모두 하나다, 우리 모두는 무시무시한 하나의 싸움에 가담한 하나의 실체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요. 무슨 싸움일까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는 싸움이지요." (p.398)


'나'는 물질을 정신으로 바꾸기 위해 사력을 다해 싸우고 있다고 말한다. 육체를 지닌 인간(물질)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정점은 <지식>도, <미덕>도, <선(善)>도, <승리>도 아닌, 보다 위대하고 보다 영웅적이며 보다 절망적인 어떤 것, 바로 <신성한 경외감>이라는 사실이라고 밝힌다. (p.385) 여기서 그가 말하는 '절망적인 것'이라는 고백에서 니체가 얘기했던 <비극의 파토스>가 떠오른다. (낡은 세계를 상실하고 자신의 세계를 획득하는 자, 위버멘쉬를 말함이다) 그에게 싸움을 통해 획득되는 '신성한 경외감'이란 다른 말로 얘기하자면 '부동심', '아타락시아', '올림포스의 평정'과도 같다. (p.11)


그의 눈에 비친 인간이란 존재는, 작고 초라한 자신의 삶 둘레에 난공불락의 방벽을 쌓아 올린다. 그 안을 피난처로 삼아, 삶에 미미한 질서와 안정을 부여하려고 애쓰는 불온한(동시에 불완전한) 상태이며, 그런 미미한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에게 있어서 최대의 적은 <거대한 확신>이다. (p.423) 그 확신이란 아마도 방벽 너머에 뭔가 완전히 새롭고 놀라운 경이로운 삶의 목적이 자리 잡고 있으리라는 신념과도 같을 것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그 확신에 따라 '인간은 안전하고 평온한 자기의 방벽을 부수고 먼 바다로 항해를 떠나는 위대한 여정을 시작할 수 있다'라고 주인공인 '나'는 사력을 다해 자기 자신과의 한계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으로 읽혔다. (이 책의 후반에 이윤기 평론가에 의해 '20세기의 오디세우스'라는 칭호를 얻고 있는 작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주인공인 '나'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그런 확신에 대해 작품 여러 곳에서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모든 것이 어긋났을 때, 자신의 영혼을 시험대 위에 올려놓고 그 인내와 용기를 시험해 보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보이지 않는 강력한 적 ㅡ 혹자는 하느님이라고 부르고 혹자는 악마라고 부르는 ㅡ 이 우리를 쳐부수려고 달려온다. 그러나 우리는 부서지지 않는다. 외적으로는 참패했을지라도 내적으로는 승리자일 때 우리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긍지와 환희를 느낀다. 외적인 재앙이 지고의 행복으로 바뀌는 것이다." (p. 416) (나는 여기서 문득 헤밍웨이의 <노인과 바다>를 떠올렸다)


그리스인이었던 작가('나')는 자신이 고민하고 있는, 그래서 위태롭게 지속하고 있는 정신세계 속 항해의 귀착지가 합일과 목적의 확고함과 욕망의 일관성에 있음을 넌지시 얘기하고 있다. "술과 포도와 황홀한 기쁨의 미남 신 디오니소스와 성 바쿠스가 내 마음속에서 융합되면서 같은 모습이 되었다."(p.287)라고.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는 로마 신화의 바쿠스에 해당한다. 위에서 언급된 성인 바쿠스는 기독교의 순교자이다. 그는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포섭하여 이성과 과학과 윤리와 도덕과 예술과 종교를 넘어서는 초월적인 어떤 상태에 대한 갈급함을 얘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그가 그의 목마름을 해갈하기 위해 '붓다'에 매달리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가 진정으로 바라고 원하는 것은 '필연에 순응하고 불가피한 것들을 자의로 행한 것이 되게 바꾸는 일', 즉 <해방>이었다. (p.387)


어쩌면 세상의 모든 지식과 지혜를 추구하는 '나'는 참으로 뼛속까지 그리스 사람(철학)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전혀 그리스인과 어울리지 않는 '그리스인 조르바'가 등장한다. 조르바는 힘겨운 사투를 벌이며 항해를 하고 있는 '나'에게 자기 할아버지는 마을을 떠난 적이 없었고, 칸디아에도 카네아에도 가보신 적이 없었다고 하며 할아버지가 마을을 떠나지 않은 이유에 대하여 '칸디아와 카네아가 내게 오는 셈인데, 내가 뭣 하러 거기까지 가?'냐라고 하셨던 이야기를 전해준다. (p.76) 조르바의 눈에 비친 '나'는 줄에 묶여 날고 있는 새와 같아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라고 갈파한다. "아니요, 당신은 자유롭지 않아요. 당신이 묶인 줄은 다른 사람들이 묶인 줄보다 좀 길 거예요. 그것뿐이오. 두목, 당신은 긴 줄 끝에 매달려 있으니까, 이리저리 다니고, 그리고 그걸 자유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러나 당신은 그 줄을 잘라 버리지 못해요...(중략) 뭐가 부족해요? 젊겠다, 돈이 있겠다, 건강하겠다, 사람 좋겠다, 만고에 부족한 게 없어요. 하나도 없지. 한 가지만 제외하고! 무식말예요. 그게 없으면 두목, 글쎄요..." (p.428~429)


생각이 너무 많은 '나'는 그런 조르바를 보며 늘 감탄하고 당황하며 깨닫는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내심 놀랍고도 기뻤다. 무릇 위대한 환상가와 위대한 시인은 사물을 이런 식으로 보지 않던가! 매사를 처음 대하는 것처럼, 매일 아침 그들은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세계를 본다. 아니, 보는 게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p.199)

"나는 당혹감 속에서 조르바의 말을 듣고 있었다... (중략) 하지만 반항은 어떠한가? <필연>을 무찌르고, 외부의 법칙이 영혼 내부의 법칙을 따르게 만들려는, 인간의 저 오연하고도 돈키호테적인 반발은 어떠한가 말이다. 그래서 현재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비인간적인 자연의 법칙을 거슬러 자기만의 마음의 법칙을 따라 신세계를 창조하려 든다면, 현재의 세계보다 더 순수하고 더 선하고 더 도덕적인 신세계를 창조하려 든다면?" (p. 387)


소설은 '나'와 조르바가 헤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것으로 결말을 맺는다. 물론 두 사람은 떨어져 있으면서도 서로를 잊지 못하고 가슴속에 간직한 채 말이다. 두 사람은 운명적인 만남을 통하여 자기 방식을 바꾸거나 인식의 지평이 넓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둘은 그로 인해 더욱 깊어졌다. 나는 책을 덮으며 주인공인 '나'는 그물을 짜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예민한 신경망을 지닌 그리스 사람 '나'는 지, 수, 화, 풍에 더해 공(空)까지 포섭하여 사유 체계를 구축하고 인간과 세계와 우주를 이해하려 했지만, 늘 절친한 친구처럼 행동하는 양심으로 살지 못하는 서글픈 지식인의 모습으로 비쳤다. 그가 이성의 힘으로 직조하는 그물에 어느 날 우연히 걸려든 조르바라는 물고기는 거기에 담기에는 너무 버겁고 역동적이어서, 그물의 효능과 가치에 대한 회의가 불쑥불쑥 들었고 마침내는 자신이 촘촘한 신경망에 걸려 (무식하지 못하고) 갇혀있는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붓다의 가르침에서 그는 어쩌면 구원과 안식을 구했는지도 모르겠다.


"울고 싶은 기분이었다. 조르바의 말은 구구절절 옳았다. 어릴 때에는 나도 미친 충동과 초인적인 욕망이 넘쳐, 세상이 못마땅했다. 차츰 나이를 먹으면서 나는 조용해졌다. 나는 한계를 정하고,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 인간적인 것과 신적인 것을 가르고, 내 연(鳶)을 꼭 붙들고 놓치지 않으려고 했다." (p.429)


나이를 먹어가면서 나 역시 주인공인 '나'와 같은 심정이 점점 강하게 든다. 나는 과연 어떤 연줄을 붙잡고 인생의 마지막을 지나고 있는지, 또한 앞으로 어떤 인연(因緣)들을 만나게 될는지, 그리고 이 항해의 끝에는 어떤 귀항지에 정박하게 될 것인지, 그리하여 나는 항해의 끝에서 진정한 안식과 평안을 누릴 수 있으려는지... 책을 읽는 동안 눈을 떼지 못했고, 책을 덮으면서 나는 오히려 눈을 감고 세상을 보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창조하는 일이 무엇인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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