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비교적 얇은 책의 분량을 보고 가볍게 들어갔다가, 매 페이지마다 녹아 있는 철학적 질문과 그에 대한 해답에 대한 고찰을 대하며 마치 물속에서 힘겹게 걷듯 힘겹게 마지막 책장을 넘겼다.
어려운 철학적 담론을 여기에 풀고 싶지 않다. 이해도 잘 안되는 데다가 이것을 이해하고 풀어 설명할 실력이 내게 없기 때문이다.
'행복하고 존엄한 삶은 내가 결정하는 삶이다'라는 선언은 아마 모든 이의 가슴을 뛰게 만들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 것이다. 동시에 그 정언(定言) 앞에서 한없이 움츠러드는 소시민의 고민으로 자기 결정을 필요로 하며 매일매일 내게 다가오는 생계(활)형 질문을 용감하고 솔직하게 던지고 싶다. 그 질문이란 다음과 같다.
"오늘 점심은 뭘 먹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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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결정권자로 살아가는 법
점심 메뉴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이란 어떤 것인가?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또한 내면에서 올라오는 갈등(ex. 짜장이냐, 짬뽕이냐?) 속에서 후회하지 않는 결정을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자아상'을 발견하는 일이다. '내가 지금 과연 무엇을 진정으로 먹고 싶은지'를 알아차리는 일 말이다.
사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고 싶은지 정확히 모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맛있는 식당을 찾아내서 먹고 싶다.
가성비가 좋은 곳이면 좋겠다.
다이어트와 건강에 좋은 음식이면 좋겠다.
어제 점심과 똑같은 메뉴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기왕이면 누가 사 주는 기회가 되면 좋겠다.
구내식당에서는 일하는 사람들과 어울리지 않고 혼밥이면 좋겠다...
점심 메뉴를 결정하는 일에 어려움을 겪거나 대충 한 끼를 때우는 일이 반복되며 '대체 내가 왜 이런 작은 일에도 우유부단한 걸까?'라는 의문이 든다면, 이러한 욕구의 근원을 찾아야 한다.
'자기 인식'의 길을 찾아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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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나를 발견하는 <자기 결정>의 네 가지 방법
첫 번째는 자신의 내부가 아닌 외부로 시선을 돌려보는 것이다. 식당에 들어가서 다른 테이블에서는 어떤 음식을 먹고 있는지 살펴보고 순간적이지만 강렬하게 원하는 음식이 있는지 찾아보는 방법이다. 자신 내부의 문제를 한 발짝 떨어져서 타인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거리두기에서 중요한 사항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두 번째는 바로 '먹방'을 시청하는 일이다.
"먹방을 보면서 사고의 측면에서 가능성의 스펙트럼이 열립니다. 인간이 먹는 행위를 수행하는 모습이 얼마나 다를 수 있는가를 알게 되는 것이지요. 방송을 보기 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지점에 대해 정보는 물론 이제 상상력의 반경이 보다 넓어진 것입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의 비판 능력도 성장합니다. 방송에 나온 식당을 찾아가서 실망하고, 요리 방송에서 하는 레시피대로 따라 하다가 결과물 앞에서 좌절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미처 몰랐던 자기 정체성을 발견하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는 직접 요리를 해 보는 것이다.
'아니, 점심 한 끼 먹자고 언제 재료를 가져다가 요리할 겨를이 있겠는가?'라는 생각이 먼저 들 것이다. 직장인들에게는 어려운 일이겠지만, 프리랜서나 비교적 자유로운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한번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직장인들도 퇴근 후에 집에서 한번 도전해 보길 바란다)
"요리를 해보지 않은 사람은 자신이 어떤 맛을 좋아하는지조차 알지 못한다."
어릴 적부터 엄마가 해 주신 음식을 배에 채우기 바빴던 사람들은 수동적인 태도가 몸에 배면서 '음식 주권(主權)'이 주는 책임감과 성취감, 그리고 창의성 등에 대해서 무지하고 무관하다. 음식은 단지 위장에 뭔가를 집어넣는 물리적인 행위가 아니다. 라면 하나를 끓여도 스프를 먼저 넣을지, 면을 먼저 넣을지를 고민하게 된다. 재료들을 하나하나 처리하는 과정에서 능동적 행위자로서의 나는 매 순간 크고 작은 결정을 내려야만 한다. 유명한 레시피를 따라 하는 과정에서도 얼마든지 자신의 생각대로 변형하여 어쩌면 더 나을지도 모르는 유니크한 결과물을 창출할 수 있다. 요리에 관한 자기의 맛에 대한 취향과 장단점 및 문제 해결 능력 등을 모두 체험하며 자기 인식이 확고해지면서 자기 결정이 무엇을 뜻하는지 머리가 아닌 몸으로 체득하게 된다는 뜻이다.
네 번째는 "주방의 환경"을 꾸미는 속에서 '먹는 인간'의 실존을 깨닫게 된다.
초보자에서 벗어나 중급자로 올라가기만 해도 벌써 주방 기구에 신경을 쓰게 된다. 한식과 양식과 일식과 중식 등에 필요한 칼과 도마와 그릇이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다. 참기름과 들기름의 차이를, 가스레인지와 인덕션의 차이를, 베이킹소다의 활용법과 치킨 스톡이나 굴 소스의 용법을 꿰뚫고 싶다는 열망으로 이를 주방에 구비하며 여러 실험을 하면서 인터넷 쇼핑의 개미지옥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다가 어느 날, 자신이 직접 만든 '특제 소스'까지 개발하는 지경까지 가는 기적이 일어나기도 한다. 맛(음식)을 소비하는 존재에서 이제 그걸 창조하는 지경까지 나아가는 셰프가 되는 것이다. 그는 이제 자기를 위해 요리하지 않고 타인을 위해 기쁜 마음으로 놀이를 즐기게 된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라는 심정에서 벗어나 목구멍에서 콧노래 소리가 흘러나오게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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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자기 결정으로 찾은 먹는 행위의 존엄성과 행복
이러한 과정을 통해 자기를 인식하고 자기 결정을 하게 된 사람은 어떻게 될까?
먼저 외면적으로 행동의 자유가 생긴다.
그리고 내면적으로 내가 되고 싶은 상태로 존재하게 된다.
매일 끼니때마다 고민하며 메뉴를 결정하는 어려움에서 벗어나, '내가 먹는 것이 나'이며 '내가 아닌 타인을 위해 요리하는 즐거움'과 '자기만의 소스와 레시피를 창조하는 기쁨'을 누리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음식과 먹는 행위에서의 '소외'로부터 벗어나 대상에 대한 '합일'과 '충만'을 체화하며 행복을 누리게 되는 일이 삶에서 벌어진다.
비단 점심 메뉴에만 국한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음식을 먹거나 요리하는 '나'는 일을 하고, 사랑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나'와 다름아니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의 즐겁고 행복한 점심 한 끼를 기원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