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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_밀란 쿤

책을 읽고

by 김쾌대

1. 번역의 오류(제목)

이 책의 영어 제목은 <The Unbearable Lightness of Being>이다. 직역하면 '존재의 참을 수 없는 가벼움'이 될 텐데, 이는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과는 다른 의미이다. 우리를 참을[견딜] 수 없게 만드는 것이 존재인가? 아니면 가벼움인가? 나는 번역에서는 무심결에 '존재'가 그렇다고 느끼지만, 영어(프랑스어, 체코어)에서는 '가벼움'에 가깝다고 본다. 따라서 많은 사람이 제목을 보면서 '역시 사람이란 존재는 믿을 만한 구석이 별로 없고,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며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조변석개하는 그런 경박한 존재'라고 여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나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참을[견딜] 수 없는 것은 가벼움이라고 느꼈다. 가벼움을 견딜 수 없다니?게다가 작가는 책에서 끊임없이 독자에게 가벼움을 향한 독려를 아끼지 않고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에 대한 함의는 '가벼움을 향한 참을[견딜] 수 없는 열망' 정도로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전체적으로 '인간은 자기 자신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마치 방광이나 직장이 터질 것 같아서 황급하게 화장실 문을 두드려 댈 정도로) 가벼움을 추구하는 존재' 정도로 해석할 수 있다.


왜 그토록 가혹하게 가벼움에 천착해야 하는가? 니체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우리 인생의 매 순간이 무한히 반복되는 영원 회귀 사상의 '가장 무거운 짐(das schwerste Gewicht)'을 짊어지고 가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거운' 바위를 무한히 정상으로 밀어 올려야 하는 형벌을 받은 시지프(시시포스)가 떠오르기도 한다) 그 가늠할 수 없는 무게가 짓누르고 있다면 존재는 오로지 거기서 벗어나고 싶다는 열망 외에는 달리 취할 수 있는 대안이 없다. (그래서 나는 'lightness'를 '가벼움'이라는 말 대신에 '홀가분함'으로 번역하는 것이 더 나을 뻔했다고 생각했다.) 인간이 그 열망을 포기하고 그만두고 싶어도 니체가 언급했던 '힘에의 의지(Wille zur Macht)'가 그걸 허락하지 않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에게는 내 존재보다 더 큰 존재가 밀어붙이는 의지 때문에 우리는 결코 해방과 자유(가벼움)에 대한 열망을 중단할 수 없는 형편이다. 소설에서는 네 명의 주인공이 등장하여 각각의 무거운 짐과 그로부터 벗어나 가벼움(홀가분함)을 추구하는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1-1. 토마시

그는 외과의사(과학자)이며 유물론자일 가능성이 높다. 그의 눈에는 우주와 세상과 인간은 철저하게 어떤 법칙을 따라 운행되는 시스템이다. 인체를 해부하며 그는 그 법칙을 확인하고 마치 신과 같이 질서를 부여한다. 그런 그를 짓누르는 것은, 단 한 치(혹은 1마이크론)의 오차도 없는 정교함과 폐쇄 회로의 가치관이다. "es muss sein"(그래야만 해!)가 지배하는 정신이 숨이 막혀 죽지 않기 위해서 그는 여체를 탐닉한다. 환자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메스를 들어 인간의 내부를 들여다보며 <탐색>하는 것이 아니라, 백만 분의 일의 확률로 존재하고 있는 여자(인간)의 '자아'를 <발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쩌면 유물론자 과학자가 신의 형상을 닮은 자아를 발견하면서 스스로 신과 대등하거나 적어도 조수 역할이라도 하면서 미로에서 벗어나는 가벼움(홀가분함)을 강렬하게 원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토마시는 이 100만 분의 1을 발견하고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에 사로잡혔으며, 그의 눈엔 이것이 바로 그의 여자 집착증이 지닌 의미였다. 그는 여자에 사로잡힌 것이 아니라, 그들 각자가 지닌 상상도 못 하는 부분, 달리 말해서 한 여자를 다른 여자와 구분 짓는 이 100만 분의 1의 상이성에 사로잡힌 것이다." (p.328)


그의 탈출 욕구를 이렇게 이해할 때, 그가 왜 테레자의 만남에서 여섯 번의 우연(필연의 법칙에서 벗어난)에 그렇게 큰 의미를 부여했으며, 그의 묘비명에 왜 <하나님의 나라를 바람>이라고 적혔는지가 비로소 이해가 된다.


1-2. 테레자

그녀를 상징하는 말로는 인내와 헌신이 떠오르지만, 내가 볼 때 그녀는 강박증을 지닌 사람이었다. 남편인 토마시가 쉬지 않고 여성 편력을 드러내며 바람을 피우고, 그의 머리카락에서 다른 여자의 성기 냄새를 맡아도 곧바로 따지지 않고 감내한다. 그녀를 짓누르는 것은 낮은 자존감이다. 그녀의 어머니가 결혼 상대를 잘못 고르는 바람에 비참한 인생으로 추락하고, 그런 자신을 증오하는 그녀가 사람들 앞에서 딸인 테레자를 조롱하고 정신적인 학대와 다름없는 언행을 퍼부을 때마다 그녀의 자아는 모래성처럼 허물어져 갔다. 그녀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정신적인 독립을 이루지 못한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어머니가 그랬듯이 자기 존재를 멸시하고 학대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노선에 '정조'(관념)를 전략적으로 배치했다. (미숙한 선택으로 결혼에 실패한 어머니와 다르게, 자기는 완벽한 전술로 남자에 의해 무너지지 않기로 결심했다고 본다.) 환경과 자신을 변화시킬 능력도 의사도 없다면, 자리를 지키며 함몰하지 않기로 했다. 그녀의 '자리지키기'는 결국 짓눌리고 짓눌린 존재가 취할 수 있는 마지막 '자기 되기'(Being Myself)였고, 완벽주의에 가까운 강박적인 의식에서 그녀가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꿈꾸기'였다고 본다.


"내가 보기에 테레자는 아름다운 여인의 삶을 멀리 내팽개쳤던 어머니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그리고 테레자 스스로 신경질적인 태도를 드러내고 우아한 여유가 결핍된 행동을 한다 해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자기 파괴적이며 폭력적인 어머니의 행동, 그것은 그녀, 바로 테레자 자신이었다.)" (p.82)


꿈을 통해 무거움(강박)에서 벗어나는 일탈은 잠시 현실에서 눌린 자신의 억압을 표출한다는 점에서 가벼울지는 몰라도, 여전히 자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점에서 참으로 허망하다. 왜냐하면 진정한 인격적인 독립이란, 누군가에게 의존하고 종속되어 완성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지막까지 토마시와 애견 '카레닌'에게 기대어 삶을 이어갔지만, 끝내 홀로서기에는 실패했다.


1-3. 사비나

사비나를 괴롭히는 무거움은 사실 이해하기가 쉽지 않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부정할 때 대안이 없는 경우에는 '반대를 위한 반대'라는 비판을 받는다. 그녀는 권위적인 아버지(와 그가 상징하는 관습과 전통 따위)를 배신하며 살았지만,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녀에게 남들이 만들어 놓은 줄에서 벗어나는 일은 늘 새로운 도전이었고 설레는 탐색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한 부정의 연속 끝에 있을 마지막 종착점, 원하지 않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칠 부정(배신)의 종료 순간이 두렵게 느껴졌고, 그것이 아마도 우울증의 원인이 아니었을까 싶다. 또한 처음엔 새로웠지만 이내 타성에 젖어 무력해지고 마는 현실이 그녀를 괴롭혔을 것이라고 본다. 그녀가 아버지의 유산마저 포기하고 유일하게 받아냈던 '중산모자'는 그녀의 분신과도 같았다.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모습으로 그녀의 거실에 걸린 그 모자 앞에서 그녀는 도발적인 섹스를 한다.


"사비나의 삶이 음악이었다면, 중산모자는 그 악보의 모티프였다. 이 모티프는 영원히 되풀이되었으며 매번 다른 의미를 띄었다. 그 모든 의미는 마치 물이 강바닥을 스치고 지나가듯 중산모자를 거쳤다. 그리고 내 생각에 그것은 헤라크레이토스의 강바닥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물에서 두 번 목욕하지 않는다!" 중산모자는 강바닥이었고, 사비나는 매번 다른 강물, 다른 의미론적 강물을 보았던 것이다..." (p. 151)


그녀는 인생에서 벌어지는 사건들 속에서 매번 다른 의미를 원했고, 그것이 그녀가 원하던 가벼움이었다. 그녀가 말하는 배신은 다른 말로 하자면 '부정'이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녀는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뻔하게 익숙해지는 세상이 낡은 무대장치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녀는 종종 공동묘지를 찾아 그곳에서 눈을 감고 거닐며 마음의 안식을 얻는다. 싸구려 삼류 제품처럼 역겹고 키치(kitsch)한 세상의 제도와 사상과 예술과 섹스를 차마 눈뜨고 응시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고서 말이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였던 그녀는 자기 작품 속에서도 지체되는 진부한 표현에 갇혀 답답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실수로 자기 작품에 실수를 한 뒤에 그녀는 가벼움의 가능성을 발견한다.


"이 그림은 망친 거야. 붉은 물감이 캔버스에 흘렀거든. 처음에는 화를 냈는데 점차 그 얼룩이 맘에 들더군. 그 공사장이 진짜가 아닐 뿐 아니라 눈속임용으로 그려 넣은 낡은 무대장치 같았고, 붉은 물감 자국은 찢어진 틈 같았기 때문이지. 그래서 나는 이 틈을 확대해서 그 뒤에서 볼 수 있을 것을 상상하는 놀이를 시작했어..." (p.113)


화가는 눈에 보이는 풍경이나 장면을 화폭에 담을 때 시시때때로 무력함을 느낀다. 왜냐하면 아무리 해도 실물 그대로를 재현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현대 광고에서 TV 브라운관의 화소 숫자가 클수록 보다 생생한 장면을 구현한다는 점을 생각해 보라) 색의 4요소(CMYK)의 세계에서 살아가는 인간이 빛의 3요소(RGB)의 무한 화소를 어떻게 표현하겠는가? 그녀는 그러한 존재의 묵직한 무력함 앞에서 차라리 화폭을 찢으며 그 틈새로 들어오는 빛을 가벼움을 원했는지 모르겠지만, 거울 앞에 서서 비친 자기 모습을 배신(부정)하는 딜레마에 빠지곤 했다. '자기 배신을 배신하기'가 그녀에게는 마지막 종착점이었을 텐데, 중산모자를 버리지는 못하듯이 그녀는 그 거울을 깨버릴 용기는 없었다.


1-4. 프란츠

학자인 프란츠는 미남이며 학계에서도 출세 가도의 정상에 서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고차원의 지식과 자기주장을 지니고 있었으며, 육체도 탄력이 넘치는 매력을 지닌 인물이다. 자신감에 있어서 결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법한 그였지만, 그는 사실 무거운 고민이 있었다. 그는 책에 파묻힌 자기 삶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했는데, '행동하는 양심'에 대한 학자적 자책이었다. 따라서 그는 시위 행렬에 매료되었는데, 왜냐하면 그곳에서 뭔가를 기념하고, 뭔가를 요구하고, 뭔가에 대해 항의하고, 혼자 있지 않고 밖에서 다른 사람과 함께 한다는 사실에서 가벼움(해방감)을 느꼈다. (p.169) 그의 정부이자 애인인 사비나는 선에서 벗어나기를 희구했지만, 그는 현실에서 도도하게 흐르는 역사의 (시위) 선 안으로 들어가길 자청했다.


"부유한 사회에서는 손으로 일할 필요가 없고 정신적 활동에 몰두하지. 대학도 점점 많아지고 그에 따라 학생도 많아져. 학위를 따기 위해서는 논문 주제가 있어야 해. 그런데 어느 것에 대해서나 논문을 쓸 수 있으니 주제는 무한대로 널려 있어. 그렇게 해서 써낸 원 뭉치는 자료실에 산더미처럼 쌓이고 그것은 무덤보다 쓸쓸하지. 만성절이 되어도 찾아오는 사람이 없으니까..." (p.174)


겉으로 보기에는 쾌활하고 활기가 넘쳐 보이는 캐릭터의 전형이지만, 그에게서는 쓸쓸함이 느껴진다. 대중과 현실로부터의 소외감으로 인해 그는 왠지 주눅이 들어있어 보이기까지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사비나와의 불륜 관계에서도 당당하지 못한 것은 아내에 대한 죄책감이 아니라 자기 내면에 깃든 무거움(진리 속에서 살기)에 위배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에게 진리란 사적인 것과 공적인 것 사이에 있는 장벽을 제거하는 것을 뜻했다. (p.189) 죽은 책에서 배운 진리로 인해 그는 살아있는 현실에서 괴리감을 느꼈고, 그 간극으로 인해 늘 괴로웠는데 그가 가벼운 해방감을 느끼는 때는 시위 행렬이나 음악, 그리고 사비나의 몸속으로 몰입하며 합일을 느끼는 때였다.


(to be continu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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