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2. 키치(Kitsch): 참을 수 없는 기만
총 7부로 구성된 소설의 중후반인 6부(대장정)는 느닷없이 '똥' 이야기로 시작한다. "스탈린의 아들 야코프가 2차 세계 대전 중에 영국군 장교와 함께 독일군에게 포로로 잡혔는데, 수용소에서 야코프는 변기를 항상 더러운 채로 내버려두었고, 변소를 똥투성이로 만드는 그의 행동을 훈계하는 영국군과 갈등을 방치하는 독일인 수용소 소장의 방임에 열받은 야코프가, 수용소를 둘러싼 고압 철조망으로 달려가 그대로 몸을 던져 사망했다"는 1980년 <선데이 타임즈>에 실린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렇게 시작한 '똥'에 대한 화두를 놓고 저자인 밀란 쿤데라는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무려 다섯 장에 걸쳐 피력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키치"(Kitsch)에 관한 사유라고 할 수 있다. 그는 우리에게 질문을 던지고 있다. "神(하나님, 예수님)은 똥을 싸는가?", "아담과 하와는 낙원에서 섹스를 했는가?" "독일군 수용소에서 똥을 싸다가 죽은 야코프의 죽음은 허망한 것인가? 아니면 제국 영토를 보다 동쪽으로 넓히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독일군이나 조국 세력을 보다 먼 서쪽까지 뻗어 나가게 하기 위해 죽은 러시아인들의 죽음이 더 멍청한 것인가?"
작가는 집요하게 질문을 계속 이어간다.
"우리는 왜 똥을 부정한 것으로 간주하는가?" "그래서 하나님이나 예수님이 밥을 먹고 창자로 소화를 하고 똥을 누는 행위는 신성 모독에 해당하는가?" "우리가 죽어서 천국에 가면 거기서는 똥을 누지 않고 섹스도 하지 않는 삶이 펼쳐지는가?" "이 세상에서 똥이 부정한 것이 아니라고 여기면서 화장실에서 문을 활짝 열어놓고 똥을 싸는 모습을 공개적으로 해도 된다는 것인가?" 등의 문제를 제기하는데, 이것은 성경에 나오는 '금단의 열매'인 선악과를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고, 문화 인류사에서 말하는 '터부'에 관한 논의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작가는 '똥은 악의 문제보다 더욱 골치 아픈 신학 문제'라고 얘기한다. (p. 401) 그러면서 그는 '종교적 믿음이건 정치적 믿음이건 간에 모든 유럽인들의 믿음 이면에는 창세기의 첫 번째 장이 존재하며, 이 세계는 마땅히 그래야만 한다는 모양으로 창조되어 있고, 존재는 선한 것이며 따라서 아이를 가지는 것이 좋은 것이라는 생각이 거기에서 유래했다. 이러한 근본적인 믿음을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라고 부르도록 하자'라고 전제한다. (p. 404) 이어서 그는 "그러므로 존재에 대한 확고부동한 동의가 미학적 이상으로 삼는 세계는, 똥이 부정되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각자가 처신하는 세계라는 결론이 도출된다. 이러한 미학적 이상은 키치라고 불린다."라고 결론을 짓는다. (p.405)
밀란 쿤데라에 의하면, 인간은 현실에서 도저히 받아들이고 납득하기 어려운 문제, (이를테면 똥에 관한 신학적 문제와도 같은)들을 마주치며 살아야 하는 존재이다. 도저히 그냥 넘길 수 없는 이 형이상학적 난제를 풀기 위해서 인간은 '그래야만 한다'라는 암묵적 동의가 필요하고, '마치 그런 것처럼' 처신하는 행태를 보이게 된다. 이것은 마치 싸구려 포장지와 같은 저급한 미봉책이며 현실을 부정하고 오로지 형이상학적인 관념에 집착하는 기만행위에 해당한다. 거기에 더해 이러한 키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권력자들이 선전하고 선동하여 세뇌시키는 일은, 그야말로 똥보다 더 역겹고 더러운 일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인공들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키치가 있었고, 그 앞에서 실존적인 고뇌를 하며 참을 수 없는 가벼움으로 탈출하려고 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생각해 본다.
2-1. 토마시
토마시에게 받아들일 수 없는 형이상학적 고민은 아마도 <필연 너머에 존재할지도 모르는 우연>이 아니었을까 싶다. 현대의 의사들이 얘기하길, '인체란 (오묘해서) 폐쇄적인 시스템이기도 하고, 개방적인 시스템이기도 하다'라고 말한다. 양자역학에서는 '빛은 입자이며 파동이다'라는 이론도 있다. 의사였던 토마시의 눈에 인간과 세상과 우주는 과학 법칙으로 정리하기엔 석연치 않은 '神의 영역'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이러한 무거운 고민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수술대 위와 진료실 안에서는 비록 환자들에게 신처럼 군림할 수 있었는지 몰라도, 인체 안에 100만 분의 1이란 확률로 존재하는 '자아의 특이점'을 발견하려고 여체를 탐닉했으며, 여섯 번의 우연으로 만난 테레자에게는 위계적인 연민(pity)이 아닌 동등한 의미의 동정(compassion)을 나누고자 하는 키치를 만들었다.
2-2. 테레자
그녀의 꿈속에 등장하는 무수한 여체들처럼 그녀는 자기처럼 못난 존재가 자기 어머니처럼 남자에 의해 버림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해 늘 신경이 곤두서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어머니와 달리 고등 교육을 받은 그녀는 버림받지 않기 위해 자신을 포장하는 능력이 있었다. 정조를 지키며 남자(토마시)의 외도에도 의연하게 감내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여자(의 삶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하는 것이라는 강박적인 정신 상태와 그런 태도를 지키며 다른 여자들의 삶과는 다르게 '행복한 척하며' 지내는 일, 즉 키치가 얼마나 절박하고 간절했을까를 발견할 수 있다.
2-3. 프란츠
프란츠를 짓누르는 의식은 자신이 백면서생, 즉 글만 읽고 세상일에는 경험이 없는 사람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이었다. 그가 섭렵한 책과 논문에서는 세상의 부조리한 현상을 예리하게 분석하고 명쾌하게 해답이 제시되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은 인간이 이성적인 존재라는 전제하에서 가능한 일인데 실제 세상에는 이성이 설 자리가 별로 없고 영향력도 적어 보인다. 그렇다고 이성을 떠나 폭력이나 야만적인 힘에 기대어 세상을 변혁하기에 프란츠는 너무 많이 배웠다. 그는 고상한 이론과 난잡한 일상 사이의 간극이 주는 현기증에서 벗어나기 위해 시위대 행렬 속으로의 참여와 타인과의 연대라는 키치를 만들어서 자신과 주변을 속일 수 있었다. 그는 음악에 취하듯 새로운 개혁과 혁명을 꿈꾸다가 전혀 설명할 수 없는 돌발적인 사고, 야만적인 폭력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2-4. 사비나
네 명의 주인공 가운데 오직 사비나만이 스스로 키치에 관해 자각하고 이에 대항하여 치열하게 싸웠던 인물이다. 엄격한 아버지에게서 일찍이 속물근성을 발견한 그녀는 부단하게 권위적이고도 가식적인 세태의 눈가리개 속임수와 포장으로부터 자유를 꿈꾸며 '배신'(저항)을 감행한다. 그녀의 눈에 세상은 수많은 키치(카톨릭 키치, 개신교 키치, 유대인 키치, 공산주의 키치, 파시스트 키치, 유럽 키치, 미국 키치, 민족주의 키치, 국제주의 키치...)들로 범벅이 된 무대이자 화폭이었고, 그녀는 작은 틈새 너머로 언뜻 비치는 본질적이고 거룩한 무엇인가를 갈망했다. 성속일여(聖俗一如)라는 말이 어울리는 그녀의 투쟁에서 가장 니체의 위버멘쉬적인 모습이 보이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에게서 다소 허무주의적인 결말이 느껴지는 것은 그녀가 과연 '자기 배신을 배신'하는 마지막 관문을 통과하여 '아모르 파티'에 이르렀을지는 소설 속에서 발견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는 과연 독자에게 궁극적으로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to be continu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