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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단순한 열정_아니 에르노 (문학동네, 20

책을 읽고

by 김쾌대

2022년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아니 에르노의 『단순한 열정』을 읽었다. 그녀는 '직접 체험하지 않은 허구를 쓴 적은 한 번도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자신의 작품세계를 규정하는 프랑스의 문제적 작가라고 소개되고 있었다. 1991년에 발표된 이 소설은, 연하의 외국인 유부남과 사랑에 빠졌던 그녀의 '체험'을 바탕으로 내면의 감정과 생각을 가감 없이 풀어나간 내용을 담고 있다.


그녀의 체험은 한마디로 '불륜'이었고, 이는 자칫 말초적인 감각을 자극하는 통속소설이 될 여지가 있는 소재이기도 해서 작가에게는 대중에게 자신의 은밀한 부위를 드러내는 일이 만만치는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녀는 그런 위험 부담(리스크)에 초연한 듯 담담하게, 아니 적나라하게 단정하고, 간결하고, 차가운 문장으로 독자에게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었다. 변명하지도 않고, 꾸미거나 은폐하지도 않고, 설득하지도 않고, 가치를 부여하지도 않으며 마치 외과 의사가 사고를 당해 죽은 시신을 부검하듯이 객관적으로 자기에게 닥친 사건을 기술하고 있었다. 검색을 통해 찾아보니 그녀의 문학적 기법을 '오토 픽션'(Auto Fiction)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책을 다 읽고 덮으며 "소설(문학)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

그리고 책장에 꽂혀 놓고 언젠가는 읽어야겠다고 미뤄뒀던 사르트르의 『문학이란 무엇인가』를 꺼내 들고 정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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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그 사람이 내게 남겨놓은 정액을 하루라도 더 품고 있기 위해 다음 날까지 샤워를 하지 않았다." (p.17)

"어느 날 밤, 에이즈 검사를 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이 내게 그거라도 남겨놓았는지 모르잖아.'" (p.46)

"한번은 침대에 누워 자위를 했는데, 그 사람도 내 배 위에서 같은 것을 느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p.47)


사르트르에 의하면, 작가란 언어를 기호(도구)로 사용하여 자유롭게 발언하는 사람이라고 했다. 발언에는 지시, 설명, 명령, 거절, 질문, 탄원, 모욕, 설득, 암시 등 다양한 형식과 내용이 가능한데, 작가가 말을 발화하는 이유는 결국 무엇인가를 '호소'하기 위함이라고 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는 이 작품에서 낯 뜨겁고 민망해 보이기까지 하는 대담한 '고백'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녀는 이러한 방식으로 독자들에게 무엇을 호소하려고 했을까? 나는 문득 세르비아 출신의 세계적인 행위 예술가인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를 떠올리게 되었다.


그녀가 1974년 이탈리아에서 선보인 '리듬 0'이란 퍼포먼스는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렸다. 당시 그녀는 나폴리 모라 스튜디오의 전시실에서 가만히 선 채 한 곳을 응시했고, 관객들에게 다음과 같은 안내문을 전했다. "테이블 위 72가지 물체를 원하는 대로 저에게 사용하세요. 나는 객체입니다. 프로젝트 중 일어나는 모든 일에 대한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테이블 위에는 꽃, 꿀, 빵, 향수, 와인, 매니큐어, 립스틱, 깃털, 포도알 등 소위 쾌락의 도구부터 칼, 채찍, 가위, 나무망치, 면도날, 금속 막대기, 권총과 총알 등 파괴의 도구까지 놓여있었다. 처음 몇 시간 동안 그녀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주저하던 관객들은, 어느 순간 행동으로 옮기기 시작했고 점차 과감하고 격렬하게 변한 그들은 예술가의 몸에 사디즘적인 폭력을 행사하여 그녀를 만신창이로 만들었다.

(자세한 내용은 https://www.insight.co.kr/news/478424#google_vignette 참조)


오후 8시부터 오전 2시까지 6시간이 소요된 이 퍼포먼스가 끝나고 마리아 아브라모비치는 "이 프로젝트를 통해 인간의 내재되어 있던 잔혹성을 폭로했다"라고 취지를 밝혔는데, 예술작가가 작품을 통하여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을 넘어 자기 자신을 오브제로 하여 관객들과 소통하는 방식이 파격적이었다. 그렇다면 아니 에르노는 자신의 소설에서 '인간에게 내재하는 관음증'을 폭로하기 위하여 과감한 노출의 문장을 선보였던 것일까? 물론 아니다. “그녀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무엇이었으며, 세계의 어떤 모습을 드러내려고 했고 그 드러냄을 통하여 세계에 어떤 변화를 가져오기를 바랐으며, 그녀는 왜 이 이야기보다 그 이야기를 하면서 이것이 아닌 그것을 변화시키려고 했던 것일까?” (문학이란 무엇인가 p.30~p.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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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르트르에 따르면 작가는 작품을 '창조'하지만 '완성'하지는 못한다고 했다. 즉, 작가는 자유롭게 자기의 이야기를 독자에게 호소하지만, 독자 역시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자유롭게 작품을 해석하고 의미를 부여할 때, 비로소 작품이 완성된다는 주장이다. (문학이란 무엇인가, p.57~p.93) 작품은 이제 독자인 나에게 넘어왔다. 50대 중후반을 지나는 아재에게 발표 당시 51세였던 작가가 아마도 40대에 겪었을 연애이자 불륜 사건에 대해 이해하고 공감하며 지지를 보내기에는 무리가 아닐 수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아니 에르노가 마리아 아브라모비치처럼 작품 속에 보편적이고 분명한 메시지를 담아 서술하였다면, 개인의 경험을 넘어서는 일반론에 근거하여 거기에 동의하거나 반대할 수 있었을 텐데 앞서 말했듯이 그녀는 자기 행위와 생각에 어떠한 의도나 지향하는 바를 명시하지 않고 냉정하게 객관적인 거리두기를 통해 마치 제삼자가 관찰한 다큐멘터리 기록을 정리하듯이 소설을 마감했기에 나로서는 더욱 평을 하기에 난감한 상황이 되고 말았다. 이 책은 이렇게 탑승하지는 못하고 멀리서 떠나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야간열차가 되고 마는 것일까?


이제는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고백해야 할 시간이다. 이 소설의 첫 문장에서 나오는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이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라는 문장과 같은 심정으로 지냈던 3개월 정도가 내 삶에도 있었다는 사실을. 당시에 나는 소설 속에 나오는 유부남과 같은 처지였고 상대방은 남편과 별거하고 있던 유부녀였는데, 소설을 읽어가면서 나는 오히려 남자가 아닌 여자, 아니 에르노의 심정에 완전히 빠져들어서 숨 막히듯 책을 읽어 내려갔다. 당시에 나도 별거 중이었고 내 인생에서 더는 나쁠 수 없을 정도로 극한 궁지에 몰려있을 때였다. 내겐 덫에서 빠져나가게 해 줄 지푸라기라도 필요했는데, 그때 마침 그녀가 내 삶으로 들어왔다.


그녀도 나처럼 절박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나는 떠돌이 혜성처럼 그녀의 대기권으로 무섭게 진입했는데, 자연 현상에서 그렇듯이 나도 공기의 저항을 이기지 못하고 허공에서 모두 불타고 소멸되어 사라지고 말았다. (이건 정말 문학적 표현이어서 아니 에르노의 사실적 묘사와는 다르게 잔뜩 미사여구를 동원한 비겁한 변명이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그때의 단순한 열정, 오로지 세상에 한 존재밖에는 보이지 않고 다른 모든 것이 사라지는 체험에 대한 감상이 다시 소환되는 것을 느꼈다. 이것은 사르트르가 얘기한 세상의 변화와는 거리가 멀지는 몰라도 적어도 내게는 내면의 뭔가가 움직이는 독서 경험을 맛보게 되었다는 뜻이다. 그녀의 소설은 내게 그런 의미로 다가왔다. 그리고 이제서야 정제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는 두 가지 소감을 마지막으로 전하고 싶다.


"사랑에 있어서는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이 약자다."

"나는 당시에 상대가 아니라 상대를 향한 내 열정을 사랑했었다."

p.s)

스웨덴 한림원에서 아니 에르노에게 노벨 문학상을 수여한 것은 이 한 권의 책 때문은 아니었다.

작가는 평생에 걸쳐 자전적인 소설을 쓰고 있다.

그녀는 어쩌면 요즘 회자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명제에 가장 부합하는 시대적 과제를 수행하는 작가가 아닐까 한다.

2023년에 출간된 그녀의 회고록인 『아니 에르노』에 나타난 그녀의 작가 정신을 소개하고 싶다.


P. 24

부모가 운영하는 식료품점 겸 카페라는, 전적으로 장사에 바쳐졌으며 내밀한 삶이라고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 장소에서 매일 펼쳐졌던 모습 그대로의 현실에, 그러니까 가장 노골적이며 때로는 가장 폭력적인 사회적 현실에 맞닥뜨렸던 만큼, 어린 시절과 청소년 시절 제 시선이 포착해서 차곡차곡 쌓아 뒀던 것들을 강조하려고 합니다.

P. 43~44

내부로부터의 이민자인 제가, 어떤 방식으로 글을 쓸 수 있을까요? 처음부터 저는 한쪽에 자리한 문학적 언어, 배우고 사랑했던 그 언어, 그리고 다른 한쪽에 자리한 출신 언어, 집에서 부모가 사용하는 언어, 피지배자들의 언어, 그 뒤 제가 부끄럽게 여기지만 여전히 제 안에 남아 있을 언어, 이 두 언어 사이의 긴장 속에, 심지어 찢김 속에 잡혀 있었습니다. 결국, 문제는 이거죠. 글을 쓰면서 어떻게 나의 출신 세계를 배반하지 않을 것인가?

P. 48

문학은 개인적인 것들을 비개인적 방식으로 써서 보편에 도달하려고 애쓰는, 장 폴 사르트르가 〈보편적 개별자〉라고 불렀던 것을 만들어 내려고 애쓰는 작업입니다. 오로지 이렇게 함으로써만 문학은 〈고립을 부숩니다〉. 오로지 이렇게 함으로써만 수치, 사랑의 열정, 질투, 흘러가는 시간, 가까운 친척의 죽음에 대한 경험, 이 모든 삶의 일을 나눌 수 있습니다.

P. 112

저는 제 삶을 사람들의 역사, 시대의 역사, 세계의 역사와 분리할 수 가 없었어요. 그래서 『세월』은 개인적인 동시에 비개인적인 형식을 취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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