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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내 아이는 조각난 세계를 삽니다_윤서

책을 읽고

by 김쾌대

<대안연구공동체>라는 곳이 있다. 수많은 인문학강좌들이 온오프에서 개설되는 네이버의 커뮤니티 카페이다. 나는 그곳에서 작년 4월부터 '명저읽고 글쓰기'라는 클래스에서 수강하고 있는데, 함께 배우는 동료이신 윤서 선생님께서 이번에 책을 출간하셨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아들을 지난 18년 동안 보살피며 견뎌낸 여정을 기록한 글모음인데, 읽는 내내 먹먹한 기운으로 쉽지 않게 책장을 넘겼다.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나는 문득 시(詩) 한 편이 떠올랐다.


<낙타의 길>

-임영조


​낙타가 가는 길은 늘 사막이었다

삶이란 대개 마른 모래벌판에

터벅터벅 발자국을 찍는 일

뛰어봤자 세상은 사막이었다


​간혹가다 얻는 한 무더기 가시풀

그 억세고 질긴 요행을 오래 씹었다

입안에 피가 터져 흥건하도록

반추하는 노역의 쓰라린 세월처럼

맨밥은 참 팍팍하고 지금거렸다


등짐이 무거워도 고개를 들고

평생을 앞만 보고 걸었다.

더러는, 무릎이 까지도록

설설 기면서

비단길이 어디냐고 물으면

사막의 하루는 일교차가 심했다


모래바람 뿌옇게 미친 날이면

속눈썹 긴 눈을 자주 끔벅거렸다

수상한 풍문만 천지에 분분할 뿐

온다던 주인은 나타나지 않았다


길 없는 길을 가는 낙타는

등에 진 제 육봉이 무덤이 된다

가도 가도 끝 모를 길은 사막길

그 길만이 道(도)라고 굳게 믿는

낙타는 제 무덤을 지고 다닌다

-


시인은 말한다.

낙타가 가는 길은 늘 사막이었고, 그건 길이 없는 길이라고.

장애를 지닌 자녀를 둔 가족이 걸어야 하는 길은 시작은 있지만,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이다.

뛰어봤자 세상은 그들에게 시원한 샘물이나 우거진 숲을 허락하지 않는다.

등짐이 무거워도 고개를 들고 평생 앞만 보고 걸어야 하는 숙명의 길이기도 하다.


시시때때로 몰아치는 모래바람을 막기 위해서는 속눈썹이 길어야 했다.

낙타의 속눈썹이 세상 어느 동물보다 아름다워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는 이유는,

소중한 눈동자를 보호하기 위해 오랜 시간 그렇게 진화한 까닭이다.

낙타의 눈이 소중하게 보호받아야 하는 이유를 사정 모르는 세상 사람들은

표식도 없는 사막에서 헤매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냐고 그렇게 지레짐작으로 말하지만,

사실 낙타는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아름다운 밤하늘의 별빛을 올려보며 길을 찾는다.

아름다운 하늘을 닮아서 그 눈동자는 그렇게 빛이 나는 것이고,

그 눈동자를 지키기 위해 자란 속눈썹은 그토록 숭고하고 우아하게 보이는 것이다.

조현병을 앓고 있는 소중한 아들, '나무'는 낙타의 눈동자를 닮았고,

그 자녀를 지키기 위한 저자, '윤서샘'은 의연하게 끔벅거리는 속눈썹을 닮았다.


기회가 닿아 시인을 만나게 된다면 나는 그에게 따져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낙타가 등에 지고 가는 육봉은 살아서 지고 가야 하는 무덤이 아니라고.

장애를 지닌 자녀를 둔 사람은 불운한 죽음을 메고 가야 하는 고된 자가 아니다.

사람들이 생각하듯 낙타의 혹은 거추장스러운 장애물이 아니니,

그건 그 속에 생명을 이어가게 만드는 물(水)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신기루 환상에서나 보이는 오아시스를 찾아 아스팔트에서 헤매는 사람들은 모른다.

낙타등에 걸린 무덤 아닌 요람에서 은하수보다 밝고 풍요로운 샘물이 매일 솟아난다는 것을.


보이는 것이 다는 아니라는 말이다.

거기에서 새로운 삶이, 새로운 질서가, 새로운 세계가 하루 단위로 피었다가 진다.

간혹가다 얻는 한 무더기 가시풀, 그 억세고 질긴 요행을 오래 씹듯이

어쩌다 무사하게 별다른 사고 없이 지나는 하루를 진심으로 감사하며, 되새김질하며

이렇게 안온하고 무탈한 일상이 중단없이 이어지기를 기도하며 잠자리에 든다.


이 책은 그래서 원래 있던 길을 잃고 방황하는 추방자의 넋두리나 한탄이 아니다. 없던 길을 무릎이 까지도록 설설 기며 새로운 길을 만들어 가는 순례자의 고백이다. 사막을 횡단하는 낙타에게 기적이란, 어느 결엔가 옆에서 함께 걷는 다른 동행자를 만나서 함께 마주 보며 인사를 나누는 일이다. 저자인 윤서샘과 연대하여 그 위대한 여정을 함께 할 사람이 되고 싶게 만들어 주었다. 폭력으로 박살이 난 세상에서 산산조각이 난 마음을 추스르며 하루를 보내곤 하던 나에게 이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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