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작년 4월에 읽은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 이어 두 번째로 만나는 클레어 키건이었다. 이 소설의 원작은 2010년에 세상에 발표되었으니, 앞서 말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보다 11년 전에 출판된 셈이다. 초기 그녀의 작품 세계를 엿볼 수 있어서 반가웠고, 동시에 섬뜩했다. 모두 네 번을 읽은 뒤에 내가 조심스럽게 추측한 내용이, 출판사에서 홍보하는 "목가적 풍경 속 어느 소녀의 찬란한 여름"과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아름답고 훈훈한 소녀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 뒤에 작가가 숨겨 놓은 의미심장한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양동이를 들어 올리려고 남은 한 손을 마저 뻗었을 때 내 손과 똑같은 손이 물에서 불쑥 나오는 듯하더니 나를 물속으로 끌어당긴다." (86쪽)
서평을 쓰기 위해 두 번째 정독을 마친 후 내 머릿속에서 의혹이 하나 떠올랐고,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았다. 소녀가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편지를 받은 날(목요일)에 우물가에 혼자 갔다가 빠져버린 사건인데, '과연 실수로 그랬을까'라는 생각이었다. 발이 미끄러지거나 그런 식의 설명이 아니라 물속에서 자기 손과 똑같은 손이 불쑥 올라와 끌어당겼다는 묘사는 둘 중의 하나일 가능성이 크다. 물귀신의 환영을 봤거나 혹은 자살하기 위해 빠졌다는 사실을 에둘러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나는 두 번째 가능성에 더 심중을 굳히게 되었다. 소녀는 어째서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 앞에서 죽음까지 불사하게 되었을까? 단순히 행복했던 시간을 뒤로 하고 다시 불행한 현실 세계로 귀환해야 한다는 부담이나 거부감만으로 극단적인 선택을 시도했다는 추론은 뭔가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대체 무엇이 소녀에게 귀가하는 일이 죽음보다 끔찍한 상황이라고 여기게 만든 것일까? 다시 책을 살펴본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길쭉하고 반짝이는 유리창이 우리의 도착을 비춘다. 뒷자리에 앉은 내 모습은 머리가 온통 헝클어져서 집시 아이처럼 지저분하지만, 운전에 앉은 아빠는 그냥 우리 아빠 같다." (12쪽)
"오늘 아침 내 두피에 닿았던 쇠 빗살, 머리를 촘촘하게 땋던 엄마의 손힘, 내 등에 단단하게 닿았던 아기를 품은 엄마의 배가 다시 느껴진다." (15쪽)
소녀가 처음 킨셀라 부부네 집에 도착하던 날을 묘사한 장면들이다. 그날 아침 소녀의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딸의 머리를 땋아주었다. 아빠가 운전하는 차에 올라타고 이동하여 새로운 거처에 도착하여 내리는 소녀의 머리는 온통 헝클어져 있다고 나와 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중간에 벌어졌기에 그랬을까, 고민 끝에 나는 매우 좋지 않은 사건을 떠올리게 되었다. 그런 의혹이 한 번 일어나자 다시 읽어 가는 책의 중간중간에서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냥 넘어갔던 몇몇 문장들이 크게 돋을새김으로 다가온다.
"비밀이 있는 곳에는 부끄러운 일이 있는 거야." 아주머니가 말한다. "우린 부끄러운 일 같은 거 없어도 돼." "알겠어요." 나는 [울지 않으려고 심호흡을 한다.] (27쪽)
"물은 정말 시원하고 깨끗하다. 아빠가 [떠난] 맛, 아빠가 [온 적도 없는] 맛, 아빠가 가고 [아무것도 남지 않는] 맛이다." (30쪽)
"나는 새로운 곳에서 뜨거우면서도 차가운, 겪어본 적 [있는] 기분을 느끼며 잠을 깬다." (35쪽)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이 [편안함이 끝나기를]ㅡ 축축한 침대에서 잠을 깨거나 무슨 실수를, 엄청난 잘못을 저지르거나 뭔가를 깨뜨리기를ㅡ 계속 기다리지만...(후략)" (45쪽)
"집에 가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차라리 빨리 가고 싶다. 얼른 [끝내고] 싶다." (81쪽)
"언니들은 조금 달라진 것 같다. 더 [마른 것 같고 더 말이 없다.]" (91쪽)
아빠와 딸 사이에 벌어지는, 절대로 누군가에게 말하면 안 되는 부끄러운 일을 엄마는 알고 있었을까? 그녀는 딸이 돌아와서 뭔가 태도와 분위기가 바뀌어 있음을 눈치챈다.
"좀 컸구나." 엄마가 말한다. "네." 내가 말한다. "'네'라고 했니?" 엄마가 말하고는 눈썹을 치켜올린다. (90쪽)
"엄마가 킨셀라 아저씨를 앞에 둔 채 그러는 아기에게 젖을 먹이려고 가슴을 드러내는) 것을 보고 나는 얼굴을 붉힌다. 내 얼굴이 빨개지자 엄마가 나를 한참 동안 [의미심장하게] 바라본다." (91~92쪽)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차가 떠나고 나서 엄마가 말한다. "아무 일도 아니에요." 내가 말한다. "말해." "아무 일도 없었어요." 다른 사람도 아닌 엄마가 묻고 있지만 나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절대 말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 만큼 충분히 배웠고, 충분히 자랐다. 입을 다물기 딱 좋은 기회다. (96쪽)
엄마는 예전에 집에서 함께 있을 때, 어쩌면 딸아이가 털어놓은 말 못 할 고민들을 들으면서도 짐짓 모른 척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이제 소녀는 엄마에게 자기가 킨셀라 부부에게서 받아서 느꼈던 진정한 부모의 사랑이 무엇인지를 털어놓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알 만큼 자랐다. 엄마는 절대로 자기에게 도움이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소설은 마지막에 두 번이나 "아빠"라는 단어를 소녀의 입 밖으로 끄집어내며 결말을 맞는다.
"아빠." 내가 그에게 [경고]한다. 그를 [부른다]. "아빠."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이렇게 해석했었다.
"아빠가 저기 다가오고 있어요" 나는 킨셀라 아저씨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아저씨를 부른다. "아빠."
몇 번을 더 읽고 나는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아빠, 이제 더 이상은 나를 건드리지 말아요." 나는 친아빠에게 경고한다. 그리고 아저씨를 부른다. "당신이 진정한 아빠예요."
덧)
이번에 내친김에 클레어 키건이 2007년에 발표한 단편집, <푸른 들판을 걷다>도 읽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이 소설집 중에서 첫 번째 작품인 '작별 선물'에서 친부에게 지속적으로 성적 학대를 당하던 여자 주인공이 미국으로 입양되어 떠나는 이야기가 나온다. 클레어 키건은 자신의 초기 작품들에서 어쩌면 자신이 자란 환경에 근거하여 독선적인 부모와 그들이 자녀에게 가하는 해악을 섬세하게 묘사하며 '가족이 끔찍한 곳이 될 수 있다'라는 메시지를 강하게 피력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후 11년이 지나서 발표한 <이처럼 사소한 것들>에서 사회구조적인 부조리를, 그리고 2023년에 발표한 <너무 늦은 시간>에서는 중년의 남자인 주인공을 통해 인간의 보편적인 감정인 사랑과 이별, 그리고 고독과 상실감을 그려내면서 작가적 관점과 주제가 보다 보편적으로 확장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는 점이 흥미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