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독후감상

[독후감상] 돌의 연대기_이스마일 카다레 (문학동네,

책을 읽고

by 김쾌대

0. 들어가며


작가는 개인의 서사를 넘어서 시대의 역사를 이야기할 때가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인 1940년을 전후하여 알바니아의 남부 도시인 지로카스트로에서 벌어진 상황을 한 아이의 눈과 입을 빌어 전한 작가가 있다. 그의 이름은 이스마일 카다레이다. 1971년에 초판이 출간되고 2015년에 한국에도 소개된 소설인 <돌의 연대기>를 통해 국내 독자들과 만난 그는, 독재 정권 아래 놓여 있던 조국인 알바니아에서 몇몇 작품이 출간 금지라는 수난을 겪기도 했지만 그럼에도 전제주의와 독재 체제를 고발하는 날카로운 시선으로 특유의 풍자와 유머로 우스꽝스러운 비극, 기괴한 웃음을 만들어내며 세계적인 작가로 입지를 굳힌 작가라고 한다. 그가 <돌의 연대기>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는 무엇이었을까?


1. 점령당하는 수난의 역사, 알바니아


이번에 책을 읽으면서 그동안 귀로만 들어서 알고 있었던 '알바니아'라는 나라의 위치를 검색해서 찾아보았다. 유럽 남동부의 발칸반도 서부에 있으며 남쪽과 남동쪽으로 그리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고 서쪽으로는 이탈리아와도 가까이 있어서 소설 속 점령군(이탈리아군, 그리스군)의 실체를 확연히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강대국의 틈새에서 무수히 많은 외세의 침략을 당했던 한반도의 역사와 오버랩되면서 나는 알바니아가 겪었을 그 수난의 궤적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소설에서 소년이 살고 있는 지로카스트로는 이탈리아와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교차 점령을 당하다가 후반부에서는 독일군에 의해 점령당하고야 만다.


"수백 년 세월을 지나오며 지도에서 로마, 노르망디, 비잔틴, 터키, 그리스, 이탈리아 사람들의 소유지로 표기되었던 이 도시는 그날 어둑해질 무렵 땅거미가 지는 모습을 지켜보며 독일 제국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도시는 지치고 충격에 얼얼해져 이제 어떤 생명의 기미도 내비치지 않았다." (374쪽)


소년은 자기 고향을 일컬어 돌로 만들어진 도시라고 칭한다. 산허리에 놓여 경사가 심하게 져서 한 집의 용마루가 다른 집 들보에 닿아 있고, 길 한쪽으로 미끄러지면 어느 집 지붕 위로 떨어질 수도 있는 세상에서 가장 기이하고 독특한 도시, 마치 꿈의 왕국이라고도 불릴 것 같은 돌덩이들의 무덤과도 같은 도시. 그곳에서 소년은 따뜻한 봄이 땅에서 솟아나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서 떨어진다고 표현했다. 미래에 대한 희망도 아마 하늘이 보우하사 길이 보전할 무엇이었을 텐데, 비극적이게도 하늘에서는 비와 꽃과 무지개 대신에 폭탄이 떨어지고 있었다.


"우리 도시에서는 봄이 돌의 지배를 받는 땅을 통해 오지 않았다. 돌은 계절의 차이를 몰랐으니까. 봄은 하늘에서 왔다. 구름이 얇아지고 새들이 나타나고 드문드문 무지개가 뜨면 사람들은 봄이 왔음을 알았다." (260쪽)


2. 전쟁 중에 피어나는 순진무구한 상상력


전쟁이 일어나면 가장 큰 피해자는 여성과 노약자들이다. <돌의 연대기>에도 마을의 노인들과 여자들이 많이 등장한다. 그렇지만 작가는 소설에서 어린아이를 화자로 삼아 독자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준다. 우리는 현재에도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전쟁 속에 나오는 아이들을 접한다. 그 아이들의 모습은 처참하고 아비규환이란 말이 저절로 떠오른다. 날카로운 비명과 가슴을 찢는 울음과 퀭한 눈빛이 전쟁을 지나는 아이들이 전하는 모습이다. 그런데 <돌의 연대기>에 나오는 소년은 천진난만하기만 하다. 동네 형이 전해준 소설 <맥베스>를 읽고 난 후, 아이는 언어적 상상력의 세계에 빠지게 되었고 그런 문학적 감성이 피어나면서 사물과 사건을 다르게 받아들인다고 소설에는 나온다.


"도무지 잠이 오지 않았다. 책이 손 닿는 곳에 있었다. 침묵을 지키며, 긴 의자 위에. 어찌 보면 하찮은. 기이한 대상…. 두꺼운 두 종잇장 사이에 수많은 소리와 문, 함성, 말, 사람이 갇혀 있었다. 서로 아주 가까이 밀착되고, 검고 작은 기호들로 해체된 상태로. 머리카락, 눈, 다리, 손, 손톱, 턱수염, 벽, 피, 문 두드리는 소리와 말발굽 소리, 함성, 목소리. 이 모두가 고분고분했다. 검고 작은 기호들에 맹목적으로 복종했다. 여기저기서 글자들이 아찔할 만큼 빠른 속도로 달린다. 자음도 달리고 모음도 달린다. 그것들이 모여 말이 되거나 우박이 된다. 글자들이 다시 달린다. 단검이 만들어지고 밤이 닥치고 살인이 저질러진다. 연이어 도로가 나타나고 문들이 덜컹대고 정적이 찾아든다. 달리고 달리고 또 달린다. 끝도 없이. (91쪽)"


카메라에 마치 색다른 필터를 이용해서 세상을 포착하는 것과 같이, 어른들은 미처 생각하지도 못할 서술들이 소설의 초반부터 중반까지 계속해서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묘사들을 읽으면서 독자들은 잠시 전쟁이라는 참상에서 벗어나 입가에 미소를 짓게 된다. 유명한 이탈리아 영화인 <인생은 아름다워>에서 유대인 수용소에 끔찍한 현실을 숨기기 위해 아들 ‘조슈아에게 게임을 하는 것이라고 속였던 아빠인 ’귀도‘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이 가슴 속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면, <돌의 연대기>에서 소년이 펼치는 상상의 나래를 타고 독자들은 가슴 저릿한 미소를 짓게 된다. 작가를 '우스꽝스러운 비극'의 창작자라고 평가를 하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그만큼 이스마일 카데라의 문체는 참으로 독창적이고 인상 깊은 면이 강하다.


3. 외부인의 침략보다 더 무서운 동족 간 계급투쟁


소설의 후반부에는 소년의 나레이션은 거의 없고 다소 심각하고 어른스러운(?) 묘사들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탈리아와 그리스의 군인들이 모두 철수하고 시청에 방화가 일어나서 부동산 등기증서가 파손되고 마을에는 유격대원들이 등장한다.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유격대원들이 전쟁 기간 중에 적에게 동조한 반역자를 처단하고 새로운 계급이 주인이 되는 혁명을 꿈꾸는 모습들이 그대로 나온다. 우리나라에서도 전쟁 직후에 빨치산이 등장한 역사적 사건이 있어서 당시 지로카스트로에 어떤 광풍이 불었을지를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소설 속 젊은 청년들은 서슴없이 지배자의 사령관을 총으로 처단하기도 하고, 심지어는 작은아버지의 입에 총구를 들이박고는 방아쇠를 당기기도 한다. 그동안 소설에서는 영국군의 공습이나 방공호 피신 등이 나오면서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내용이 간단한 신문 기사 형태의 연대기 정도로 간단하게 서술되었지만, 후반부에서는 구체적인 사건과 인물들이 비교적 자세하게 나온다. 작가는 어쩌면 외부의 총칼이나 대포와 비행기의 폭탄보다 더 처참한 실상이 동족 간의 살육이라고 전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이제 사람들이 새로운 유형의 전쟁을 치르고 있는 것 같네그려. 그 뭐라더라, 계급투쟁이든가 계급 간 투쟁이라든가. 어쨌거나 전쟁은 전쟁이지, 셀피제. 그런데 다른 전쟁하고는 달라. 형제가 서로 죽이고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다니까. 그것도 집세 밥을 먹다가, 잠시 제 아버지를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더는 아버지로 여길 수 없다고 말하고는 아버지 머리에 총알을 박아 넣는다나." (309쪽)


독일군대가 국경을 넘으면서 마을 사람들은 고향을 등지고 다시 피란길에 오른다. 소설에서는 이번 피난이 역사적으로 세 번째인데, 첫 번째는 '천 년 전 흑사병이 창궐해 주민들이 도시를 떠났을 때이고, 두 번째는 사백 년 전 터키 왕실 군대가 이슬람의 기치 아래 국경을 넘었을 때였다'라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하루가 지나서 마을 사람들은 다시 독일군에 의해 만신창이가 된 도시로 돌아왔고, 거기서 길거리에 널린 주민들의 주검을 목격하게 된다. 친하게 지냈던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런 비참한 광경을 보여준 뒤, 작가는 책의 마지막에 "삶의 부드러운 과육이 단단한 돌 껍데기 속을 다시 채우고 있었다."라며 끝을 맺는다. 그가 말한 '삶의 부드러운 과육'이란 무엇이었을까?


4. 나가며


소설이 끝나고 그는 에필로그처럼 훗날(1970년)에 자기 고향을 다시 방문했다는 기록을 남겼다. 당시 그의 나이는 35세. 거기서 그는 과거 어린 시절 겪었던 시절의 추억을 다시 한번 떠올리며 이제는 죽고 없는 고향 사람들을 생각한다. 역사는 돌처럼 차갑고 무심하게 우리 앞에 버티고 있지만, 그 속에서 함께 부대끼며 희로애락을 나누고 생사를 넘나들던 사람들과 그들을 향한 꺼지지 않는 뜨거운 사랑이야말로 삶의 부드러운 과육이 아니겠냐는 메시지가 큰 울림으로 마음에 남았다. 나는 책을 덮으며 잠시 무섭고 끔찍한 하루하루를 넘기고 있을 우크라이나와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아이들을 떠올리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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