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고
0. 들어가며
백 년도 넘은 근현대 한국문학 생태계에는 역사를 거치며 많은 뿌리를 지닌 개체군이 자리를 잡고 있다. 일제 강점기에 태동한 낭만주의, 사실주의, 순수 문학, 모더니즘, 프로문학을 거쳐 해방 이후의 실존주의 및 산업화 시대의 민중 문학과 참여 문학이 있었고 현대로 넘어와서는 리얼리즘 문학과 인터넷과 디지털 미디어를 발판으로 삼아 성장하고 있는 장르 문학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다양한 스펙트럼을 지닌 모습으로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한 권의 책을 소개하는데 왜 이렇게 긴 서두가 필요한가? 국내에서 장르 문학에 속하는 SF 소설을 쓰고 있는 김초엽이란 작가가 처한 상황은 그녀에게 우호적이지만은 않아 보이기 때문이다. 기성 독자들에게 장르 문학이란 예전의 로맨스 소설이나 무협지나 추리 소설처럼 깊이는 없고 단지 시간을 죽이는 킬링타임용 읽을거리에 불과하다는 인식이 은연중에 퍼져있기 때문이다. Fine Art라는 용어를 '순수' 예술이라고 번역하는 오류를 범하는 바람에, 순수 예술에 속하는 순 문학에 대비되는 장르 문학은 순수하지 않은 문학으로 대비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예전에는 순수 문학과 참여 문학의 대립이 있었다) 특히 SF(Science Fiction) 소설은 다시 한번 번역의 오류인 '공상과학소설'이라고 알려지는 바람에, 무협 소설만큼이나 허황되고 유아적인 사고의 결과물이란 선입견도 떠안게 되고 말았다. 리얼리즘이 득세하는 곳에서는 상상력이 뻗어나갈 여지가 별로 없어 보인다.
아무튼 김초엽 작가의 처녀작인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은 어떤 작품인가?
모두 7편의 단편을 묶어서 만든 소설집이다. 하나씩 살펴보기로 하자.
1. 순례자들은 왜 돌아오지 않는가
어느 행성이 있다. 그곳에서는 결함이 있는 사람도 누구에게서든 차별을 당하지 않고 행복한 느낌을 지니며 살아가는데, 어느 천재적인 생물학자에 의해 유전자 설계를 통해 인공 배양으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유토피아와도 같은 곳이다. 거기 아이들은 성년을 맞이하여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천재 학자가 왔던 '시초지 始初地'인 지구로 일 년 동안 순례의 길을 떠난다. 그곳에서 보고 느끼고 알게 된 경험을 바탕으로 순례자들은 행성으로 귀환할 수도 있고 남을 수도 있다. 각자의 선택이 보장되는 것이다. 작가는 이런 설정을 통해 시초지에서 첨단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부유층과 그렇지 못한 빈곤층이 발생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독자에게 묻는다. '당신은 불완전해 보이는 위험천만한 사랑이나 신념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걸 극복할 수 있는 희망을 발견할 수 있는가'라고. 소설 속에서 순례자들의 일부는 다시 유토피아로 귀환하는 대신, 시초지에 남는 이유가 그 물음에 답하는 행위가 된다.
2. 스펙트럼
우주 탐사를 하던 '희진'이라는 과학자가 불의의 사고로 이름 모를 행성에 떨어진다. 그곳에서는 놀랍게도 생명체가 살고 있었고, 그곳에서 '루이'라고 하는 외계인에 의해 보살핌을 받는다. 지구를 닮은 그곳에서 무리는 채집이나 사냥을 하고 천적들에 의해 공격도 받는데, 인간과 다른 언어를 사용해서 소통하는 바람에 희진은 그들과 대화를 나눌 수 없다. 그들은 빛의 스펙트럼을 감지하여 이를 색으로 표현하며 의사소통을 한다. 고장이 난 탐사선을 발견한 희진은 다시 우주로 날아가 표류하다가 마침내 지구로 돌아오는데, 인류는 최초로 외계인과 조우한 그녀를 처음에는 환영하지만 별다른 정보를 얻지 못하게 되자 이내 그녀에게서 등을 돌리고 만다. 이 작품에서 나는 언어를 뛰어넘는 진정한 의사소통에 관하여, 그리고 환대한다는 것의 의미가 무엇인가에 대하여 생각해 보게 되었다.
3. 공생 가설
어느 날 그림을 그리는데 천재적인 재능을 지닌 여자아이가 나타난다. 그 아이가 그린 그림을 보면서 사람들은 모두 애틋한 향수 같은 감상을 느끼게 되는데, 아이는 그저 자기가 본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이라고 대답한다. 지구에서는 도저히 발견할 수 없어 보이는 풍경들은 사실 어느 순간 멸망해 버린 먼 우주 행성의 모습이었다. 그녀의 뇌 속에는 미립자로 흩어져 우주를 표류하던 행성인들이 지구에 도착하여 신생아들의 머릿속에 바이러스처럼 기생하며 발견되지는 않지만 실재하는 존재로 수만 년을 지내 온 것이었다. 신생아들에게 그들이 누렸던 높은 수준의 윤리나 도덕 같은 개념을 학습시키던 그들은 아이들이 일곱 살 무렵이 되면 숙주의 기억을 가지고 어디론가 떠난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에서는 잊혀진 유토피아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상실하며 살아가고 있나?' 그리고 '인간과 인간이 서로 상생하며 지낼 수 있는 소통의 실마리는 무엇인가?' 등에 관한 철학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4.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먼 훗날 우주 개발을 위한 혁신적인 과학 기술의 발전으로 인류는 외계 행성으로 여행이나 이주가 가능하게 되었는데, 시간이 걸리는 우주여행 중에 필수적인 기술인 '냉동 수면 기술'(딥프리징) 개발자인 '안나'는 사랑하는 가족들이 새 행성으로 이주하는 날, 중요한 프레젠테이션으로 함께 가지 못하고 이후 급속한 항법 기술 개발로 인해 다시는 가족들에게 갈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리고 만다. 자신이 개발한 딥프리징 물질로 수명을 연장하며 폐쇄된 우주정거장에서 백 년도 넘게 오지 않을 우주선을 기다리던 그녀는 그녀를 강제로 소환하기 위해 찾아온 관리국 직원을 뒤로한 채 유유히 고물과도 같은 개인 셔틀을 타고 망망대해와도 같은 우주 공간으로 가족을 찾아가는 항해를 떠난다. 표제작이기도 한 이 단편을 읽으면서 우리는 '죽음과도 같은 절망을 견딜 수 있는 희망'에 관하여 그리고 '죽음을 이긴다는 것이 인간의 수명이 늘어난다는 뜻인가?'에 관하여 곰곰이 생각해 보게 된다.
5. 감정의 물성
소설 속에서 인간의 감정은 돌과 같은 물질로 가공되어 사고 팔린다. 일상에서 감정을 느끼고 싶은 사람들은 기쁨이나 희망이나 혹은 설렘 같은 감정을 구매해서 손에 잡거나 향기를 맡으며 원하는 감정에 사로잡힐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두려움이나 분노, 또는 슬픔과 우울 같은 부정적인 감정도 인기 상품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내가 나의 감정을 지배하고 사는지, 혹은 감정에 지배당하고 살고 있는지에 대하여 생각하게 되었고, 문득 예전에 분노조절장애에 근접했던 기억이 의식 위로 떠 오르는 것을 느꼈다.
6. 관내분실
기억이 저장된 도서관이 소설에 나온다. 미래에는 사람이 죽더라도 그의 뇌에서 뉴런 시냅스를 완전히 스캔하여 복원한 뒤 재생할 수 있는 시대가 온다는 설정이다. 등장인물로는 한 가족이 나오는데, 이미 죽어 기억 도서관에 안치된 엄마(김은하)와 남편, 그리고 화자인 딸과 남동생이 나온다. 엄마는 살아생전에 남편과 자녀들과 좋은 관계를 만들지 못했다. 그건 그녀가 자기를 희생하며 자기 이름(삶)을 잃어버린 인생을 살았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다. 갑작스러운 임신으로 심경의 변화를 맞은 딸은 죽은 엄마의 기억을 찾아 도서관을 찾았지만, 엄마의 기억 데이터는 인덱스가 지워졌기 때문에 검색이 되지 않아 만날 길이 없어진다. 엄마의 기억 데이터를 찾을 수 있는 방법은 그녀가 살아 있을 때 오직 그녀만이 경험한 잊지 못할 사건의 단서를 제공하여 뉴런 시냅스가 반응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 소설은 독자들에게 '죽음을 초월하여 불멸을 이룰 수 있을까?'라든가 '삶에서 <나> 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등에 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7. 나의 우주 영웅에 관하여
우주 탐사를 위한 특수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인류를 대표한 사람들이 선발되어 극강의 훈련을 받는다. 각종 첨단 기술과 특수 물질로 신체를 완전히 개조한 일종의 휴머노이드를 만들어서 새로 발견된 터널을 통과시키도록 하는 미션이다. 터널 너머에는 또 다른 우주가 있기에 인류는 마치 콜럼버스가 신대륙을 발견하는 것과도 같은 희망으로 선발 요원들의 훈련 과정과 우주선 발사 과정을 지켜본다. 주인공인 '가윤'은 대표로 선발되지만, 이모와도 같은 '재경' 때문에 자칫 탈락하는 위기를 맞는다. 재경은 이미 예전에 선발된 요원이었지만, 마지막 날 우주선에 오르지 않고 깊은 심해로 도망쳐 버린 전력이 있기 때문이었다. 가윤은 관계자들의 의심에 맞서 당당하게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결격 사유가 없음을 증명한 뒤 마침내 터널을 지나 우주 너머에 도착하는 최초의 인간이 된다. 재경 이모는 훈련 당시 혹독하게 빗발치는 여론, 즉 여성이자 아시아인이라는 비난에 맞서 자기만의 방식으로 존재를 증명했다면, 가윤은 재경 이모가 말했던 '사실 별것 없어 보이는' 우주 너머 지점에 도착하여 자기만의 방식으로 자기 존재를 증명해 낸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실패와 성공이란 무엇인가?'와 '편견에 맞서는 자기만의 방법이 있는가?' 등에 관하여 생각해 보았고, 별것 없는 이 지구(혹은 우주)에서 우리는 어째서 그렇게 자기가 특별한 존재라고 여기며 지내는가에 관해서도 돌아보게 되었다.
00. 나가며
일곱 편의 단편을 모두 읽고 나는 김초엽 작가가 시종일관 전편을 통해 얘기하는 주제가 바로 '자아 정체성'과 '소통과 관계'라는 것을 발견했다. 등단하고 출간할 당시 그녀의 나이가 이십 대 중반이었을 텐데, 그렇게 어린 나이에 깊은 철학적인 질문을 가지고 씨름했을 그녀가 새삼스럽게 보였다. 처음에는 포스텍에서 학사와 석사 학위를 받은 그녀의 지성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했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실은 십 대 후반에 3급 청각 장애로 판정받았다고 한다. 일상생활에서 보청기의 도움 없이는 정상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 없는 작가의 처지를 알게 되니, 그녀가 왜 그토록 위의 두 가지 주제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는지를 어렴풋이나마 깨닫게 되었다. 그녀는 공상하지 않았고 대신에 철저하게 사유하며 자신만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작품 세계를 개척해 왔던 것이다. 그 지난한 여정은 인류가 미지의 우주를 탐험하는 일 못지않게 위대한 일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뜨거운 마음으로 김초엽 작가의 문학적 행보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