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와 몰입

by 쿠쿠

금년은 어찌어찌 버텨서 연말까지 왔는데 내년엔 무얼 해야 하나 약간 걱정이 된다. 은퇴 후 일이 없어지거나 줄어들게 되고 자연히 시간이 많아지면서 겪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세상은 냉정하여 내가 로키(low key)로 임하지 않는 한 퇴직자에게 일이 주어지지는 않는다. 일이나 소득이 절실하다면 모를까 자존심을 굽히면서까지 일을 구해야 하는지 의문이 든다.

은퇴 후 많아진 시간을 여러 가지 취미로 채울 수 있다. 이에 관해서는 이전 글에서 여러 번 거론하였기에 더 말하지 않는다. 나 역시 은퇴 전부터 수년이 지난 지금에 이르기까지 정말이지 많은 것을 해봤고 하는 중이다. 어찌 보면 가용시간이 늘어나는 데서 오는 공허함, 상실감을 채우기 위해 별짓을 다해봤다고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취미나 도전, 다 좋은데 문제는 이들이 모두 또는 항상 만족을 주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처음에 재미있고 신선하다가 조금 지나 별로가 되고 잘 안하게 되는 일이 자주 있다. 내 경우 줄잡아 10가지 정도는 해본 것 같다. 이중에서 계속 하는 것은 일부뿐이다. 왜 그럴까? 몰입을 하느냐 마느냐에 달려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좀 재미있다고 하여 몰입을 하는 것은 아니고 하다보면 무언가 2% 부족하다는 느낌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새로운 취미나 도전의 대안 중에서 충분한 몰입에 이르는 것은 극히 일부라고 보아야 한다. 그게 취향의 탓일 수도 있고 가치관과 연결되었을 수도 있다. 이른바 본인과 궁합이 잘 맞는 활동과 그렇지 않은 활동이 구분된다고 할 수 있다.

내가 해본 또는 하고 있는 10개의 아이템과 진전 상황을 보면 다음과 같다. 하모니카를 독학하려고 하모니카와 교습본을 사서 몇 달 해봤는데 약간의 재미가 있지만 별로 몰입이 되지는 않았다. 현재는 거의 그만둔 상황이다(B-등급). 유튜브의 신세계에 푹 빠져서 한동안 맹렬히 보았는데 꽤 재미있지만 왠지 공허함이 든다. 주로 여행, 음악, 영화, 역사, 다큐 등 주제를 찾아다니다보면 몇 시간이 훌쩍 지나는데 이후 내가 별로 한 것이 없는 듯한 느낌이 든다(B+등급). 틈틈이 해외 친구들과 SNS도 하는데 이 역시 거의 마찬가지이다(B+등급).

몰입하려면 시험을 치러야 할 것 같아 어떤 자격시험에 도전하기로 하였다. 교재도 사고 인강 등록도 하고 공부를 해봤는데 안하던 분야라서 잘 진척이 되지 않는다. 합격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기도 하다. 다시 시작할 것 같지만 지금은 소강상태이다(B+등급). 드론이 재미있어서 장비도 사고 연습을 많이 했는데 도무지 실력이 늘지 않는다. 드론을 어딘가 치워놓은 상황이다(B-등급). 자전거를 타면 좋을 것 같아 접이식의 경량소재 자전거를 샀다. 처음 며칠 해보다가 요즘은 잘 안하게 된다(B-등급).

브런치 사이트에 여러 번 쓴 얘기인데 책읽기와 글쓰기는 매우 좋은 취미이고 바람직한 활동이라서 꾸준히 하고 있다. 책읽기는 인문분야의 고전이나 명저를 많이 읽게 되고 글쓰기는 주로 일상에서의 생각을 수필이나 산문 형식으로 자주 쓰고 있다. 매우 좋은 대안이고 열심히 하는 편이며 몰입도 되는데 문제가 하나 있다. 하고 나서 보람을 많이 찾지 못한다는 점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봤는데 이게 나의 본업은 아니고 부업에 해당한다는 느낌 때문이 아닌가 추측을 하고 있다(둘 다 A0등급).

이미 오래 전에 시작한 카메라, 한동안 안했고 못했는데 퇴임 후 다시 시작하여 재미를 되찾고 있다. 카메라 자체의 공부도 좋은데 출사를 하려면 꽤 준비가 필요하다. 그래도 사진 찍으려 나가거나 찍은 사진 편집할 때는 가슴이 콩당콩당 뛴다. 그만큼 좋다는 이야기고 상당히 몰입이 되는 활동이자 나의 변하지 않는 취미라고 할 수 있다(A+등급).

글쓰기의 일환인데 미세하게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공분야의 책집필을 작년에 한 편 마쳤고 최근 또 한 편 준비하기 시작했다. 인문이나 일상의 글쓰기와 달리 내 전공에 관한 것이고 상당한 깊이가 있어서 몰입하는 데는 그만이다.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아이디어를 메모하는 일이 자주 있는데 그만큼 만족하고 몰입한다는 뜻이리라(A+등급). 이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B-등급: 드론, 자전거, 하모니카

·B+등급: 유튜브, SNS, 자격시험

·A0등급: 책읽기, 글쓰기

·A+등급: 카메라, 책집필

사실 이런 얘기는 남이 읽어서 별로 공감이 안 될 테고 내가 나에게 주지시키는 성격이라서 글로 올리는 게 약간 어색하기도 하다. 그럼에도 굳이 이런 얘기를 쓰고 사이트에 올리는 이유는 이 참에 생각을 정리하자는 의도가 있었고 혹시 누군가 공감하는 사람이 한두 명이라도 있지 않을까 해서이다. 취미로는 부족하고 몰입을 해야만 마음이 안정되고 비로소 보람이 생긴다는 평범한 깨달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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