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커버 이미지 : 성당 내부 정면
성당 내부는 원래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되어 있었지만 지금은 1754년도에 화려한 벽과 기둥들이 들어간 바로크 양식으로 덧입혀진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바닥은 다양한 색의 대리석으로 장식한 13세기 때 스콜라 칸토룸 자리의 코스마테스코 양식을 아직도 볼 수 있고 천장은 1577년 파르네제 가문에서 만든 나무 격자로 되어있습니다. 그리고 이 천장에는 수도원의 문장이 들어가 있습니다.
가운데 어미소의 젖을 물고 있는 송아지의 모습은 이곳의 수도자들이 예수님 대하는 것처럼 찾아오는 사람들을 극진하게 맞이한다는 뜻이고 그 위에 있는 정교회 주교의 모자와 지팡이 그리고 로마교회 주교의 모자와 지팡이는 두 교회 안에 동시에 속해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정교회 신자들이 하느님을 공경하는 최고의 자세는 말하는 것이 아니라 서서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본당 안에 원래 신자들이 앉는 의자를 놓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성당은 로마 교회에 맞게 이코노스타시 가까이에는 수도자들이 기도하는 자리인 가대가 있고 그 바깥으로 신자들이 앉는 의자가 있습니다.
성당 안에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정교회 성당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 거룩한 장소와 신자들의 장소를 구분하고 있는 이코노스타시 (Iconostasi)입니다. 이 거룩한 장소에는 성체가 모셔져 있고 가톨릭 교회의 미사에 해당하는 신성한 전례 (Divina Liturgia)가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전례 중에만 열리는 세 개의 문이 있습니다. ‘임금의 문’이라 불리는 중앙 문은 주례 사제가 사용하며 성찬의 전례 때는 커튼으로 이 문을 가립니다. 양옆의 문은 ‘천사의 문’이라 부르며 미카엘 대천사와 가브리엘 천사의 이콘이 있고, 주례 사제를 돕는 사람들이 사용을 합니다. 그리고 이코노스타시 가운데 문 왼쪽에는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오른쪽에는 그리스도의 이콘이 들어가 있습니다
이코노스타시 양옆 두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아치 형태를 승리의 아치라고 부르고, 거룩한 장소를 뜻하는 하늘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승리의 아치라는 이름은 세상을 이기고 승리한 사람만이 들어갈 수 있다 하여 붙여진 것입니다. 이 아치 위에는 12세기 때 만들어진 성령 강림 모자이크가 있고, 중앙에 비워져 있는 옥좌 양옆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빛과 연결된 성령의 불꽃이 머리에 그려진 열두 명의 사도가 여섯 명씩 예수님의 옥좌를 중심으로 앉아 있습니다. 옥좌 아래에는 인간의 모든 죄를 속량하기 위해 오신 예수님의 모습이 십자가와 함께 어린양으로 표현되어 있고 이 비어 있는 자리는 세상 끝날 최후의 심판을 하기 위해 내려오실 예수님을 제자들이 기다리는 자리입니다.
옥좌를 중심으로 양옆 첫 번째는 베드로와 그의 동생 안드래아가 있는데 이는 로마의 첫 주교로서 베드로, 콘스탄티노플의 첫 주교로서 안드래아를 뜻하면서 서방과 동방 교회가 독립적이면서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하나 된 교회임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이 모자이크의 사도들 모습은 사용하는 돌의 색조를 잘 이용하여 깊이를 드러나게 하는 음영과 볼륨을 살리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칠리아에 있는 몬레알레 대성당과 체팔루의 대성당 모자이크 양식과 동일한 것입니다. 이것으로 이 성당을 건축할 당시 이탈리아 남부에 있던 모자이크 기술자들을 불러 만든 작품임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습니다.
이 모자이크 위에는 12~13세기 그려져 훼손은 되었지만 비잔틴 양식으로 된 삼위일체에 관한 프레스코화를 볼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은 한 옥좌에 앉아 있지만 성부는 가장 큰 모습으로 자신의 가슴 쪽에 성자를 감싸 앉고 있고 성자는 아기의 모습처럼 작지만 어른의 얼굴을 가지고 있으며 손에 성령인 비둘기를 잡고 가슴에 품고 있습니다. 성령의 비둘기에서는 열두 개의 빛이 뻗쳐 나와 바로 아래에 있는 모자이크 속의 열두 사도의 머리에 있는 빛과 연결돼 보이고 있어, 그림과 모자이크가 하나의 내용으로 완성된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승리의 아치 양옆에는 성 닐로와 성 바르톨로메오의 모습도 그려져 있습니다. 이렇게 승리의 아치 위에 그려진 프레스코화와 모자이크는 삼위일체의 하느님으로부터 성령을 받는 사도들 그리고 수도원 창립자의 모습을 단계적으로 그려 넣음으로써 정통 교리를 따르고 있다는 정교회적 특징을 한눈에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코노스타시 중앙문 위쪽에는 그리스 말로 테오토코스 (Θεοτόκος) 이콘이 있고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호칭은 마리아에게 붙여진 최초의 호칭이고 431년 에페소 공의회에서 공식적으로 선포되었습니다. 이 이콘의 성모님은 손짓으로 한 방향을 가리키며 인도하는 모습을 가지고 있는 전형적인 오지트리아 (Ogitria) 형식으로써, 이콘 앞에 서서 바라보는 우리 모두를 아기 예수님에게 인도하면서 이분이 바로 우리 모두를 구원의 길로 이끄시는 그리스도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형식은 중세 비잔틴 양식의 전형으로써 아기 예수님은 성모님의 한 손에 앉아 계시면서 한 손에 생명의 책인 두루마리를 가지고 있고 다른 손으로 우리 모두를 축복을 하고 있습니다. 성모님의 머리와 양 어깨에 있는 세 개의 별은 출산 전과 출산 중 그리고 그 후에도 영원한 동정녀임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배경으로 황금색으로 되어 있는 것은 비잔틴 양식의 이콘과 모자이크에서 동일하게 나타나는데 그 뜻은 변질될 수 없는 영원함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아기 예수님의 진초록과 붉은색의 옷은 신성을 상징하고 있으며 그 옷 위에 금색의 줄을 박아 넣음으로써 성모님의 옷과 구별되게 하면서, 이 이콘의 주인공은 육화 하신 아기 예수님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얼굴은 비록 아기지만 성인 남자 혹은 머리가 벗겨진 나이 든 모습으로 표현함으로써 비록 사람이지만,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알고 있는 지혜의 사람 즉 하느님이심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왼손에 들려진 두루마리는 세상의 심판자임을 상징하고 있고 그 심판은 정의롭지만, 예수님의 정의로움은 두려움의 심판자로서가 아닌 머리의 후광으로 자비로운 심판자임을 두 손가락의 축복과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1004년 성 닐로와 수도사들이 정착하면서부터 이 이콘의 성모님과 함께 하였고, 그런 이유에서 그로타페라타의 수도원이라 부르지 않고 그로타페라타에 있는 동정 마리아 수도원이라고 불렀습니다. 1024년 요한 19세 교황이 수도원 성당을 축성할 때 이 하느님의 어머니께 봉헌하였고 같은 설립자인 성 바르톨로메오가 쓴 거룩한 찬송 (Inni sacri)에는 이 이콘에 대해서 열네 번이나 언급하고 있을 정도로 수도원의 보호자이며 인도자이신 어머니로서 역할을 해주십니다. 이 이콘은 수도원 영적 삶의 중심으로 처음부터 함께 하였지만 이 이콘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하지만 여러 문서들과 그 당시 상황을 종합해 보면, 수도자들이 그로타페라타에 오기 전에 머물렀던 11세기 칼라브리아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이었고 비잔틴 교회의 전례를 따르고 있었기 때문에 이 이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유래했다고 볼 수 있고 또한 위에 설명한 이콘의 양식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1163년도에는 붉은 수염 페데리코 1세 황제의 공격에 30년 동안이나 수비아코로 피신해 있을 정도로 사건과 전쟁이 있었던 12세기에는 이 이콘을 언급한 문서는 찾아볼 수 없지만, 1230년도 교황 그레고리오 19세가 꿈속의 환영을 본 후 수도원으로 이 이콘을 옮길 것을 명령하였고 그 당시 문서에는 이 거룩한 행렬에 관해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있고, 웅장한 전례 안에서 투스콜라나시에서부터 이 수도원 성당까지 성 루카에 의해 그려진 순수한 동정녀 마리아의 이콘이 옮겨졌다.
그 후 여러 상황 속에서 누군가가 훔쳐 가기도 하고 혹은 잘 보관하기 위해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기도 하였지만 수비아코에서 돌아온 수도자들은 그들의 이콘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였고 교황님은 돌려받을 수 있도록 늘 승인해 주었습니다.
1577년 교황 대리 수도원장 알랙산드로 파르네제 추기경은 비잔틴 양식의 옛 성당을 수리하면서 성당 중앙에 가톨릭 교회 양식의 제대를 만들었고, 그 뒤로 금으로 입힌 나무로 된 건축물을 만들어 그 사이에 제단화처럼 이콘을 끼워 넣었습니다.
1665년에는 교황 대리 수도원장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파르네제의 것을 허물어 버리고, 대신 바로크 최고의 건축가이자 조각가였던 베르니니가 계획한 대리석으로 된 기념대를 그의 제자였던 안토니오 죠르제띠 (Antonio Giorgetti)로 하여금 만들게 하였고, 양옆에는 도금한 천사를 세운 제단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다시 갖추게 된 것은 1881년 레오 13세 교황이 그리스 전례를 다시 할 수 있도록 인준해 준 덕분입니다. 안토니오 죠르제띠가 만든 대리석 기념대에 이코노스타시를 덧붙여 만들면서 지성소와 신자들의 공간이 분리가 되었고, 지성소 내부 제대는 정교회 전례에 맞는 정사각형으로 만든 제대를 놓았습니다.
죄 중에 있는 신자들은 이코노스타시를 바라보며 성체의 신비가 일어나는 신성한 전례를 직접 눈으로 볼 수는 없지만 하느님과 가장 가까운 하느님의 어머니의 전구를 통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천상 세계를 묵상하게 됩니다. 테오토코스 이콘은 인노첸시오 10세, 알렉산드로 7세, 비오 7세, 복자 비오 9세, 성 바오로 6세 그리고 성 요한 바오로 2세 등 여러 교황들에게 공경을 받았습니다. 2차 대전 중에는 많은 사람들의 위로와 은신처가 되어 주었고, 성 요한 바오로 2세는 1979년과 1987년 두 번을 방문하셨는데 특히 1987년도는 마리아의 해를 선포하시면서 이 이콘 앞에서 첫 미사를 드리셨습니다.
이코노스타시 뒤편은 거룩한 장소 (VIMA)라고 불리며, 비잔틴 양식의 정사각형 제대가 있고 그 위로 발다키노가 솟아 있습니다. 발다키노 천장에는 은으로 만들어진 비둘기가 매달려 있고 이 안에 빵으로 축성된 예수님의 성체가 모셔져 있습니다. 요한복음에 나오는 예수님 최후의 만찬을 따라가는 비잔틴 전례는 예수님 최후의 만찬이 파스카 전날에 이루어졌으므로 예수님께서 빵에 누룩이 들어간 일반 빵을 사용하였다고 생각하여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하는 가톨릭과는 다르게 성찬례에 누룩이 들어간 일반 빵과 포도주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 바르톨로메오에 의해 봉헌된 본당 오른쪽 편에 있는 이 소성당은 처음 306년에 순교한 니코메디아의 아드리아노와 그의 아내 성녀 나탈리아를 위해서 만들어졌습니다. 1131년에는 성 닐로와 성 바르톨로메오의 유해를 제대 밑에 모시기 위해서 확장시키며 성 닐로의 소성당이라고 불렀고, 파르네제 소성당이라고 부르게 된 것은 1608년에서 1610년 사이에 교황 대리 수도원 원장이었던 오도아르도 파르네제 (Odoardo Farnese) 추기경에 의해서 만들어졌기 때문입니다. 이 소성당을 새롭게 꾸미기 위해 까라치의 학교에서 공부하였던 젊지만 재능 있는 28살의 도메니키노 (Domenichino)라고 불렸던 도메니코 잠피에리 (Domenico Zampieri)에게 모든 것을 위임하였고, 덕분에 이 예술가는 그림뿐만이 아니라 바닥과 천장 그리고 석회를 이용한 소성당 내부 데커레이션까지 라파엘로 풍의 조화롭고 풍요로운 소성당을 만들게 됩니다.
성 닐로와 성 바르톨로메오 사이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제단화는 안니발레 까라치 (Annibale Carracci)의 작품입니다. 벽화의 내용들은 성 닐로와 성 바르톨로메오의 삶의 일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대 옆 성직자석 (presbiterio)에는 도메니키노의 작품이 그려져 있는데, 오른쪽 벽은 동정녀께서 두 성인에게 나타나시어 자신의 이름으로 된 수도원을 세울 것을 말씀하시며 황금색 볼 (pomo d’oro)를 주고 있고 이것은 성모님의 지속적인 사랑을 뜻하고 있습니다. 왼쪽 벽은 성 닐로의 생애 (Bios)에 나오는 이야기 중에 하나로, 칼라브리아의 비잔틴 군대의 대장 폴리에우토 (Polieuto)의 마귀 들린 남자 아들을 성 닐로가 치유를 해주는 장면이며, 라파엘로의 마지막 그림인 ‘타볼산의 변모’에서 악령 들린 남자아이를 치유하는 드라마틱한 장면을 연상시켜주고 있습니다.
신자석 오른쪽 벽에는 성당 건축 시에 성 닐로의 제자였던 성 바르톨로메오가 건축가가 보여주는 설계도를 검사하는 장면입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건축가의 얼굴은 자신의 동료이자 스승이었던 까라치의 얼굴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그림 안에는 그 당시 농부들이나 인부들의 일상의 삶이 잘 표현되어 있고, 바르톨로메오 생애에 기록되어 있는 것처럼 성인께서 쓰러지는 기둥을 잡아 인부를 구해주는 기적의 장면도 볼 수 있습니다.
그 옆으로 추수의 기적이라는 그림에선 성 바르톨로메오가 농부들이 추수한 농작물들이 피해를 보지 않도록 기도로 태풍을 잠재우고 있는 장면입니다. 이 그림 속 먼 곳에는 흐릿하나마 17세기 초의 수도원과 성당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왼쪽 벽에는 1000년이 되던 해에 오토 3세 황제가 가르가노에 있는 성 미카엘 대천사 성지순례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몬테까시노 근처 세르페리 (Serperi)에서 닐로 성인을 방문하는 장면입니다. 황제는 성인에게 많은 땅과 재물을 드리고 싶었지만 성인은 이를 거절하면서 황제의 가슴에 손을 얹고 황제 본인의 영혼 구원만을 바란다고 말씀하십니다. 성인은 이미 황제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알고 있었고 2년 후인 1002년에 황제는 로마 근교 팔레리아 (Faleria)에서 숨을 거둡니다. 그때 나이 22살이었습니다. 이 그림에도 전통에 따라 당시 살아있던 사람들의 얼굴을 그려 넣었는데 황제의 얼굴은 오도아르도 파르네제 추기경으로, 그 뒤 말을 잡고 있는 오른편 사람은 도메니키노의 자화상이고 말 왼편의 두 명의 남자는 자신의 동료였던 귀도 레니 (Guido Reni)와 구에르치노 (Guercino)입니다.
입구 쪽에는 십자가의 기적이라는 그림에서 성 닐로가 십자가 앞에서 유혹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있고 십자가에 계신 예수님께서는 못 박힌 오른손을 십자가에서 떼어 축복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틀리다와 다르다는 말을 일상에서 혼동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틀리다는 옳고 그름이라는 윤리적이고 정의로운 것을 판단하는 개념이 많이 들어있는 말입니다. 다르다는 것은 상태나 모습을 기준으로 같고 다르다는 것을 판단하는 언어입니다. 옳고 그름은 선과 악, 천사와 악마, 민주주의와 공산주의처럼 모든 것을 이분법적으로 나누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교회 안에서 이분법은 이단으로 넘어가는 지름길이 된 적이 많았습니다. 왜냐하면 이분법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타협이 없는 종교는 남을 이해하지 못하고 근본주의자라고 하는 무서운 사람으로 되기 십상입니다. 세상에는 무수하게 다른 것이 많습니다. 다르다는 것은 다양성을 이야기합니다. 개, 꽃, 포도주 등 하나의 범주 안에 묶는 대표되는 말이 있지만 그 범주 안에는 다양한 개들과 꽃들과 포도주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함은 아름다움이고 우리에게 행복한 마음을 불러일으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지만 다양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십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다가갈 수 있는 인간의 길은 여러 갈래입니다. 높은 산을 올라갈 때 몇 가지 길이 있을까요? 힘없는 사람은 빙글빙글 돌아서 갈 수도 있고, 지그재그로 갈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몇 날 며칠에 걸려서도 올라갈 수 있습니다. 힘 있는 사람은 직선으로 올라갈 수도 있고 힘에 기술까지 갖추고 있는 사람은 절벽을 기어올라 갈 수도 있습니다. 올라가는 방법은 다르지만 결국 모두가 정상에 오를 것이고, 정상에 오른 사람들은 자신들이 보고 느낀 산의 아름다움을 서로 이야기할 것입니다.
전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복수의 전례는 다른 방법으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다양한 찬미의 노래입니다. 한 가지의 악기로 연주하는 것보다 두 가지가 아름답고 그 이상이 되면 나를 어디론가 끌어올려 주는 신비한 체험까지 이르게 합니다. 전례는 한 분이신 하느님을 찬미하는 악기입니다. 이런 악기가 여러 가지가 있다고 하면 얼마나 아름답겠습니까. 그런 의미에서 동방 전례를 중세부터 간직해온 그로타페라타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 하느님을 숨 쉬게 해주는 또 다른 허파임에 틀림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