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로타페라타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 I

중세 수도원 이야기

by Roma Vianney
그로타페라타의 성 마리아 수도원 (Monastero Esarchico di S. Maria di Grottaferrata) 전경

이탈리아에 오기 전 가톨릭 신자들은 세계 어디를 가든 하나의 전례를 사용하기 때문에 언어를 못 알아 들어도 형식이 같아 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들었고, 또한 나 스스로도 이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타 종교에 비해 자랑스러워하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었고 잘못 습득된 지식에 의한 결과물이었는지를 깨닫는 것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교회처럼 로만 가톨릭 (Roman Catholic) 전례를 따르는 외국 성당에서는 언어가 달라도 문제없이 미사를 드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이 더 올바른 표현일 것입니다.


1차 교회 분열이라고 하는 정교회와 가톨릭교회가 갈라지는 시기를 1054년이라고 일반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1). 그리고 지역적으로도 이 두 교회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동과 서로 구분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1054년 이전에 이 두 지역에서 미사를 드리기 위해 사용한 전례는 지역을 나눈 것처럼 딱 두 가지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 섬은 10세기까지 비잔틴 제국의 영향 아래 있었기에 이미 비잔틴 전례를 따르는 수도원들이 6세기경부터 있었고 이 시기에 많이 논란이 된 성상 파괴라는 두 지역 간의 논쟁과 비잔틴 지역의 수도원에 대한 박해로 인해 더 많은 동방의 수도원들이 이탈리아 남부로 이주를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에서는 각 수도원장을 중심으로 한 많은 수의 독립된 이탈리아-그리스 수도원들이 생겨났고 성 닐로의 수도원도 그중에 하나로 볼 수가 있습니다. 그리고 11세기가 되면서 동서 교회의 분열뿐만이 아니라 로마 가톨릭을 믿었던 노르만족이 이탈리아 남부와 시칠리아를 차지하였고 이 수도원들도 자연스럽게 교황권 아래로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정치적, 교리적, 언어적, 문화적인 문제로 두 지역 교회의 수장들이 서로를 파문하면서 비록 갈라서기는 했지만 이탈리아 땅 안에서 수백 년간 지켜 내려온 그들의 고유 전례까지 무 자르듯 두 가지로 자를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크게 보면 정교회 전례와 가톨릭 전례 두 가지로 나눠서 얘기할 수 있지만, 이 가톨릭 전례는 다시 서방 가톨릭 전례와 동방 가톨릭 전례로 더 나누어서 볼 수 있습니다. 서방 가톨릭 전례는 지금 우리가 보편적으로 많이 사용하는 로만 가톨릭 전례이고 동방 가톨릭 전례라는 것은 로마 가톨릭교회 안에서 가톨릭 신자로 살지만 그리스-비잔틴 전례를 사용하는 사람들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간혹 이탈리아를 여행하다가 성당에 들어가면 정교회 복장에 전례를 거행하는 사람들을 볼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다루는 주제는 중세의 수도원을 더 다양하고 풍요롭게 만든 그로타페라타의 성모 마리아 수도원을 이야기하려고 합니다. 먼저 이들이 얼마나 교회의 중요한 부분인지를 교황님 말씀으로 시작하겠습니다.


그리스도 신자로써, 아니 좀 더 정확히 말해 가톨릭 신자로써 하나의 허파를 가지고 숨을 쉴 수가 없습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라는 두 허파가 필요합니다.
『하나 되게 하소서』54항,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


일명 ‘성 닐로의 수도원’으로 불리는 그로타페라타 성모 마리아 수도원은 중세 시절 이탈리아 중남부에 많이 퍼져 있었던 비잔틴의 바실리오 수도원 중에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이탈리아에 남아 있는 중세 그리스 수도원입니다. 현재까지 이곳의 수도자들은 가톨릭 신자로써 그리스-비잔틴 전례를 유지해 오며 동방과 서방 교회 일치에 중심점 역할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 수도원은 칼라브리아에서 수사들과 함께 1004년도에 온 로싸노의 성 닐로 (S. Nilo da Rossano)의 제자였던 성 바르톨로메오에 의해서 1024년도에 설립이 되었습니다.


크립타 페라타 내부

수도원과 성당이 봉헌된 곳은 로마 남쪽에 있는 투스콜로의 언덕이었고 이 자리는 키케로가 가지고 있었던 고대 로마의 빌라였습니다. 이 빌라 사이에 응회석으로 이루어진 두 개의 방으로 된 무덤이 있었고, 여기에 두 개의 철창으로 만들어진 창문이 있었습니다. 이 두 개의 철창은 '쇠로 된 철창'이라는 뜻에서 크립타 페라타 (crypta ferrata)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었고 지금도 수도원이 있는 이 도시 이름을 ‘그로타페라타’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이 장소는 5세기경에 오라토리오로 바뀌어 이 동네에 있었던 그리스도교 신자들의 신앙의 중심 역할을 하였습니다.


전승에 의하면 성 닐로와 그의 제자였던 성 바르톨로메오는 이곳 크립타 페라타에서 기도 중에 성모님의 발현을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성모님께서는 이곳에 당신의 이름으로 된 성지를 만들라고 이 두 사람에게 말씀하였습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투스콜로의 백작 그레고리오 1세는 자신 소유로 되어 있는 이곳의 땅을 성 닐로에게 기증하였고, 이 자리에 고대 로마 빌라에 사용된 돌을 이용하여 수도자들은 20년간에 걸쳐 성모 마리아를 기념한 수도원 성당을 짓게 됩니다. 그리고 1024년 12월 17일 요한 19세 교황은 성당 축성과 함께 ‘하느님의 어머니’에게 봉헌하였습니다.


로마 교회와 콘스탄티노플 교회가 1054년도에 갈라졌기 때문에 1024년이란 해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정교회로 갈라지기 전부터 로마 교회의 주교이자 교황에게 의탁하고 있던 이 수도원의 의미는 아주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성찬의 전례 안에서 누룩 없는 빵을 사용한 라틴 교회와는 달리 누룩이 들어간 빵을 사용하는 이탈리아-비잔틴 전례를 가톨릭교회 안에서 계속 유지하였고, 이러한 사실은 1089년 우르바노 교황에 의해 재확인되었습니다. 그리고 1131년도에는 시칠리아 왕이었던 루제로 2세 (Ruggero II)가 많은 봉토를 기증하면서 땅과 농장을 소유한 영주의 역할뿐만 아니라 사법권도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로마 근교에 위치하고 있는 수도원의 지리적 특성 때문에 교황과 황제가 다투던 시기에는 황제의 군대가 수도원을 점령하기도 하였습니다. 1163년 붉은 수염 페데리코 황제가 공격해 왔을 때 이곳의 수도자들은 1191년까지 수비아코 베네딕도 수도원으로 피신하여 있었고, 1241년도에는 붉은 수염 페데리코 황제의 손자였던 페데리코 2세 황제에게 두 번째 파문을 결의하기 위해 그레고리오 9세 교황이 이 수도원으로 추기경들의 소집 명령을 내렸다는 이유로 황제 군대의 주둔지로 사용되었고 약탈당하기도 하였습니다.


15세기 중반부터는 이 시기 다른 수도원과 마찬가지로 로마의 귀족 가문에서 교황 대리 수도원장들이 수도원을 관리하기 시작하며 새로운 수도원의 모습을 갖춰가기 시작하였습니다. 수도원을 둘러싸고 있는 성채는 교황 대리 수도원장이었던 로베레 가문의 쥴리아노 추기경(2)에 의해 수도원과 자신이 이 수도원에서 거주하던 궁을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445년에서 1516년 사이에 만들었습니다. 20미터 높이의 두꺼운 성벽과 네 모퉁이에 원형탑을 세운 모습은 외부의 적을 막기 위한 요새임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성채 입구에도 원형탑과 함께 해자를 파 놓았고 그 위에는 오르내리는 도개교를 만들어 사용하였습니다.


1564년 바오로 3세 교황의 조카였던 파르네제 가문의 알렉산드로 추기경은 남쪽에서 들어오는 고가 수로를 수도원에 만들어 풍부한 물을 제공하였고 지금 현재 성당에서 볼 수 있는 격자 방식의 나무 천장을 만들었습니다. 1608년 알렉산드로 추기경의 조카였던 오도아르도 파르네제 추기경은 원래 있었던 성 닐로의 소성당을 확장하고 도메니코 잠피에리 (Domenico Zampieri)에게 위임하여 르네상스풍으로 아름답게 꾸미게 하였습니다. 파르네제 가문 이후 바르베리니 가문에서 교황 대리 수도원장을 맡으면서 하느님의 어머니 이콘이 들어간 기념대를 앞에 둔 로마 교회식 제대가 만들어졌다가 1881년 레오 13세 교황 때 지금의 그리스식 이코노스타시가 다시 만들어지게 됩니다. 교황 대리 추기경 수도원 제도는 1824년 교황 레오 12세 때 폐지가 되어 수도원 고유의 본성과 자주성을 회복하게 되지만, 19세기의 수도원은 나폴레옹의 이탈리아 침략과 이탈리아 통일기 시절의 사회적 어려움을 겪었으며 현재는 교황청 직속 수도원으로 완전한 자치권을 누리고 있습니다.

수도원 평면도

1. 성채의 성벽 및 네 개의 원형 탑 2. 수도원 입구 3. 교황 대리 수도원장 궁 4. 새로운 도서관 5. 성 닐로 석상 6. 분수 7. 상갈로의 회랑 정원 8. 국립 박물관 9. 성 바르톨로메오 석상 10. 성당 광장 전례의 분수 11. 옛 서적 복원실 12. 크립토포르티코 13. 해시계 사각 정원 14. 700년 대 수도원 건물과 옛 도서관 15. 종탑과 크립타 페라타 16. 파르네제 소성당 17. 수도원 성당 (A 현관 B 나르테스 c 세례대 d 아름다운 문 e 이코노스타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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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복하는 성 닐로 청동상. 수도원 입구와 교황 대리 수도원장 궁의 일부
상갈로의 회랑 정원

줄리아노 추기경이 만든 성채의 입구를 지나 들어오면 첫 번째 만나는 정원 중앙에 1904년도에 라파엘레 자카니니 (Raffaele Zaccagnini)가 선종 900주년을 기념해서 만든 축복하는 성 닐로의 청동 상이 있고, 왼쪽으로 지금은 박물관과 도서관으로 사용되는 교황 대리 수도원장 궁이 있습니다. 이 궁 역시 줄리아노 추기경이 자기 지위와 이곳에 머무는 동안 필요에 맞게 지어졌고 외벽은 성채와 어우러진 요새처럼 보이나 내부 상갈로의 회랑 정원은 수도원에 맞는 사각 정원으로 꾸며져 있습니다. 비록 중세 수도원이 일반적으로 갖고 있는 사방이 회랑을 갖고 있는 모습은 아니지만 당대 최고의 건축가였던 줄리아노 다 상갈로가 만든 아름다운 회랑을 이 궁과 붙여서 만들어 놓았던 것입니다.


수도원 성당 정면과 광장에 있는 전례의 분수

성당 앞 광장 중앙에는 1906년 신고딕 양식으로 만든 ‘전례의 분수’가 있습니다. 이 분수에서 비잔틴 전례력에 따라 1월 6일 예수님 세례 축일이자 삼위일체 하느님의 공현 (테오파니아) 대축일 날 물의 대축성 (메가스 하기아스모스)을 하고 있습니다. 이 예절은 1월 5일 수도원 저녁 기도 후 나르테스에 있는 세례대에서 먼저 거행이 되는데 주례자가 십자가를 세 번 세례대에 담그며 물의 축성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다음날 이 전례의 분수에서 똑같은 전례를 거행하면서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당신의 피조물인 이 세상에 거룩한 모습을 드러내심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성당 정면은 1902년에서 1930년까지 복원 공사를 하면서 1800년대 네오고딕 양식을 걷어내고 옛 성당의 모습에 따라 고딕의 창문과 장미원화창 그리고 로마네스크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세 개의 구멍이 뚫려있고 5층으로 된 12세기 때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성당 오른편에 있고 성당과 연결된 종탑 아랫부분은 성 닐로가 기도 중에 성모님의 발현을 보고 말씀을 들었던 크립타 페라타입니다.


종탑 아래 크립타 페라타 외부


세례대

정교회 성당의 건물은 전통적으로 비신자들의 공간인 나르테스, 신자들의 공간인 본당, 그리고 이코노스타시 (성화벽)로 가려진 거룩한 장소까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크로타페라타의 수도원 성당도 로마 교회 건축을 따르면서도 정교회 성당의 요소를 조화롭게 간직하고 있는 있는 곳입니다.


현관의 정문을 지나면 본당과 분리된 또 다른 공간에 들어서게 되고, 이 공간을 몽둥이, 채찍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희랍말 나르테스 (νάρθηξ)라고 부릅니다. 이렇게 부르는 이유는 하느님의 위엄이 그분의 집 안에도 똑같이 현존하고 있음을 명심하고 두려움과 공경심을 가지고 성당 안에 들어가기 전 자기 정화를 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는 의미입니다. 또한 정교회 신자가 아닌 사람은 여기까지만 들어갈 수 있었기 때문에 예비 신자들의 공간으로도 사용이 되었습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본당에 들어가기 전에 양심 성찰을 하고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는지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장소이고, 세례 준비를 하는 예비자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기 위해 준비하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나르테스의 왼편에 11세기 때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둥근 형태의 세례대를 볼 수 있고 그 표면에는 거룩한 물과 세례의 중요성을 표현하는 상징들이 조각돼 있습니다. 생명의 문이 있는 바위는 그리스도를, 그리고 그 바위 위에 걸터앉아 사람을 상징하는 물고기들을 낚는 사람은 사도들을 표현하고 있고, 바로 왼쪽 도시의 기둥에서 이 거룩한 물로 다이빙하고 있는 사람은 세상의 것을 포기하고 믿음 안에서 다시 태어나는 것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세례는 내가 가지고 있는 세상의 것에 더해 새로운 하늘나라의 삶을 약속받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인가를 잡으려고 한다면 먼저 내 손에 잡고 있는 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으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은 세상의 악습을 끊겠다는 것을 전제하는 용감한 선택이자 행동인 것입니다. 결국 세례대 위의 요르단 강에서 세례를 받는 예수님의 그림에서 보여주는 것처럼 삼위일체의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 이 창조물인 물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는 매개체인 구원의 물이 된다는 것을 은유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정교회는 세례성사를 받을 때 세 번의 침례를 하고 있습니다.


아름다운 문과 이콘 데시스

이곳에서 본당으로 들어가는 문은 일명 ‘아름다운 문’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문설주에 동식물로 표현된 부조의 아름다움도 이야기하겠지만, 드디어 하느님 집에 들어갈 수 있는 기쁨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 더 크다고 하겠습니다. 문 위 문설주에는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입을 벌린 세 사자의 얼굴이 있고, 사자 얼굴 사이에는 삼위일체 혹은 영원한 시간 (Tempo)을 상징하는 세 개의 얼굴을 가진 사람의 모습이 있습니다. 그리고 문 주변을 자세히 보면 9세기 위대한 비잔틴의 수도자였던 성 테오도로 스투디타 (S. Teodoro Studita)의 그리스어로 된 다음과 같은 내용의 글을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기 위해 이 문을 넘으려고 하는 여러분들은 저 안에 계신 자애로운 심판자를 만나기 위해서 근심과 괴로움에 취한 마음을 밖에 놓으십시오.

이 아름다운 문은 그 위에 비잔틴 전례의 성당에서 많이 볼 수 있는 ‘중재’의 뜻을 담고 있는 이콘 데시스 (δέησις)라는 모자이크와 연결돼 완성된 설명을 우리에게 해주고 있습니다. 중앙의 예수님은 오른손으로 축복과 함께 “나는 문이다. 나를 통과하는 사람은 구원받을 것이다” (요한 10,9)라는 말씀을 보여주고 계시고, 양옆에는 전형적인 데시스 모자이크의 구성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마리아와 예수님의 선구자 세례자 요한이 우리를 예수님께 중재하는 손짓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 두 분은 앉아 계시는 예수님의 키와 동일하게 그려져 있고 마리아와 예수님 사이에 이 모자이크를 만들 당시의 니콜라 2세 수도원장 (1130 - 1135)의 모습은 성모님의 절반 크기로 그려 넣음으로써 인물의 중요성을 원근법이 아닌 키의 비율로써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시각으로 보는 역 원근법이라고 얘기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우리 시각에 맞춰 그려지는 원근법에서 예수님은 한 점으로 끝나지만 이콘 안예 있는 예수님 시각으로 보는 것은 드넓은 온 세상이고 우리가 한 점이 되는 것입니다.


성당 내부는 2편에서 설명드리겠습니다.





(1) 교회 분열에 관해서는 먼저 올렸던 '분열은 다양성의 시작인가?'를 참고

(2) 후에 줄리오 2세 교황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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