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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Jan 01. 2022

AMOR & ROMA (사랑 & 로마)

베드로가 로마로 간 이유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코 16,15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시어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주신 지상 사명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을 듣고 "제자들은 떠나가서 곳곳에 복음을 선포하였다."(마르 16,20)라고 복음은 전하고 있습니다.


안드레아와 마르코 사도는 동방으로, 베드로 사도는 서방으로, 유대인이었던 바오로 사도는 그리스도교인으로 개종하여 소아시아로 다니면서 많은 공동체와 교회를 세웠습니다. 사실 이 말씀은 세상 끝날까지 우리 모두에게 주신 선교 사명이기도 합니다. 이런 이유로 오늘날까지 선교에 온 힘을 기울이는 종교는 그리스도교밖에 없을 것입니다. 유대교는 하느님께서 자기들을 선택하셨다는 선민사상으로 인해 다른 이들이 하느님 백성 되는 것에 관심이 없었고, 이것을 자랑처럼 남자들은 태어나면서 선택의 표시라는 할례를 몸에 남겼습니다. 반면 고대 로마인들은 종교를 기복 신앙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편의에 따라 필요한 신들을 자의적으로 만들어 냈고 그 신들 앞에서 현재의 축복을 빌었습니다.


예수님 탄생 (수비아코 거룩한 동굴 수도원)

예수님으로 인해 하느님은 유대인뿐만 아니라 세상 모든 사람들의 하느님이 되셨다는 이야기는 단지 예수님 승천에만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중세 때 그려진 예수님 탄생 그림을 보게 되면 아기 예수님 옆에 성 요셉보다 더 가까이 바로 예수님 머리 쪽에 등장하는 동물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한 마리는 당나귀이고 다른 한 마리는 황소입니다. 당나귀는 고집스러운 유대인을 상징하고, 황소는 좀 우둔하여 하느님을 못 알아본 그 외 모든 민족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이 성격 다른 두 마리의 동물이 예수님 바로 곁에 있다는 것은 예수님이 세상에 태어나시는 순간부터 모든 이의 하느님이 되셨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런 자비로운 하느님을 세상에 알려야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연스러운 일일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도 이런 목적을 가지고 예루살렘을 떠났습니다. 어디로 왜 갔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사도행전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마지막으로 등장한 베드로의 모습을 보면 대략 짐작은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베드로는 설교와 예수님 이름으로 행한 기적으로써 예루살렘에서 많은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인으로 개종을 하였고, 이에 놀란 유다왕 헤로데는 그들을 해치기로 결정을 합니다.


"먼저 요한의 형 야고보를 칼로 쳐 죽이게 하고서, 유다인들이 그 일로 좋아하는 것을 보고

베드로도 잡아들이게 하였다."

 - 사도행전 12,3 -


그러나 감옥에 갇혀있던 베드로에게 천사가 나타나 감옥에서 나올 수 있도록 도와주었고, 감옥에서 무사히 빠져나온 베드로는 사도들에게 알린 후 예루살렘에서 사라져 버립니다.


"그곳을 떠나 다른 곳으로 갔다."

 - 사도행전 12,17 -


그리고 헤로데는 베드로를 찾아내지 못했다고 합니다.(사도 12,19) 여기까지가 베드로가 사도행전에 등장한 마지막 장면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의 시점에서 본다면 베드로가 천사의 도움으로 무사히 감옥에서 나왔다는 것은 기적이고 감사할 일이지만, 그 당시 유대인 시점과 사회적으로 본다면 베드로는 탈옥을 해서 도망친 그리스도교인들의 우두머리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을 것입니다. 만약 예루살렘에 조간신문이 있었다면 "베드로, 감옥을 부수고 탈옥!!" 이런 타이틀이 붙은 기사가 나오지 않았을까요? 그리고 분명히 지명수배도 내려졌을 것이고 잡힌다면 탈옥까지 했으니 재판도 없이 참수형을 당했을 것입니다. 어찌 보면 유대인들에게 베드로를 죽일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었습니다. 다른 사도들을 찾아간 베드로도 기적처럼 자신이 탈출한 것을 무용담처럼 이야기는 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신의 처지가 안전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에게 예루살렘이 아닌, 그리고 헤로데의 영향력이 미치는 주변국보다 좀 더 안전하고 신앙생활을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바로 그 ‘다른 곳’ 이 로마였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의 유해가 모셔진 바티칸 성 베드로 대성당 중앙 제대와 발다키노

베드로가 로마에 있었다는 직접적인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베드로가 직접 쓴 다음의 내용에서 유추는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과 함께 선택된 바빌론 교회와 나의 아들 마르코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

 - 베드로 1서 5장 13절 -


여기서 베드로가 말한 바빌론은 로마를 비유하면서 쓴 일종의 암호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가 로마에 있던 시기는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네로 황제가 통치하던 시기였고 그리스도교인들이 로마 안에서 사교로 몰리던 때였습니다. 그래서 ‘로마’라는 직접적인 표현보다는 ‘바빌론’과 같은 고대 세계의 중심 도시로 비유적 표현을 했고 이 뜻은 ‘로마 교회가 여러분에게 인사합니다’라고 해석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정경은 아니지만 베드로가 로마에서 활동하고 순교한 이야기를 전해주는 ‘베드로 행전’이라는 외경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베드로는 사도행전 8장 9절에 등장한 마술사 시몬(1)을 로마에서 다시 만나게 됩니다. 장소는 로마 공회장에 있던 거룩한 길이었습니다. 이곳에서 마술사 시몬은 공중에 떠올라 사람들을 현혹하고 있었고, 이를 본 베드로는 예수님께 드리는 기도로써 시몬을 떨어뜨려 죽이지는 않고 다리뼈 세 군데를 부러뜨리는 기적을 보여줍니다. 이 기적의 장소 위에 세워진 성당이 로마에 있는데 프란체스카 로마나 성당입니다.


포로 로마노 안에 있는 프란체스카 로마나 성당 내부
공중에 떠오른 마술사 시몬을 바라보며 베드로가 무릎 꿇었다는 돌 (프란체스카 로마나 성당)

두 번째는 소설과 영화로도 나온 ‘쿼 바디스 도미네’입니다. 물론 이 이야기도 베드로 행전에 나오는 것입니다. 로마의 박해를 피해 아피아 가도를 따라 도망치던 베드로 앞에 나타나십니다. 반가움과 놀라움이 섞여있던 베드로가 예수님께 던진 한 마디 :

"주님 어디로 가십니까 Quo vadis Domine?"

베드로에게 돌아온 대답은 더 뜻밖이었죠 :

“다시 십자가에 못 박히려고 로마로 가는 길이다.” 

이 말씀에 정신을 차린 베드로는 도망치던 길을 되돌아 속죄하는 마음을 더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를 합니다. 베드로와 예수님이 만나신 자리에는 ‘쿼 바디스 도미네 성당’이 세워졌고, 사도가 순교하고 그 유해를 모신 자리에는 베드로 대성당을 세우게 됩니다.


아피아 가도 위의 쿠오바디스 도미네 성당

그렇다면 왜 베드로는 로마를 선택하였을까요? 사랑의 종교인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꽃 피우리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일까요? ROMA라는 단어를 반대로 쓰면 AMOR, 사랑을 뜻하는 말이 암호처럼 숨겨져 있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하는 감성적인 생각도 잠시 들었지만 무엇보다 가장 큰 이유를 꼽자면, 로마가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좀 더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환경의 장소였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인들이 기원전 8세기에 약소국가로 태어나서 400년 만에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고 800년 만에 전 세계를 가진 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원동력은 다른 나라에 대한 포용심이었을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타민족과 싸워서 승리를 하게 되면 그들이 기존에 가지고 있던 것을 인정해 주면서 주종 관계를 확실히 하였습니다. 타민족이 사용했던 언어와 문화도 인정했고 귀족들에게는 로마 시민권도 주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이 믿고 있던 신들도 포용하였습니다. 물론 무조건적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 모든 것의 전제 조건은 로마의 평화와 안녕을 해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로마인들은 유일신 사상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 신들은 지상에서 행복하게 살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호신이었습니다. 신은 하나만 믿어야 하는 선택이 아니었고, 이 신도 믿고 저 신도 믿을 수 있는, 즉 많으면 많을수록 좋은 혜택이었습니다. 로마의 신들은 전쟁의 신, 출산의 신, 바다의 신, 목축의 신처럼 각 분야에 특화된 신들이었고 사람들은 자신의 직업이나 처해진 상황에 따라 다양한 신들을 소환하여 빌었습니다. 그래서 서로의 신을 믿으라고 강요도 하지 않았고 종교전쟁이라는 말도 없었습니다. 이런 다신 주의 국가에 그리스도교가 들어와서 활동한다는 것은 그들에게는 또 '하나의 다른 신'이라는 개념이었을 것입니다. 바빌론과 비유되며 자유로운 종교활동을 할 수 있는 이런 환경의 로마는 열두 사도의 수장이었던 베드로에게 그리스도교를 알리고 뿌리내릴 수 있게 하는 최적의 장소였을 것입니다. 하지만 유일신을 믿었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로마의 신들은 또 다른 신이 아니라 '틀린 신'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교관이 달랐던 로마인들을 선교한다는 것은 쉬운 일도 아니었고 로마인들에게 그리스도인들의 하느님에 대한 절대적 믿음은 오히려 낯선 모습으로까지 느껴졌습니다.


로마인들의 이러한 사고방식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은 선교 방법으로 적용주의가 아닌 적응주의를 선택하게 됩니다. 예수님을 로마인들이 믿는 신들 중에 최고 신인 태양신이라고 하였고, 로마의 많은 수호신들이 했던 역할은 그리스도교의 수호성인으로 대체를 하게 됩니다. 그래서 각 신들에게 바친 신전들도 각 성인의 이름이 붙으면서 기념 성전으로 재탄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이 태어난 날도 태양신이 태어난 12월 25일로 전례력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사실 12월 25일은 낮의 길이가 다시 길어지기 시작하는 동지와 가까운 날이라서 로마인들은 이날이 태양이 태어난 날이라고 믿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당신을 희생하시어 인간의 모든 죄를 없애주셨다는 교리는 기원전 1세기부터 로마에 많이 퍼져 있던 ‘미트라’라는 종교 예식을 통해 설명해 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앞서 이야기했듯이 문제는 또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이 종교보다 더 우위에 두고 있는 것은 제국의 평화와 안녕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교인들이 늘어나면서 기존 질서를 흔들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모든 사람은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귀족과 노예도 형제자매로 설명하려고 하였습니다. 마치 유교 중심이었던 조선 시대에 천주교가 들어오면서 박해를 받았던 것처럼, 귀족과 노예가 하나가 된다는 것은 기득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아주 불안한 요소였습니다. 여기에 더해 그리스도교인들이 매주 모여서 드렸던 미사 중에 성찬례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였습니다. 소와 양을 희생 제물로 했던 이교도인들로서는 성찬례에 나오는 미사여구는 마치 사람을 바치고 그 살과 피를 나눠 먹는 인육 제로 비쳤을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교인들이 유일신을 외치던 시기에 네로에 의해서 로마 대화재 (64년)가 일어납니다. 신도시를 꿈꿨던 네로에게 이미 인구 백만 명이 넘었던 로마 성 안에 새로운 건축물을 세울 수 있는 땅은 없었고, 결국 그 공간을 마련하기 위해 불을 질렀던 것입니다. 이 화재는 황제가 거처했던 팔라티노 언덕 아래 마씨모 대전차 경기장에서부터 시작되었고 로마 성 내부 70퍼센트 정도를 전소시킨 후에 꺼지게 됩니다. 이 화재로 인해 위기감을 느낀 네로 황제는 화재의 진범으로 로마인들에게 이상한 사람이라고 취급받던 그리스도교인들을 지목하게 됩니다. 그리스도교인들이 인육제를 지낸다며 로마인들이 손가락질하며 비웃자 그리스도교인들이 너무 화가 나서 로마를 불 질렀다는 누명이었습니다. 이것을 시작으로 67년부터 그리스도교인들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고 그 죄목은 ‘로마인을 증오한 죄’였습니다. 바로 그 박해 원년에 베드로와 바오로 사도가 순교를 하였고, 313년 헬레나 성녀의 아들이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관용령을 반포할 때까지 근 250년 동안 계속되었습니다. 신흥종교라고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이 기간은 신앙적 일치를 이루는데 큰 어려움을 주기도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박해라는 시련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서로서로 더 키워나갈 수 있는 중요한 시간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신앙의 중심에 서 있던 사람들이 바로 순교자였던 것입니다.




순교자 그들은 누구인가요? 순교라는 말은 그리스어인 마르투스(μάρτυς)라는 말에서 오는데 ‘증거’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교 안에서 이 말을 ‘순교자’로 뜻을 넓히면서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목숨을 바친 사람’이라는 뜻도 가지게 됩니다. 물론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전의 시기에는 전자의 뜻만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시기를 ‘순교자의 시기’라고 부르게 되고 박해가 끝나고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그들의 무덤 위에 기념 성전을 세우기 시작하였습니다.


성 밖의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과 성 밖의 성녀 아녜스 성당

성당이라고 하면 광범위하게 하느님의 집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작게는 순교자들을 공경하기 위해 하나하나 지은 성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의 각 성당들은 우리나라에서의 각 동네 이름을 붙여 행정 구역처럼 나눈 본당의 개념이라기보다는, 각 성인들을 공경하기 위해 성인들의 유해를 모시고 그 성인과 함께 하느님께 기도를 드릴 수 있는 특별한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로마에서의 성당은 단지 그 시대의 건물 양식을 보는 것이 아니라 초기 그리스도교인들이 어떻게 신앙을 지키면서 하느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는 학교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순교자의 피를 신앙의 씨앗이라고 표현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제자로 신앙의 씨앗을 퍼뜨리기 위해 세상의 중심이었던 로마에 왔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많은 순교자들이 씨앗이 되어 로마 교회를 풍성하게 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우리 한국 교회도 많은 순교자들에 의해 탄생한 교회입니다. 이런 면에서 한국 교회는 로마 교회와 쌍둥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성인들은 절대 자기 자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다면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거짓 예언자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우리의 주변에서 예수님 말씀으로 사람들을 현혹하고 나를 따르라는 눈먼 목자와 거짓 예언자들을 많이 보고 있습니다.


로마의 모든 성인들은 우리에게 한 손으로는 어린양을 가리키고 다른 손으로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며 그분을 따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마술사 시몬(1) :

사도행전 8장 18절의 마술사 시몬은 사도들의 안수로 성령이 주어지는 것을 보고 돈으로 그 능력을 사려고 한다. 이때부터 교회에서 돈으로 성직을 사고팔려고 하는 하는 행위를 '시몬과 같은 사람'이라는 뜻에서 '시모니즘'이라고 부른다.

공중에서 바닥으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진 마술사 시몬은 제자들에 의해 처음엔 테라치나(Terracina)로, 그리고 로마 근교에 있는 아리차(Ariccia)로 옮겨져 치료를 받았으나 곧 숨졌다고 한다. 베드로와의 관계를 증명이라도 하듯 마술사 시몬의 석관은 아리차 빌라 키지(Villa Chigi)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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