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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oma Vianney Dec 26. 2021

로마 4대 성당 도보 순례

순례자가 들려주는 이야기


날씨가 좋아 늘 마음에 두었던 로마 4대 성당 걷기를 하러 시내로 나갔습니다. 늘 버스로만 다니며 성당 순례를 하였기에 이런 때가 올까 싶었는데, 코로나라는 시기를 겪으면서 오히려 시간이 내게 다가와 이런 기회를 주는듯합니다.



참으로 오랫동안 기다렸던 시간입니다. 얼마나 많은 순례자들이 로마를 향해 걸어와 벅찬 마음으로 성당 순례했던 그들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느끼면서 그들처럼 적어도 이 로마의 성당들을 내 발걸음 안에서 느끼고 기도하고 싶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순례의 시작은 예수님 부활과 승천 이후부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에게 거룩한 땅 - 聖地 - 이라고 불리는 곳은 당연히 예루살렘 한 곳이었고, 이곳을 향해 많은 유럽인들이 순례를 떠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예루살렘 외에 나머지는 거룩한 장소, 즉 성소 聖所 라고 부르며 구별을 두었고, 이태리에서도 성소라는 의미로 Santuario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초창기에는 순례라고 하면 예루살렘만 향해 가는 긴 여정이었습니다. 하지만 로마제국이 476년에 멸망을 하고 유대인들과 정교회 그리고 이슬람 사람들이 이곳을 함께 차지하면서 유럽에 살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너무 멀고 위험한 장소로 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14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은 더 이상 찾아갈 수 없는 먼 나라 남의 땅으로 바뀌게 되었고,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용서받을 수 있는 장소가 필요했던 그리스도교인들에게 예루살렘의 역할을 대신할 수 있는 장소로 로마가 등장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1300년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최초로 성년이라는 것을 교회 안에 도입하여, 로마의 4대 성당을 순례하고 자신이 죽어 연옥에서 받아야 할 벌을 살아있을 때 용서를 받을 수 있는 전대사의 전례를 만들어 많은 사람들이 로마를 찾아 기도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대성당이라고 부르는 바실리카 마죠레 (Basilica Maggiore)는 전 세계에 이 네 성당밖에 없습니다. 나머지 바실리카 명칭이 들어가 있는 성당들은 모두 '작다'라는 의미의 미노레 (Minore)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성 밖의 바오로 대성당

로마 외곽에 집이 있어 승용차로 출발지로 선택한 성 밖의 바오로 대성당 (Basilica Papale San Paolo fuori le Mura)까지 먼저 이동을 하였습니다. 적당한 늦가을의 온도와 햇빛을 은근히 가려주는 구름이 걷고 싶은 마음을 세상 바깥으로 끌어올리는 듯했습니다. 코로나로 확진자가 늘어난다는 뉴스가 나오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이 이 화창한 날씨를 즐기고 싶어 하는 욕망을 막아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이 성당은 바오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입니다. 4세기 때 처음 바실리카 양식으로 만들어졌으나, 1823년 지붕이 내려앉는 화재로 인해 다시 복원되고 옛 모습을 되살려 세운 성당입니다. 고대 로마법상 모든 죽은 자들은 로마 성 밖에 묻혀야 했었고, 박해 시기에 순교한 바오로 사도도 이교도들의 공동 무덤이 있었던 오스티엔세 가도 옆에 자리를 잡게 되었습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밀라노 관용령으로 그리스도교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에 대한 자유를 얻었고, 콘스탄티누스 황제 스스로가 바오로 사도를 기념하여 그 당시 최고의 로마 건축술인 바실리카 양식으로 바오로 사도의 무덤을 찾아 세운 성당입니다. 이제 고대 로마를 둘러쌓고 있는 아우렐리우스의 성벽을 향해 걸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아우렐리우스 로마 성벽

콜럼버스 길을 들어서니 저 멀리 로마 성벽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수개월을 걸어온 순례자들에게 멀리 보이기 시작한 이 성벽은 그들에게 어떠한 생각이 들게 하였을까요? 제대로 먹지도 못하고 도적이나 맹수들의 위협 속에서 목숨 걸고 도착한 이 로마 성벽은 아마도 그들에게 천상의 예루살렘 성벽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성벽을 바로 아래에서 걷다 보면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은 1700년이나 지나도 튼튼하게 남아있는 성벽의 무게감입니다. 3세기 때에 만들어진 아우렐리우스 성벽은 로마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총길이 19km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성벽은 로마 제국의 땅 안에서 심장과도 같은 역할을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성벽과 연결된 문을 통해 그 유명한 로마의 가도들이 로마가 점령한 위성도시들과 연결되어 제국의 모든 곳을 하나의 몸처럼 살아있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Omnes viae Romam ducunt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 성벽의 세바스티아노 성문과 라티나 성문

이 성문들 중에 가장 유명한 문이 바로 세바스티아노 성문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원전 3세기에 이 문과 이탈리아 남부 나폴리를 지나 브린디시 (Brindisi)까지 총 500Km나 되는 최초 로마 포장도로인 아피아 가도가 연결돼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로마가 멸망하기 전에는 당연히 다른 문들처럼 지나가는 길의 이름을 따서 아피아의 문이라고 불렀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로마의 문들에 성인의 이름이 붙기 시작한 것은 순례자들이 로마에 찾아오면서부터이고, 라틴말도 모르고 도시의 길도 생소한 그들에게 로마의 7대 성당 중의 하나인 성 세바스티아노 성당을 가기 위해서는 이 성문을 통해야 한다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입니다. 성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 내가 선택한 문은 사도 요한과 관련된 또 다른 오래된 성당을 보기 위해 세바스티아노 성문을 지나서 바로 나오는 라티나 성문으로 향했습니다.


기름 속의 성 요한 성당 (Oratorio di San Giovanni in Oleo)

성문을 들어가자마자 기도하기에 적당한 크기의 한 경당을 마주치게 됩니다. 이 경당은 바로 사도 요한이 어떻게 예수님을 증거 하였는지를 보여주는 장소 위에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13세기 말에 만들어진 "황금의 전설" (Legenda Aurea)이라는 책 내용에는 사도 요한이 어떻게 순교하였는지를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성령강림 후 사도들은 여러 곳으로 흩어졌는데, 사도 요한은 아시아로 가서 많은 교회를 세웠다. 도미티아누스 황제는 그의 명성을 듣고 로마로 사도를 불러들여 라티나 성문 앞에 있는 팔팔 끓는 기름 가마솥에 던지게 하였다. 하지만 사도 요한은 마치 상처와는 별개의 육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아무 상처도 받지 않고 기름 가마솥에서 나올 수 있었다. 그리고 황제는 자신 앞에서 설교를 멈추지 않는 것을 보고 그를 파트모스 섬으로 유배를 보내 버렸고, 그곳에서 그는 애독 (고독) 속에서 묵시록을 기록하였다."


13세기 때의 문서에 적힌 이야기지만 초기 그리스도교 시절인 5세기경에 이곳에 이미 성인의 이름을 딴 성당이 이곳에 있었고, 1509년 율리오 2세 교황에 의해 다시 르네상스 양식에 맞게 세워졌습니다.(사진 속 경당 문 위 현판에서 교황의 이름과 로마 숫자로 적힌 연도가 적혀 있다.) 그리고 알렉산드로 7세 교황 시절인 1658년에 자신의 가문의 경당으로 사용하기 위한 목적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개축을 하였습니다.(반대쪽 출입구 위의 현판에 교황의 이름과 문장 그리고 로마 숫자로 적인 연도를 볼 수 있다.) 사도 요한의 축일을 12월 27일로 지내고 있지만, 이 기름 속의 성 요한을 기념하는 축일은 5월 6일입니다.


라티나 성문의 성 요한 성당 정면과 내부

기름 속의 성 요한 경당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라티나 성문의 성 요한 성당을 볼 수 있고 이 성당 역시 요한 성인의 순교를 기념하는 성당입니다. 처음 이곳에 성당이 세워진 것은 5세기 말 젤라시오 1세 교황 (492-496) 시절이고, 이것을 증명하듯 성당의 독서대 위 성경을 놓는 자리에는 당시 고트족의 왕이었던 테오도리코 (495-525)의 낙인이 찍혀 성당 지붕을 덮었던 기와 한 장이 놓여있습니다.

교황록에 보면 8세기 말 아드리아노 1세 교황에 의해 옛 성당을 수리하였고, 12세기 중반에 재건축을 하면서 1191년 젤라시오 3세 교황에 의해 다시 축성이 되어 지금의 로마네스크 양식의 모습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성당 정면 앞 사각 정원에는 9세기 때의 우물이 놓여있고, 이곳에서 세례성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보여주듯이 세례 예절에 사용하는 문장의 일부가 우물의 윗부분 돌에 다음과 같은 라틴말이 적혀 있습니다.


IN NOMINE PAT(ris) ET FILII ET SPI(ritus Sant) I. OMNES SITIE(ntes venit)E AD A(quas).
EGO STEFANUS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목마른 모든 사람들아 물 쪽으로 오너라.
나는 스테파노


아마도 여기에 나오는 '스테파노'라는 이름은 이 문장을 우물에 새긴 사람의 서명일 것입니다. 우물 양옆에는 4세기 때의 주두를 가지고 있는 두 개의 기둥이 놓여 있습니다. 성당 내부로 들어가기 전 세 개의 이오니아 양식과 한 개의 도리아 양식의 주두를 가지고 있는 네 개의 기둥으로 바쳐져 있는 열린 현관은 '나르테체' (NARTECE)라고 불렀고, 이 장소는 하느님 집에 들어가기 전 자신이 합당한 상태인지 양심 성찰을 먼저 하는 곳이었습니다. 종탑은 12세기 때에 만들어진 로마네스크 양식이고, 1723년도에 만들어진 종이 아직도 울려 퍼지고 있습니다. 성당 내부는 비록 많이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프레스코화도 있지만 1191년도에 그려진 창세기 내용과 신약의 예수님 이야기가 있고, 성당문을 나가기 전 문 위의 벽면에는 하느님 집을 나가서도 올바로 살아야 한다는 경고로서의 최후의 심판 그림이 그려져 있습니다.




아피아의 성 체사레오 성당 (Chiesa San Cesareo de Appia)의 정면과 내부

시내를 향해 계속 걷다 보면 라티나 성문의 길이 거의 끝나는 지점 왼편에 기념대처럼 서있는 아피아의 성 체사레오 성당이 나옵니다. 이 성당은 8세기 로마 시대의 건물 위에 지어졌기 때문에 정문이 하나인 정면과 성당 내부도 일반 중세 성당들처럼 기둥으로 나누어져 있는 모습이 아닌 하나의 공간을 가지고 있는 신전과도 같은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복음 선포대, 성직자 석, 제대 그리고 제대를 덮고 있는 치보리움 등이 13세기 유행한 코스마데스코 장식의 대리석으로 꾸며져 있는데, 이것은 이 시기에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에서 재료를 가져다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작은 라테란 성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순례자들이 많이 오던 이 시절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은 1302년에 십자가의 자선군에게 이 성당을 맡겨 병원을 짓게 하고 스테파노 성문이나 라티나 성문을 통해 들어오는 순례자들을 치료하고 보호해 줄 수 있는 공간으로 사용하게 하였습니다. 배고픈 자에게는 빵을 목이 마른 자에게는 물을 아픈 자에게는 치료를 해 주었던 이 장소는 말 그대로 순례자들에게는 기나긴 순례 끝에 맞는 지상 천국이었을 것입니다.


이 성당의 주보성인은 테라치나의 성 체사레오로써, 1세기 말 북아프리카의 로마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여 부제가 되었고, 로마로 배를 타고 오던 도중 풍랑을 만나 계획에도 없던 로마와 나폴리 중간 지점에 있는 테라치나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이교도 신에게 도시에서 가장 아름다운 청년을 골라 바다에 던져 희생시키는 제사를 보고, 그 부당함에 대해 항의하며 그리스도를 증거 하였고, 결국 포대자루에 넣어 바다에 던져지는 순교를 하였습니다.

누구는 이 일을 보고 풍랑 때문에 생긴 우연이라고 하겠지만 인간 중심이 아니라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의 방향을 바꾸면 테라치나의 순교는 하느님이 계획하신 일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많은 사람들이 내 뜻이 하느님 뜻과 일치하기를 원하면서 기도를 하지만 언제나 하느님 뜻이 내 뜻과는 같지는 않을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플 때 부모에게 쓴 약보다 달콤한 사탕을 원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성당 벽면에는 성 체사레오의 이야기의 그림들과 나무 천장에 부조로 조각된 성인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바오로 대성당에서 한 시간 반 정도를 걸어 라테란 성당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1킬로미터 정도 더 가면 성모 마리아 대성당이지요. 내부로 들어가지는 않고 광장에서 잠시 기도하였습니다.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당 (Basilica di San Giovanni in Laterano)은 로마의 주교좌성당이자 로마의 주교인 교황님의 성당입니다. 지금의 교황님들이 바티칸에 계시다 보니 많은 사람들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교황님의 성당 즉, 주교좌성당으로 오해를 하고 있지만, 베드로 대성당은 말 그대로 베드로 사도를 기념하는 성당이고, 바오로 성당과 동급 대성당이라고 보면 됩니다. 그래서 이 라테란 성전을 '모든 교회의 어머니이자 머리'라고 성당 정문 옆에 초석처럼 라틴말로 적혀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베드로 대성당과 바오로 대성당은 두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졌기에 로마 성 밖에 있게 되지만, 라테란 성당은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관용령을 선포한 후 실베스트로 1세 교황에게 성 안에 있던 자신의 땅을 기증하여 그 위에 세운 성당입니다. 그러니 당연히 이곳이 4세기 이후부터 교황님이 머무는 모든 교회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교황님들이 바티칸에서 거처하시게 되는 것은 아비뇽 유폐가 끝난 1376년 이후부터인데 이것은 다음 기회에 더 이야기하기로 하겠습니다.


성모 마리아 대성당 정면과 후면

성모 마리아 대성당 (Basilica Papale di Santa Maria Maggiore)은 원래 로마 성벽 밖에 위치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당이 세워진 언덕의 이름도 '에스퀼리노'라고 부르고 있고 '외부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라는 뜻으로 붙여진 이름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탈리아어로 '인퀼리노'라는 말의 뜻이 세입자 즉 집 안에 거주하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언덕은 로마 성 밖에 묻힐 무덤이나 땅도 없던 가난한 사람들이 구덩이에 던져지거나 묻혔던 마지막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성모님께서 이 언덕을 선택하신 것이 아닐까요?


때는 리베리우스 교황 (352-366) 시절이었습니다. 이 당시 로마에 요한이라는 귀족이 있었는데, 꿈속에서 성모님이 나타나셔서 에스퀼리노 언덕 위 눈이 쌓여 있는 곳에 나의 이름으로 된 성전을 세우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8월 5일 아침에 깨어난 요한은 이 무더운 한 여름에 어떻게 눈이 내릴 수 있다는 말 인가하며 의심스러운 맘으로 리베리우스 교황님을 찾아가 꿈 이야기를 하게 되고, 이 말씀에 놀라신 교황님도 같은 꿈을 꾸었다고 하며 함께 이 에스퀼리노 언덕을 찾게 됩니다. 그리고 밤새 쌓인 눈이 녹지도 않고 소복이 쌓여있는 것을 보고 성모 마리아를 기념하여 처음으로 이 가난한 언덕 위에 성당을 봉헌하였고, 자신의 이름을 붙여 리베리우스의 성당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431년에 에페소 공의회가 열리게 되는데, 이 공의회에서 최초로 마리아에 대한 호칭문으로 '테오토코스' (하느님의 어머니)를 참석한 주교들이 만장일치로 채택을 하게 됩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식스토 3세 (432-440) 교황에 의해 지금의 성당을 다시 지어 성모 마리아에게 봉헌하게 됩니다. 그 이후 르네상스 시절 이 대성당에 붙여져 소성당 확장 공사도 있었지만, 5세기 때에 지어진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이 그대로 보존이 된 유일한 로마의 성당입니다.


성당 뒤로 가니 마침 몰타 기사단이 낮기도를 하고 있었습니다. 기사 수도회는 십자군 전쟁 시절 시대의 요청에 의해 생겨난 수도회라고 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요한 병원 기사 수도회와 성전 기사 수도회가 이었는데, 이들의 궁극적인 목적은 예루살렘 성지를 지키는 것이 아니라 성지를 찾아오는 순례자들을 치료해 주고 보호해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십자군이 이슬람 군에 비해 수적 열세로 인해 성전 기사 수도회는 점차적으로 성지를 지키는 군인으로서의 역할을 더하게 되어 결국 십자군 전쟁이 끝나던 시기인 13세기 말에 예루살렘에서 퇴각하여 프랑스 왕의 욕심으로 인해 이단으로 몰려 화형 등에 의해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하지만 요한 병원 기사 수도회는 초심을 잃지 않고 예루살렘을 떠나 여러 지역에 머물며 그들의 역할을 하였고 '요한과 예루살렘과 로도스와 몰타의 병원 기사 수도회'라는 이름으로 존속하여, 현재는 로마에 작은 나라 및 본부를 가지고 세계 안에서 활동하고 있습니다.


빠니스뻬르나 길 (Via Panisperna)에서 바라 보이는 성모 마리아 성당의 돔과 성 토메니코와 식스토 2세의 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당을 뒤로하고 베드로 대성당을 향해 빠니스뻬르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로마시에는 버스를 타고 다니면 볼 수 없는 폭이 작은 옛길들이 무척 많이 있는데, 이 길은 그중에서도 중요한 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로마에는 많은 성인 성녀들의 유해와 함께 그들의 이야기가 살아 숨 쉬고 있는데, 이 길 위에는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모든 그리스도교인들이 공경하는 로렌죠 성인이 순교한 자리 위에 세워진 빠니스뻬르나의 성 로렌죠 성당이 있습니다. 성 로렌죠는 성 식스토 2세 교황 시절 로마의 일곱 명의 부제 중에 한 명이었고 산 채로 불이 타오르는 석쇠 위에 눕혀져 258년에 순교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길 이름에 대한 유래도 여러 가지가 있지만 로렌죠 성인의 축일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빵 (Panis)과 햄 (Perna)을 나누어주었다는 라틴말에서 나왔다고 이곳의 수사님들은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이 길은 식당도 많이 있고 생동감 있는 로마인들과 관광객들이 늘 붐비고 있습니다.


같은 길 위에 마치 담장 위해 세워진 듯한 성 도메니코와 식스토 2세 교황의 성당이 있습니다. 식스토 2세 교황은 발레리우스 황제 시절 카타콤베에서 미사를 드리던 중 체포되어 4명의 부제와 함께 258년 8월 7일에 순교를 하였고, 같은 부제로서 그 자리에 없었던 로렌죠 성인은 사흘 후인 8월 10일에 황제 앞에서 고아와 과부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을 데리고 나타나 '이 사람들이 교회의 재산'이라고 하며 하느님 앞에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재물이 아니라 하느님의 형상을 닮은 모든 사람들이라는 것을 설교하고 순교를 하였던 것입니다. 이 성당 옆에는 1222년에 설립되어 로마에서 가장 오래된 교황청 아퀴노의 성 토마스 대학이 있는데, 우리에게는 안젤리쿰 (Angelicum)이라는 이름으로 더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천사의 성과 천사의 성에서 바라본 성 베드로 대성당

현재 로마의 중심을 흐르고 있는 테베레 강은 고대 로마 시절 로마의 서쪽 성벽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래서 테베레 강 위에 있는 다리 중에 하나인 천사의 다리를 건너게 되면 고대 로마 성 밖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고, 이곳에서 두 개의 무덤 위에 세워진 건물을 만나게 됩니다.

하나는 2세기에 만들어진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이고, 다른 하나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 베드로 대성당 (Basilica di San Pietro)입니다. 아드리아누스 황제의 무덤은 403년에 로마를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벽에 포함이 되었고 이때부터 성채의 역할로 사용되기 시작하였습니다. 지금처럼 천사의 성이라고 불리기 시작한 것은 590년 그레고리오 1세 대 교황 시절부터입니다. 이 시기에 로마에 흑사병이 번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 시작하였고, 이것을 막기 위한 방법으로 교황은 회개와 기도의 행렬을 로마에서 하기로 결정하게 됩니다. 행렬을 하던 중 교황은 성채 위에 발현한 미카엘 대천사의 모습을 보게 되었고, 그 후 기적적으로 흑사병은 로마에서 물러났다고 합니다.


베드로 대성당이 있는 곳은 네로 황제의 대전차 경기장이 있던 자리였습니다. 67년 네로 황제의 박해에 의해 베드로 사도는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이곳에서 순교를 하였고 그리스도교인들이 박해를 받던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사도의 유해는 경기장 근처에 있었던 이교도인들의 공동묘지에 안치를 하였고, 무덤에는 단지 사도의 이름만 적어놓게 됩니다. 그 후 100년 정도가 지나 가이우스라는 사제가 와 사도의 무덤 위에 승리의 제단을 만들어 기념하였고, 박해를 종식시킨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베드로 사도의 무덤 위에 바실리카 양식의 성당을 세우게 됩니다. 마치 예수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말입니다.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 마태오 16,18 -


그리고 1200년이 흐르며 성당의 수리가 필요해지면서 1506년 율리오 2세 교황에 의해 공사가 시작되어 120년이 지난 1626년에 지금의 새로운 성당이 완성되었습니다.


비또리오 엠마누엘레 2세 다리와 쥬세뻬 마치니 다리

베드로 성당을 지나 최종 목적지인 성 밖의 바오로 성당으로 향하는 길은 도로 아래에 있는 테베레 강의 산책로를 택하였습니다. 산책로와 자전거 길이 따로 구분이 되어있어 늦가을 하늘 아래 역사가 있는 다리를 보며 걷는 느낌은 혼잡한 도시를 지나온 나에게 하루를 정리하는 시간을 주었습니다.


시스토 다리

테베레 강 위에는 많은 다리가 있지만, 그중 아름다운 다리를 꼽으라 하면 시스토 다리라고 하고 싶습니다. 이 다리는 미켈란젤로가 그린 천지창조와 최후의 심판 그림이 있는 시스티나 소성당을 만든 식스토 4세 교황에 의해 1473년에서 1479년 사이에 만들어졌습니다. 길이 108미터 폭 11미터로써 네 개의 아치로 이루어져 있고 아치 중간에는 커다란 눈이라고 불려지는 구멍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의 역할은 홍수로 물이 차올라올 때 다리가 받는 수압을 낮춰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여기까지 물이 차올라왔다는 것은 로마 시민들에게 비상사태임을 알리는 거나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오로 성문과 피라미드

이 성문을 나와 직선으로 가면 성 밖의 바오로 대성당으로 향하게 됩니다. 걸어가는 길은 오스티엔세 길이라고 부르며 로마 서쪽 피우미치노 공항 근처에 있는 오스티아와 연결시켜 만든 고대 로마의 길입니다. 오스티아라는 도시는 고대 로마 시절 테베레 강으로 연결되어 있어 로마의 항구 위성도시 역할을 하였고, 아직도 이곳에는 폼페이에서 볼 수 있는 유적과 같은 건물과 길들이 남아있습니다.


'오스티아' 하면 나에게 떠오르는 성녀가 있는데 바로 아우구스티노의 어머니였던 성녀 모니카입니다. 지식에 대한 갈망으로 방탕의 시절을 보낸 아들을 위해 평생 뒷바라지한 모니카 성녀는 결국 아들을 밀라노의 주교였던 암브로시오 성인과 만나게 하여, 지식이 아닌 지혜가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해 주어 참 그리스도인으로 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주교가 되어 북아프리카의 히포로 떠나는 아들의 마지막 배웅을 바로 오스티아 항구에서 하였고 그곳에서 선종하시어 현재 성녀의 유해는 나보나 광장 옆에 있는 아고스티노 성당의 중앙 제대에 모셔져 있습니다.


성문 옆에는 이집트에서 볼법한 37미터 높이의 피라미드가 있습니다. 기원전 18년에서 기원전 12년 사이에 지어졌고 기간은 피라미드의 동쪽 편에 새겨져 있는 것처럼 330일이 소요되었다고 한다. 이 피라미드의 역할은 이집트의 것과 같이 무덤이었으며 주인은 정면에 이름이 새겨져 있는 것처럼 가이오 체스티오 에풀로네 (Gaio Cestio Epulone)입니다. 기원전 30년에 이집트를 로마 제국의 속주로 편입시키면서 그들의 웅장한 피라미드 무덤을 보았던 로마의 권력자들은 자기들도 그와 같은 것을 같고 싶은 욕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 시기에 로마에는 유행처럼 이와 비슷한 무덤들이 더 있었다고 합니다. 3세기에 아우렐리우스의 로마 성벽과 연결되어 지금의 모습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녁노을이 드리우기 시작한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당

중간에 점심도 먹고 해서 거의 여섯 시간 만에 출발한 자리에 도착하였습니다. 쉽게 얻는 것은 기억도 없이 사라지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로마는 오래 내 곁에서 많은 이야기를 해줄 것 같습니다. 하루해가 저무는 바오로 성당이 그 어느 때보다 좋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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