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 수도원 이야기
올리브 나무들로 둘러싸여 있는 피렌체의 체르토사(1) 수도원은 일명 ‘거룩한 산’이라고 불리는 ‘아쿠토 산 (Monte Acuto) 위에 자리를 잡고 있고 성당과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독채들의 조화로운 모습이 봉쇄 수도원이라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어 보입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자들은 1958년 성소자의 감소로 이곳을 떠나 루카에 있는 파르네따 수도원으로 자리를 옮겼고, 2017년까지는 카자마리 시토 수도원의 수도자들이 이곳에 머물렀습니다. 그 이후부터 지금까지는 교육 사도직에 카리스마를 두고 있는 성 레오리노 공동체에서 수도원 관리와 함께 이곳을 방문하는 사람들의 안내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성 로렌조에게 봉헌된 피렌체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은 니콜로 아치아이올리 (Nicolo Acciaioli, 1310-1365)의 오랜 염원에 따라 만들어졌습니다. 니콜로는 피렌체의 부자들이 차지하고 있던 은행가 집안의 사람이었고 프랑스 앙주 가문이 나폴리 왕국을 지배했던 시절에 대 집사이기도 하였으며, 이탈리아 남부 풀리아 지방의 총독직을 맡고 있었던 정치가이기도 하였습니다. 이 당시 나폴리의 앙주 가문은 자신들의 영토 안에서 카르투시오회의 적극적인 지지자이며 후원자로써 많은 수도원 건물을 건축하는 데 기부를 하였고, 나폴리에 있는 카르투시오회의 성 마르티노 수도원도 이때 건설되었습니다. 니콜로도 역시 성 마르티노 수도원을 짓는데 기부를 하면서 자기의 고향인 피렌체에도 그에 걸맞은 수도원 짓기를 희망하는 마음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더군다나 피렌체는 교황령에 속해 있던 곳이었기에 영적으로나 세속적으로나 그 의미는 더 크다고 생각을 하였습니다.
1342년 나폴리 왕국 사절로 피렌체에 오게 된 니콜로는 두 명의 카르투시오 수도원장 앞에서 자신의 땅을 기증한다는 것과 수도자들이 생활하는 건물을 짓는데 필요한 비용에 대한 기부 문서를 작성하게 됩니다. 도시와 가까이 있던 곳이었기에 넓은 땅은 아니었지만 12명의 사제 수도자와 수도원장 그리고 3명 정도의 평수도자가 살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아쿠토 산 (monte Acuto) 정상에 위치하였기에 세상 사람들과는 적당히 떨어진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카르투시오의 지리적 선택지와도 잘 맞는다고 할 수 있었습니다.
1.아치아이올리 궁 (미술관) 2.성당 광장 3, 4, 5.수도원 성당 (3번은 평수도자, 4번은 사제 수도자 기도 자리, 5번은 제대) 6.통로 7.성 마리아 경당 8.사제 수도자 대화실 9.사제 수도자의 작은 정원 10.집회소 11.사제 수도자의 큰 정원 12.식당 13.평수도자의 정원 14.손님방 (Foresteria)
바위가 있었던 정상 쪽에 성당을 세우고 외부의 벽을 성벽처럼 높이 세워 그에 접한 건물들을 성당과 수평이 되도록 만들었고 재료로 사용된 석재들은 이곳에 있던 바위들을 쪼개어 사용하였습니다. 카르투시오 수도원 생활의 중심으로 생각한 가장 중요한 장소는 성당과 두 군데의 사각 정원이었습니다. 시토회 같은 경우는 생활의 중심이 되는 하나의 사각 정원을 중심으로 북쪽 편에 성당을 세우며 차가운 바람을 막아주는 역할을 하도록 하였고 동쪽에는 봉쇄 수도자 남쪽에는 평수도자들의 숙소를 마주 보고 만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두 부류의 수도자가 하나의 공간을 사용하는 듯하면서도 분리 공간을 만들어 냈다면, 카르투시오 수도원은 성당을 수도원 중앙에 세우고 봉쇄 수도자만이 사용하는 정원과 평수도자가 사용하는 작은 정원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만들었습니다. 시토회는 수도원 식당을 빛이 잘 들어오는 남쪽 편에 두어 가장 활동 시간이 많은 중심에 두었다고 한다면, 카르투시오는 매일 이곳에 모여 식사를 함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식당의 위치에 대한 중요성은 시토회 보다 크지 않았습니다.
니콜로는 1353년에서 1362년까지 수도원 건설에 깊은 관심을 보이면서 이곳에 자주 머물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피렌체 카르투시오 수도원 건설에 모든 재정을 지원하였던 니콜로였지만 수도원 설계와 건축에 대해서만은 전적으로 수도자들에게 위임하여 그들의 삶에 맞게 건설되도록 하였습니다. 이곳은 그에게 있어 고향 사람들을 위한 사랑의 표시였고 자신의 죄를 보속하고 영혼을 구원하기 위한 인간적 노력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의 전적인 지원에 힘입어 니콜로가 죽기 전 거의 모든 건물들이 완성될 수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절이 되면서 수도원 개축과 함께 아름다운 장식들이 더해졌고 16세기에는 수도원에 들어오는 입구와 손님들이 머물 수 있는 외부 숙소 (Foresteria) 그리고 성당 정면의 증축과 함께 성당 앞 광장도 새롭게 만들어졌습니다.
수도원에 들어가기에 앞서 순례자들을 위한 조그만 경당을 볼 수 있습니다. 이 경당 정면에는 자신의 순교 증거물인 석쇠를 들고 있는 성 로렌조와 카르투시오회 창립자인 성 부르노를 테라코타로 만들어 벽감에 놓았습니다. 경당 왼쪽 아치 아래로 조그만 정원을 볼 수 있는데 수도자들이 유일하게 수도원 밖으로 나올 수 있던 공간이었고, 그래서인지 이곳을 작은 천국이라는 뜻을 가진 파라디지노 (Paradisino)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곳까지 형제들과 산책을 나와 영적이든 사적이든 서로의 이야기를 푸른 나무 그늘 아래에서 나누었을 것입니다.
수도원 계단을 통해 올라가 첫 번째로 만나는 건물이 빨라쪼 아치아이올리 (Palazzo Acciaioli)입니다. 이 건물은 도메니코 수도회의 수도자이자 건축가였던 야코보 파사반티 (Jacopo Passavanti)와 야코보 탈렌티 (Jacopo Talenti)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수도자들이 사용하는 건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1575년 성당 광장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수도원 건물들과는 분리되어 있었던 건물이었고 작은 요새와 같은 모습을 갖고 있었습니다.
이름 그대로 이 수도원을 세웠던 니콜로의 성을 따서 만들어진 건물이고 니콜로가 이 수도원을 방문하였을 때, 그리고 세상의 모든 일에서 은퇴를 하고 수도자처럼 조용하고 애독의 시간을 보내려고 만들었던 건물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 프랑스 파리나 볼로냐에 있는 대학처럼 50명의 학생과 세 명의 선생들을 두어 중세의 교양과목들을 가르칠 수 있는 학교를 만들고 싶어 하였습니다. 그래서 이 건물을 학문의 궁 (Palazzo degli Studi)이라고도 부르기도 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꿈은 니콜로 사후 더 이상 수도원 기부에 관심이 없었던 후손들에 의해 이루어지지는 않았고 건물도 2층까지만 짓고 끝나게 됩니다. 1층은 여섯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져 있지만 들어갈 수 없고 2층은 현재 미술관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미술관에는 매너리즘 시기의 미술가였던 폰토르모 (Pontormo, 1494-1557)가 그린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관련된 다섯 장의 그림이 있습니다. 원래 수도자들의 정원 벽에 있었던 프레스코화였는데 노출된 외부에 있었던 탓에 손상과 복원이 잘 되지를 않아서 1952년에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원작들은 손상이 너무 심해 형태만 볼 수 있지만 그래도 다행인 것은 이 그림들을 16세기 때에 여러 화가들이 모조한 작품들이 있어 그 내용을 짐작하기에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다섯 장의 내용은 '올리브 산의 기도, 빌라도 앞에 서신 그리스도, 갈바리오 언덕을 오르심, 십자가에서 내려지심, 그리고 부활'입니다. 폰토르모는 피렌체에 퍼졌던 전염병을 피해 이곳 수도원으로 피신해왔던 시기인 1523년도에 이 그림을 그렸다고 합니다. 이곳에 16세기 때에 피렌체 학파에 의해 그려진 니콜로의 전신 초상화도 있고 14세기 중반 토스카나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나무 십자고상도 볼 수 있습니다.
미술관을 나오면 길이 70미터 폭 22미터의 넓은 성당 광장을 만나게 됩니다. 이 광장은 수도원의 건물들 중 가장 늦게 만들어졌고 1545년에 공사를 시작하여 30년 후에 완성이 되었습니다. 물론 이 광장과 접해있는 건물들도 이 시기쯤에 만들어진 것입니다. 성당 정면과 평수도자들이 사용하는 성당 내부 뒷부분은 1550년에서 1558년 사이에 만들어졌고, 성당을 바라보며 왼쪽 건물은 손님들이 수도원 방문 시 사용하는 포레스티아 (Forestia)로써 1575년에서 1580년에 만들어졌습니다. 포레스티아의 방들은 ‘교황의 아파트’라고도 불리는데, 비오 6세 교황이 1798년 6월 1일부터 1799년 3월 23일까지 나폴레옹에 의해 갇혀있었고, 비오 7세 교황은 1809년 7월 8일과 9일 이틀 동안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성당 정면과 성당 들어서자마자 만나는 첫 번째 공간인 평수도자의 자리는 1550년에서 1558년 사이에 1300년대에 만들었던 원래 있던 성당을 확장해서 만들었습니다. 성당 정면이 확장되기 전까지는 성당 양쪽 건물이 떨어져 있는 작은 정원이 있었습니다. 정문 왼쪽에는 이 성당이 봉헌된 성 로렌조 석상이 오른쪽에는 수도회 창설자인 성 부르노의 석상이 벽감에 있습니다. 그리고 정문 위에는 그리스도의 희생과 성찬례를 상징하는 펠리컨이 부조되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 펠리컨은 먹이가 없을 때 자신의 가슴을 쪼아 피를 흘려 새끼들에게 준다고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좀 다른 것 같습니다. 펠리컨은 새끼들에게 물고기를 잘 먹이기 위해 자기의 입에 넣어 씹은 후에 새끼들이 잘 받아먹을 수 있도록 자기 가슴 부위에서 입을 벌려 물고기를 준다고 합니다. 이때 그 물고기의 피가 펠리컨 어미의 가슴에서 나오는 것처럼 보여 교회 안에서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성체 찬미가’에서 언급한 ‘사랑 깊은 펠리컨, 주 예수님’처럼 성찬례 안에서 당신의 살과 피를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으로 표현하였습니다. 2층 창문 위에 둥근 원 안에는 카르투시오회를 나타내는 합성 문자인 ‘CART’를 합친 글자 위에 십자가가 새겨져 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서면 바로 평수도자들이 사용했던 공간이 나옵니다. 정면 성직 수도자와 평수도자의 공간을 분리하는 문 위에는 17세기 독일의 예술가가 만든 나무 십자고상과 성모 마리아 그리고 사도 요한 조각상이 있습니다. 그 밑으로 세레나의 돌(2) (pietra serena)로 정교하게 만든 또 다른 문을 볼 수 있는데, 이것을 통과하면 사제 수도자의 기도석과 제단이 나오게 됩니다. 같은 수도원에서 살았지만 평수도자는 사제 수도자들과 마주치거나 말을 할 수도 없었고 기도도 분리된 공간에서 하였습니다. 해서 시토 수도원의 성당 기도석은 기도 수도자와 콘베르시 수도자의 자리가 분리되어 있어도 성당 중앙에 열려있는 공간에서 함께 기도했다고 한다면, 카르투시오회의 평수도자는 소리는 들리지만 볼 수는 없는 완전히 분리된 공간에서 기도를 하였습니다.
기도보다 일하는 시간이 많아서 그런 지 1590년에 만들어진 평수도자들의 나무 기도석은 사제 수도자의 기도석보다 훨씬 초라해 보이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들의 숙소와 평수도자의 성당 출입구는 사제 수도자의 것과는 역시 분리되어 있고 왼편 문을 통해 나가면 평수도자의 독방이 있는 사각 정원이 바로 연결이 되어있습니다.
독방보다는 외부 생활이 많은 평수도자들의 삶을 한눈에 보여주는 구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그만 정원 주위에 있는 방도 사제 수도자의 것보다 훨씬 작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평수사의 방은 은수적 생활보다는 잠을 자고 쉬는 목적이 더 컸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수도원 안에서 위치한 자리도 일하기에 편리하도록 다른 장소들과 직접적으로 잘 연결돼 있습니다. 긴 복도를 통해 공동 식당과 사제 수도자의 사각 정원과 연결되어 있고, 외부 손님을 맞는 포레스테리아와도 연결되어 있는 통로가 있습니다.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기도하는 성당과도 맞붙어 있습니다. 원래는 단층으로 되어 있던 것을 15세기 말 르네상스 양식의 2층 구조로 바뀌어 평수사의 방은 2층에 위치하고 있고 아래층은 수도원의 비품이나 평수사들이 일할 때 사용하는 도구들을 넣는 방으로 사용하였습니다.
‘우리가 더 자주 함께 모이는 날들인 주일들과 대축일들에 우리는 식당에서 함께 저녁식사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가족적인 삶의 기쁨을 맛보게 된다. 성당에서 성무일도를 마친 후에 들어가는 식당은 우리에게 그리스도께서 신성하게 만드신 식사인 최후의 만찬을 상기시킨다. 식탁은 공동체 미사 거행을 통해 축복된다. 몸을 위해 음식이 우리들에게 공급되고 있는 동안 우리는 동시에 거룩한 것들에 대한 독서를 통해 영적으로 양육된다.'
- 카르투시오 회헌 22,7 -
평수도자의 정원에서 사제 수도자의 정원으로 연결된 통로로 가다 보면 중간에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이 문을 통해서 부엌에서 음식을 직접 사제 수도자에게 가져다주면 될 것 같은데 이곳에서도 서로의 얼굴을 보지 않기 위해서 문 옆에 음식을 넣어주는 문 보다 더 큰 또 다른 문이 있습니다. 양쪽에 여닫이문이 있어서 평수사가 음식을 넣고 문을 닫으면 사제 수사가 문을 열어 음식을 자리로 가져가는 구조입니다.
카르투시오회의 식당은 주일과 축일 점심에만 사용을 하였기 때문에 다른 수도회의 식당보다 규모나 밝음이 더 적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식당 구석에는 식사 중에 복음이나 말씀을 읽는 독서대가 있습니다. 사제 수사들은 대화의 작은 정원 쪽으로 만들어진 입구를 통해서 이 식당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성당 북쪽 편에 위치한 이 정원은 14세기 처음 지어졌을 때는 중앙으로 빗물이 흘러내리게 한 지붕이 있는 단층 구조였고 1557년도에 베르나르디노 바씨의 시모네 (Simone di Bernardino Bassi)에 의해 2층 공간이 만들어졌습니다.
이 정원은 사제 수도자들의 장소로써 그들에게 독채 밖에서의 삶의 가장 중심이 되는 공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시토회처럼 많은 수의 수도자가 있지도 않았고 또 정원에서 머무는 시간도 적었기 때문에 크기는 세로 19미터 가로 17미터의 넓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정원을 중심으로 남쪽으로는 대화의 방과 함께 성당으로 연결되는 문이 있고, 동쪽으로는 수도원의 중요한 사항과 베네딕도의 규칙서를 읽는 규칙서의 방이 있고, 북쪽으로는 공동 식당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습니다. 식당 문 왼편에는 손을 씻을 수 있도록 1495년도에 세레나 돌로 만든 세면대가 있고 양옆에는 수건걸이대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 위에는 1496년 마이아노의 베네데또가 만들고 롭비아의 안드래아가 유리로 덮은 두 천사 사이에 있는 성 로렌조가 순교의 증거물인 석쇠와 교회의 보물인 성서를 들고 있습니다.
체르토사(1) : 이탈리아에서는 카르투시오를 체르토사라고 부른다.
세레나의 돌(2) : 회색을 가지고 있는 사암의 일종으로 르네상스 시절 토스카나 지방, 특히 피렌체에서 조각 그리고 기둥이나 문 등 장식용으로 많이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