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수 생활의 선구자 성 로무알도의 카말돌리 수도회

중세 수도원 이야기

by Roma Vianney

클루니 수도회가 공동체 생활 안에서 전례의 적극적 참여와 영적 쇄신 그리고 육체노동을 통해 10세기 교회 안에 만연한 부패 (시모니아, 니콜라이즘, 성직 독신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였다면, 성 로무알도 (Romualdo)는 공동 수도 생활에서 한 발 떨어져 은수 생활로 교회 쇄신과 하느님을 찾으려고 했던 사람입니다. 애독 안에서 하느님을 만나려 했던 수도회 하면 일반적으로 카르투시오의 성 부르노를 먼저 떠올릴 수도 있지만 로무알도는 성 부르노 보다 반세기 일찍 태어나 이탈리아 중북부 지방에서 은수 수도 생활의 올바른 방법을 찾으려 했던 하느님의 방랑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파엔자 (Faenza)의 주교좌성당에 있는 성 피에르 다미아니 추기경의 무덤

로무알도가 태어난 952년도는 클루니 수도회라는 개혁 수도회가 프랑스에서 막 시작하던 때였고 은수 생활을 통한 수도 생활이 일반적인 시절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누가 가르쳐주는 사람도 거의 없던 시절이라 어떻게 보면 스스로 방법을 찾는 선구자적인 삶을 살아야 했었습니다. 바로 성 로무알도가 이런 베네딕도의 공동체적 규율 안에서 은수 수도 생활을 처음 개척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베네딕도 성인의 삶을 책으로 써서 많은 사람들을 공동체 수도 생활로 이끌었던 역할을 했던 사람이 성 그레고리오 대 교황이라고 한다면, 역시 성 로무알도의 삶을 기록으로 세상에 알린 성 피에르 다미아니 (Pier Damiani, 1007-1072)의 역할이 컸다고 할 수 있습니다. 1035년에 로무알도 성인이 만드신 폰테 아벨라노 은수처에 들어간 이 성인은 비록 성 로무알도와 직접적인 만남은 없었지만 성 로무알도와 동시대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한 곳에 안주하거나 만족하지 않고 끊임없이 예수님의 온전한 사랑 안에서 은수 생활을 통해 일치하려는 성 로무알도의 삶을 이 전기문에서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책의 내용을 비추어 볼 때 성 로무알도의 삶을 세 시기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는 준비의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를 베네딕도 성인의 시간에 비유한다면 수비아코의 동굴에서 홀로 하느님에게 나아가는 방법을 구하던 시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 로무알도는 아버지의 잘못으로 사촌이 죽자, 그에 대한 속죄하는 마음으로 스무 살 되던 해에 라벤나 (Ravenna) 근처 클라쎄의 아폴리나레 수도원에 입회를 하였습니다. 이 시기의 수도원은 모두 베네딕도의 규칙을 따르던 공동체 수도원만 있던 시기였고 온전하게 하느님을 찾는 삶을 원했던 로무알도에게 아직 개혁되지 않은 이 수도원의 모습은 너무 자유로워 보였습니다. 해서 베네치아의 한 섬에서 은수 생활을 하고 있는 마리노라는 은수자를 찾아가 그 사람에게 처음으로 은수 생활을 배우며 함께 생활을 하였지만 이 은수자 마리노는 신앙심과 열정은 있었지만 남을 가르칠 수 있는 덕은 충분하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978년 스페인과 프랑스의 경계 산맥인 피레네에 있는 쿡사의 성 미카엘 수도원의 과리노 수도원장를 베네치아에서 만난 로무알도는 몇몇의 형제들과 그를 쫓아 이 수도원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곳에서 10년을 지내는 동안 수도원과 조금 떨어진 독채에서 죠반니라는 형제와 함께 은수 생활을 하게 됩니다. 둘은 함께 손 노동을 하며 기도 시간을 가졌고, 동시에 교부들의 삶에 대한 책과 5세기 때 은수자들의 삶을 모아 놓은 책을 보며 자신만의 은수 생활과 공동생활에 대한 방법을 찾아가기 시작하였습니다. 함께 온 형제들은 그러한 로무알도를 보며 스승처럼 생각하며 조언을 구하였고, 로무알도는 마리노 은수자와는 다르게 과하지 않은 분별력을 가지고 그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10년의 쿡사 수도원에서의 생활은 고향에서 들려온 아버지 소식과 함께 끝이 나게 되고 아버지를 도와주기 위해 다시 자기의 고향인 라벤나로 돌아오게 됩니다.


두 번째 시기는 열정과 반성의 시기입니다. 쿡사에서 돌아온 성 로무알도는 이탈리아 중북부 지역 곳곳에 은수처를 만들며 지내다가 라벤나에서 15킬로미터 떨어진 페레오 섬에서 은수 생활을 하게 되었고, 이곳에서 존경할 만한 굴리엘모를 만나 은수자의 삶에 대한 경험을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젊은 황제였던 오토 3세 황제를 이곳에서 만나게 되는데 황제는 로무알도의 삶을 존경하게 되고, 제국의 땅 안에서 교회 개혁을 위한 조력자로서 그를 선택하여 클라쎄의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아빠스가 되어 주기를 원하였습니다. 로무알도는 대수도원의 아빠스가 되기를 원치 않았지만 황제의 청을 받아들였고, 2년 동안 이 수도원에 머물며 수도승들의 영적인 삶에 도움을 주려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사실 로무알도는 수도 생활의 방법에 있어 은수 생활을 우선적으로 두었지만, 그것을 전적인 방법이라고 생각지는 않았습니다.

로무알도의 기본적인 생각은 많은 사람들의 구원이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그 사람에게 맞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독채에서만 지낸 것이 아니라 곳곳에 은수처를 세우면서 찾아오는 제자들, 교회 고위 성직자들, 세상의 돈 많은 백작들, 심지어는 자기를 찾아온 황제까지, 모든 사람들을 만났던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가 생각한 은수 생활을 따라오지 못하면 스스로 공동체를 떠난 적도 있었고, 반대로 제자들이 스승의 생각이 너무 이상적이라 생각하여 포기한 적도 있었습니다.


999년 12월 로무알도는 오토 3세 황제에게 목자의 지팡이를 집어던지며 아폴리나레 수도원의 아빠스 직을 사임하였습니다. 한편으로 실망감을 안고 로마로 내려오게 되는데, 이곳에서 황제의 군대 사제였던 부르노를 만나게 됩니다. 후에 ‘다섯 형제들의 삶’이라는 책을 쓰게 되는 부르노는 자신의 모든 지위를 버리고 로무알도를 쫓아 페레오의 섬으로 들어와 그의 지도를 받으며 은수 생활을 하였습니다. 다시 이곳에 찾아온 오토 3세 황제는 이번엔 로무알도에게 형제 몇 명을 이교도들이 있는 동쪽 자신의 땅으로 보내 복음을 전하고 그리스도의 삶을 보여줄 수 있도록 해달라고 하였습니다. 이 요청에 응하여 선교지로 떠난 요한과 베네벤토의 베네딕도 그리고 다른 세 명의 형제는 1003년에 이교도의 땅에서 복음을 전하다 순교를 하였고, 이것에 관한 기록이 부르노가 쓴 ‘다섯 형제들의 삶’의 내용입니다. 브루노는 마치 자신에게 일어날 것 같은 예언서처럼 이 책을 썼고 후에 선교사로 떠난 브루노도 1009년에 리투아니아에서 순교를 하였습니다. 자신의 제자들이 선교지에서 순교를 하였으니 기뻐할 수도 있었겠지만 사실 로무알도에게 있어 선교에 대한 열망은 그리 강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오히려 방랑 생활 속에서 새로운 은수 공동체를 만들어 그들에게 이 삶을 계속할 수 있도록 강한 영적인 힘을 주어 기존의 수도원 개혁을 이루는 것이 자신의 임무로 더 강하게 느껴졌을 것입니다. 이런 지향은 13세기에 등장하는 선교와 복음 전파를 중요하게 여겼던 프란치스코회나 도메니코회와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 번째 시기는 완성의 시기입니다. 이때는 로무알도가 은수 생활의 경험이 많이 축적된 시기였고 다양한 제자들과 생활하는 은수처를 이탈리아 중동부 쪽에 있는 아펜니노 산맥을 따라 여러 곳에 수도 공동체를 세우기 시작한 때입니다. 1009년에 발 디 카스트로 공동체, 1012년에 폰테 아벨라나 공동체, 1014년에 시트리아 공동체, 1023년에 카말돌리 공동체를 세웠습니다. 작은 수의 인원으로 된 이 공동체들은 베네딕도회나 시토회 같은 체계적인 수도원은 아니었고, 어느 정도 로무알도가 생각한 수도 생활이 가능한 사람들을 받아서 체계를 잡으며 살 수 있는 공동체였습니다. 물론 성인 사후에 이 공동체들이 모두 온전하게 유지되지는 않았지만 카말돌리 공동체가 10세기를 유지해 내려오며 카말돌리 회라는 수도회가 탄생이 되었고 모든 카말돌리 수도원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사실 성 로무알도가 카말돌리에 은수 공동체와 수도원을 동시에 세웠다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카말돌리에서 2킬로미터 떨어져 있는 폰테보나 수도원이 성인 선종 80년 후에 만들어졌다는 것이 이 사실을 증명하는 단적인 사실일 것입니다. 단순한 은수 생활을 중요시 여겼던 성 로무알도는 공동체가 커지는 것을 두려워하였습니다. 공동체가 커지면 신자들의 기증도 증가하면서 땅과 건물 등 수도원 소유물이 늘어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세상 사람들의 뜻이 수도원에 개입을 하면서 하느님을 만나기 위한 기다림의 수도 생활은 불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각 공동체를 수도원이라 부르지 않았고 아빠스라는 대수도원장도 두지를 않았습니다. 그냥 공동체를 대표하고 이끌어 갈 수 있는 선임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쁘리오레 (Priore)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하였습니다. 그리고 베네딕도 규칙에 기초를 하여 생활하였기 때문에 기도와 자신들에게 기본적으로 필요한 손노동은 역시 이들에게도 필수였습니다. 기도는 하느님과 일치하려는 방법으로써 시편 기도를 가장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로무알도는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은수 생활의 규범을 적지는 않았습니다. 하지만 브루노가 쓴 ‘다섯 형제들의 삶’에서 로무알도의 생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천국인 것처럼 독방에 앉아 있으십시오.

세상의 모든 것을 어깨너머로 던져 잊어버리고,

경험 많은 낚시꾼이 물고기를 기다리듯 좋은 생각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이것을 위한 유일한 방법은 시편 기도입니다.

당신이 초심자라면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없겠지만,

여기저기 시편을 찾아 노래하고 영적인 마음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십시오.

그리고 시편을 읽으며 분심이 들기 시작한다면

영혼을 멈추지도 잃어버리지도 말고 다시 집중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모든 것을 하느님 앞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엄마가 주지 않으면 먹을 것도 없고 음식의 맛도 없습니다."


로무알도는 이 규칙을 실제로 살았고 영적인 체험으로 하느님께 나아가는 좋은 길임을 확신하였습니다. 크로아티아의 이스트리아 반도에 있는 레메 운하 (canal di Leme) 근처의 한 자연 동굴에서 1002년과 1014년 두 번 은수 생활을 하셨다고 하는데, 첫 번째 해 2년 반을 마귀가 산다는 동굴에서 머무시며 얻은 영적 체험은 그의 방법이 올바르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때의 체험은 눈물의 은사였고 복음에 대한 영적 이해였으며 기도 안에서 예수님과의 신비한 결합이었습니다.


까말돌리 공동체 안에 외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건물 (foresteria)이 만들어졌고, 이것은 그 후 이 은수자들의 공동체를 돕고 보호할 수 있는 진정한 수도 공동체의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네 번째 이 은수 공동체의 수도원장이었던 복자 로돌포 (1074-1089)는 첫 번째 카말돌리 수도회의 규칙서를 만들게 되고 이것은 1113년에 파스칼 2세 교황의 인준을 받게 되었습니다.


성 로무알도의 은수 공동체의 발전에 대한 방황은 카말돌리에서 끝나지 않고, 발 디 카스트로 (Val di Castro) 수도원으로 거처를 옮겨 근처 은수처에서 삶을 이어갔고 1027년 6월 19일 모든 제자들을 물리치고 하느님과의 애독으로 독방에서 선종을 하였습니다. 그의 유해는 현재 파프리아노 (Fabriano) 시에 있는 성 비아죠와 로무알도 성당에 모셔져 있습니다.


'성 비아조와 로무알도 성당' 지하 크립타 제대에 있는 성 로무알도의 무덤

성 로무알도에게 은수처는 세상과 떨어져 자기만의 구원을 위해 사는 곳이 아니라 마치 어둠 속에 빛나는 촛불이 되어 세상 사람들이 그 빛을 찾아와 보고 배울 수 있는 학교와도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었습니다. 세상에 관심이 없는 것이 아니라 세상과 올바른 소통을 위한 목적으로 은수 생활이라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래서 처음 다섯 개의 초막으로 시작한 카말돌리 공동체에도 외부 사람들이 머물 수 있는 오스피찌 (ospizi)라는 장소를 만들었고, 카말돌리의 은수자들은 베네딕도회의 손님을 주님처럼 섬기라는 규칙 이상으로 손님들이 이곳에서 자기들의 영성을 배우고 따라올 수 있는 길을 보여주려고 하였습니다. 성 로무알도는 이렇게 하나의 촛불이 열 개, 백 개의 촛불이 되어 모든 세상이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진정한 은수처가 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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