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동탄에서 서울로 이사하며 집 크기를 반으로 줄였습니다. 별생각 없이 큰 집에서 쓰던 물건을 다 가져왔더니 집이 가득 차버렸습니다. 집은 반으로 줄고, 물건은 가득 들어차서 제가 생활하는 공간은 반이 아니라 사분의 일이 되었습니다.
미니멀리즘에 대한 관심은 이렇게 현실적인 불편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집에 들어설 때마다 물건을 피해 이리저리 둘러 다니는 내 모습이 어이없어서 물건을 버리기로 했습니다. 안 쓰는 것들은 당근 마켓에 팔고 안 입는 옷은 굿윌스토어에 기증했습니다. 2년간 안 입은 것들만 골라서 기증하겠다는 생각으로 옷을 추려서 들고 갔더니 그 수가 무려 74점이었습니다.
나름 열심히 정리했지만 내보내는 짐에 비해 집은 쉽게 깔끔해지지 않았습니다. 무작정 버리는 게 답이 아니란 생각이 들어 책이라도 좀 보고 시작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렇게 고른 책이 <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입니다.
저자 아키는 일본에 사는 워킹맘입니다. Living Small이라는 유명 블로그의 주인이기도 합니다. <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는 아키가 직접 미니멀리즘을 실천하는 방법을 자기 집, 공간의 사진과 함께 설명하는 실용서입니다.
애자일이 왜 거기서 나와...?
생소한 분들도 있겠지만, 소프트웨어를 개발할 때 애자일 개발(agile software development)이라는 방법이 있습니다. 처음부터 전체를 설계하지 않고, 작은 요소를 만들어 시험하고 수정을 반복하면서 최종적으로 전체를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도중에 궤도 수정이 가능하기 때문에 목적과 필요에 맞는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수납도 마찬가지로 신경 쓰이는 부분부터 야금야금 바꾸다 보면 언젠가는 집 전체가 정리됩니다.
책을 읽다 깜짝 놀랐습니다. 저처럼 IT 업계에서 일하는 사람이나 익숙할 용어인 애자일이 집을 정리하는 데서 등장합니다. 인용문에 나와있듯이 애자일 개발은 2주~3주 정도의 짧은 사이클로 작은 단위의 목표를 잡고 달성하면서 빠르게 방향을 수정해나가는 업무 방식입니다. 처음부터 최종 결과물을 거창하게 잡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발견되면 빠르게 고칠 수 있습니다. 아키는 이 방식을 집 정리에 도입해서 즉시 고칠 수 있는 만큼만 고쳐보고 조금씩 수정 보완하는 형태로 수납을 완성시킵니다.
이 뿐만 아니라 아키는 집을 정리하는 데에 절차 개선 이터레이션 방법론인 Plan-Do-Check-Act(PDCA)까지 활용합니다. 고쳐야겠다고 생각한 부분은 계획하고, 실행하고, 평가한 다음, 개선합니다. 앞서 나온 애자일과 마찬가지로 집안일을 고정된 루틴이 아니라 늘 점검하고 개선해야 하는 업무의 사이클처럼 대합니다. 미니멀리즘에 관한 책에서 볼 거라고 기대한 용어들은 아니죠?
저자에게 집안일은 회사 업무와 같습니다. 빨리 해결할수록 좋고, 그 과정은 계속해서 효율화합니다. 집안일을 효율적으로 끝내면 그만큼 자기 시간이, 아이와 함께 보내는 시간이 늘어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프로세스를 적용합니다. 정리를 좋아해서 미니멀리스트가 된 것이 아니라 집안일을 최소화하고 시간을 만들기 위해 미니멀리스트가 된 듯합니다. 납득이 됩니다.
이익은 매도가 아니라 매수 시점에 결정된다.
부동산이든 주식이든 투자를 시작할 때 듣는 가장 유명한 격언입니다. 수납과 물건을 고르는 저자의 행동을 보며 떠올랐습니다. 저자가 물건을 고르는 모습을 보며 질서는 손을 댈 때가 아니라 물건을 들일 때 결정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길을 가다 마음에 드는 게 있으면 우선 사는 편이었습니다. 그렇게 가져다 놓은 물건은 '보유 효과', 즉, 물건을 가지지 않았을 때보다 가지고 있을 때 더 높게 평가하는 경향이 생겨 쉽게 버리지 못합니다. 아키는 이 부분을 인식하고 물건을 가지기 전에 결과를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계란을 사더라도 늘 한 판이 아니라 6개씩 소량 포장된 제품을 고릅니다. 보통은 좀 더 싸고 언젠가는 쓸 거란 생각에 대량 포장된 제품을 고르지만 이렇게 하지 않습니다. 정확히 계획된 만큼 구매해서 낭비를 줄입니다. 수건의 경우에도 "빨래는 매일 한다."라는 규칙이 있기 때문에 여분을 마련해두는 대신 딱 필요한 양, 저자의 경우에는 3장 정도만 둡니다. 아이의 옷도 자랄 때를 대비해 넉넉한 사이즈로 고르는 것이 아니라 정확히 지금 입고 버릴 수 있는 가격과 사이즈로 입힌 뒤 맞지 않게 되면 과감하게 버립니다.
버릴 고민을 없애는 것이 정리의 비결이었습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미니멀리즘
정돈된 삶을 싫어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없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미니멀리즘을 완성시키지 못 한 이유는 아마도 너무 높은 목표를 잡았기 때문일지 모릅니다.
저는 꽤 오랫동안 내 짐을 여행용 캐리어 두 개에 담을 만큼 줄여보자는 계획을 가지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이 계획은 계획으로만 남아 있습니다. 목표가 너무 멀기에 첫 발도 내딛지 못한 탓입니다.
<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와 함께 읽은 책이 <궁극의 미니멀 라이프>(아즈마 가나코, 즐거운상상) 입니다. 제목처럼 저자는 형광등 대신 전구 세 개로 살고, 냉장고나 세탁기 같은 흔한 가전도 들이지 않습니다. 환경을 걱정하는 저자의 고민을 이해는 하나 저 같은 일반인이 따라 하기엔 무리가 있습니다. 마치 여행용 캐리어 두 개에 모든 살림을 넣겠다는 저의 계획처럼 말입니다.
그에 반해 <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는 제목처럼 적당한 지점에서 타협합니다. 청소를 줄이기 위해 로봇청소기를 구매하고 이불은 세탁 및 보관 업체에 맡겨서 눈 앞의 복잡함을 줄입니다. 소비에 대한 욕구 역시 적은 양이지만 품질 좋(고 가격이 높)은 제품을 구매함으로써 해결합니다. 효율적인 소비를 위해서라면 비용도 충분히 지불합니다.
저자가 전하는 메시지는 간단합니다. 죄책감을 가지지 말란 것입니다. 할 수 있는 만큼 하고 절차를 효율화함으로써 할 수 있는 양을 서서히 늘리면 된다는 접근입니다. 합리적입니다. 제 방식대로 해석하면 "정돈된 삶과 넉넉한 여유시간을 위해서라면 다른 자원은 아낌없이 써라." 정도로 바꿀 수도 있겠습니다.
책을 읽은 뒤 가장 먼저 실행에 옮긴 것은 집안일 패턴을 정리한 것입니다. 저는 혼자 살기 때문에 세 식구가 함께 사는 아키처럼 매일 빨래를 하진 못합니다. 다행히 요리 역시 매일 하진 않습니다. 일본에 사는 저자와 달리 한국에는 침구류 보관 서비스나 미니멀리스트를 위한 제품 등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세탁을 해주는 업체는 여럿 있지만 아키의 조언을 그대로 따르기는 힘든 부분이 있었습니다. 이런 부분은 아쉽지만 저의 사정에 맞추어 수정해야 했습니다.
현실에서 직접적으로 생긴 변화는 '정리 바구니'를 도입한 일입니다. 물건은 정해진 장소에 수납하되 이 바구니 안은 굳이 정리할 필요가 없다는 규칙. 단순하지만 기발했습니다. 저는 양말과 속옷을 갤 때마다 "어차피 내일 신거나 입을 텐데 내가 왜 이걸 하지?"라는 생각에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는데 이제는 정리 바구니에 대충, 그렇지만 적당히 깔끔하게 담아두게 되니 강박도 줄어들고 죄책감도 덜었습니다.
그래서 이제는?
<나에게 맞는 미니멀 라이프>는 읽기 전에 예상했듯이 미니멀리즘에 처음 발을 내딛는 초급자를 위한 책이었습니다. 무슨 일이든 초급자에게는 부담을 줄이고 한 발짝 내딛게 만드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런 면에서 참 좋은 내용이었습니다.
이제 나름 첫 발을 내디뎠으니 앞으로는 이런 주제에 관심을 가지려 합니다.
한국에 맞는 미니멀 라이프
집과 정리뿐 아니라 삶 전반에 적용한 미니멀리즘
미니멀리즘에 적합한 물건을 고르는 원칙
같은 주제들입니다. 혹시 저에게 추천하고 싶으신 책이 있다면 많은 제안 부탁드립니다 :)
아, 물론 책만 보지 않고 실생활에서도 실천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