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다섯 시 지나 저녁밥 먹고서는
[12] 오후 다섯 시 지나 저녁밥 먹고서는
申牌後喫晩飯 오후 다섯 시 지나 저녁밥 먹고서는
擺擺走燈市內 등시(燈市) 안을 건들건들 걸어가네.
捱着肩疊着足 어깨를 비집고 발들을 밟으니
好箇人山人海 인산인해 이룬 모습 좋기도 하구나.
[평설]
이 시는 등시(燈市)의 떠들썩하고 붐비는 모습을 그렸다. 등시는 등롱을 파는 시장이지만 때로는 골동품이나 호사품을 팔기도 한다. 등시는 중국에서 정월 대보름에 크고 화려하게 벌이는데 북경이라면 동화문 밖에서 열린다. 북경의 등시가 워낙 유명해 일주일 정도 하기 때문에 연행사들이 곧잘 화제에 올리곤 한다. 조선에서는 태종 때 대보름의 장등(張燈)을 없애고 사월 초파일에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의 등시는 섣달 그믐날과 사월 초파일 행사를 위해 한 것이 많다. 이 시는 북경의 등시를 말하는지 한양의 등시를 말하는지 명확하지 않다.
시는 해질 무렵 저녁을 먹고 한가하게 등시를 거니는 흥취가 절로 우러난다. 전반부 2구는 등시를 찾아가는 시간을 나타냈고, 후반부 2구는 등시 안의 모습을 등롱보다는 붐비는 사람에 초점을 맞추어 묘사하였다.
이언진은 시장을 좋아하였다. 북경에 간 사람 중에는 “선비는 시장에서는 볼 것이 없는 법이다. 하물며 상국에 있을 때이겠는가.”라고 하여 일부러 가지 않은 사람도 있다. 이런 점을 연상하면 시장과 골목에 대한 묘사는 그 자체가 어떤 반역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여지도 있어 보인다.
[어석]
신패(申牌): 오후 3시에서 5시 사이. 보통 낮과 저녁을 가르는 시간을 가리킨다. 관아나 역참(驛站)에서 시각이 바뀔 때마다 시각을 알리는 패(牌)를 내걸었기 때문에 일컫는 말이다.
끽(喫): 먹다. 흘(吃)과 같다. 명청 소설에선 끽(喫)으로 썼지만 현대 중국어에선 흘(吃)로 쓴다.
파파(擺擺): 목적 없이 구경하며 느릿느릿 걷는 모습을 묘사한 의태어. 휘적휘적, 한들한들, 뒤뚱뒤뚱, 건들건들.
애착견(捱着肩): 어깨를 비집다. 붐비는 가운데 어깨를 비집고 나아가다. 착(着)은 동사의 지속이나 동시동작을 나타내는 조사이다. 중국어의 애견첩족(挨肩疊足)이라 하여 붐비는 상태를 형용한 말로 쓰인다. 첩착족(疊着足)은 다른 사람의 발 위에 발을 디디다. 또는 다른 사람의 발자국 위에 발을 디디다. 애(捱)는 애(挨, 접근하다)의 뜻으로도 쓰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