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조,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고 읊다[讀項羽本紀]」
20. 떠날 기회를 놓친 범증
鴻門帳外楚聲皆(홍문장외초성개) 홍문의 휘장 밖엔 모두가 초 나라 음악인데
隆準俄從百騎來(융준아종백기래) 한고조 금세 일백 기병 데려 왔었네.
浪死居巢頭白老(낭사거소두백로) 덧없이 죽은 범증 머리 흰 늙은이로서
未聞此日乞骸回(미문차일걸해회) 이날에 사직하고 갔다는 말 못 들었네.
정조, 「사기(史記)의 항우본기(項羽本紀)를 읽고 읊다[讀項羽本紀]」
[평설]
이 시는 홍문연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홍문연에서 항우와 한고조가 회동(會同)했을 때 한고조는 100여 기(騎)만을 거느리고 갔다. 범증은 한고조를 죽이라고 여러 번 눈짓했으나 항우가 기회를 놓치는 바람에 한고조는 단기(單騎)로 그곳을 빠져 나갔다. 여기에선 홍문연 거사가 실패로 돌아갔을 때를 범증이 항우를 떠날 적기로 보고 있다.
범증이 항우를 떠나야 할 시기를 두고서 예전부터 의견이 분분했다. 보통 항우가 송의(宋義)를 죽였을 때나 초회왕(楚懷王)를 죽였을 때를, 범증이 항우를 떠나야 할 적기로 보고 있다. 그러나 범증은 이 기회를 다 놓쳤다. 항우와 범증을 이간하는 한고조 진영의 계책에 휘말려 항우가 범증을 의심하게 되자, 이에 분개하여 사직하고 돌아가는 길에 팽성(彭城)에 이르러 등창으로 죽고 말았다. 사람의 관계란 영원할 수 없다. 특히 권력의 세계에서는 더더욱 그러하다. 먼저 떠나지 않으면 상대에게 비참한 꼴을 당하고, 먼저 죽이지 않으면 상대에게 죽임을 당한다. 지금에도 누구와 언제까지 관계를 지속시킬지는 여전히 어려운 문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