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3. 환택(宦澤):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것들 2

by 박동욱

1) 진실을 꿰뚫어 보는 눈

고려 공민왕 때 정운경(鄭云敬)이 전주 목사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한 승려가 환속하여 아내와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외출했다가 살해당했다. 아내가 관아에 호소했으나 증거가 없어 오랫동안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정운경이 아내에게 물었다.

“남편 외에 정을 통한 남자가 있었는가?”

아내가 대답했다.

“없습니다. 다만 이웃에 사는 남자가 늘 ‘늙은 중이 죽으면 함께 살자’고 농담하곤 했을 뿐입니다.”

정운경은 그 남자를 잡아 가두어놓고, 먼저 그의 어머니를 심문했다.

“아무 달 아무 날에 네 아들은 집에 있었나, 아니면 나갔는가?”

어머니가 대답했다.

“그날 아들이 밖에서 돌아와 친구와 술을 마셔 피곤하다고 했습니다.”

정운경이 즉시 물었다.

“함께 술을 마신 이가 누구인가?”

이에 범인이 곧바로 자백했다.



어떤 부인이 환속한 중과 살고 있다가 중이 살해당했다. 당연히 부인이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올랐다. 부인과 정을 통한 사람이 있었는지 묻자, 어떤 사람이 남편이 죽으면 함께 살자고 농을 했다는 말을 듣는다. 이것이 이 사건의 중요한 실마리가 된다. 정운경은 그 남자를 찾아 가둬 놓은 상태에서 그의 어머니를 심문한다. 남자가 오리발을 내밀 게 뻔하니 우회적으로 그의 어머니를 공략한 셈이다. 어머니로부터 아들이 사건 당일에 외출했다 돌아와 친구와 술을 먹어서 피곤하다고 했다는 진술을 확보한다. 이에 아들에게 그날 함께 마신 친구를 대라고 하니 꼼짝없이 사건 일체를 자백하였다. 부인과 정부(情夫)가 공모해서 남편을 죽이는 일은 단골로 등장한다. 이 사건이 부인과 용의자가 공모했는지는 분명치 않다. 정운경은 아내의 진술로 용의자를 특정하고, 그의 어머니를 공략해 자백을 받아냈다. 고문을 사용하지 않고서 알리바이를 통해 현명하게 범인의 자백을 받아냈다.




고려시대 김황원(金黃元)이 지방관으로 부임했을 때의 일이다. 관아의 아전이 살인강도 혐의자를 잡아오자, 김황원은 피의자를 자세히 살펴본 후 단호하게 말했다.

“이 사람은 도둑이 아니다. 당장 풀어주어라.”

판관 이사강(李思絳)이 강하게 반대하며 말했다.

“이 도적은 이미 자백하였으니 마땅히 처벌해야 합니다.”

그러나 김황원은 듣지 않았다.

얼마 후 다른 용의자가 체포되었는데, 과연 이 자가 진짜 살인강도였다. 이 일 이후 아전과 백성들이 모두 그의 신과 같은 통찰력에 감복하였다.



옛날에는 과학적인 증거보다 고문을 통한 자백에 많이 의존했다. 억울한 자백으로 처벌받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을까? 김황원이 자백을 마친 살인강도를 보고서 석방하라고 말한다. 그는 죄인의 눈빛과 태도에서 살기가 아닌 억울함을 읽어냈다. 얼마 뒤 진짜 범인이 체포되었다. 자칫 억울한 피해자를 만들 수 있었는데, 김황원의 예리한 통찰력이 한 명의 인생을 구했다.




나주 목사 시절에는 토호의 부당한 소송을 단칼에 기각한 적이 있다. 수년 후 승정원에 발탁되었을 때, 형조에서 재검토를 요청한 사건이 바로 그 토호의 소송이었다. 이몽량이 동료에게 말했다. “내가 이 소송의 얽힌 사정을 잘 알고 있다. 설령 나주 관아의 판결이 잘못되었다고 치더라도, 그것을 다시 살피는 관찰사 아문이 또다시 그르칠 리는 없다.” 동료가 “관청의 공문이 모두 일치하는데 무슨 증거로 그렇단 말이오?” 하자, 이공은 직접 서명란을 문질렀다. 종이 보풀이 일어나자 손톱으로 긁어보니 관인이 찍힌 얇은 종이를 덧붙인 위조문서였다. 황급히 형조에 보고해 사기를 바로잡았고, 당시 모든 관료가 그의 통찰력에 경악했다.



옛날에도 송사(訟事)가 많았다. 이몽량은 과거 자신이 기각했던 토호의 소송이 재검토 사건으로 올라온 것을 보고 의구심을 품는다. 형조에 재검토 요청이 올라왔다는 것은 관찰사가 토호의 손을 들어줬다는 뜻이다. 그는 자신의 판결이 정당하다는 확신 아래, 상급 기관인 관찰사가 오판했을 리 없다고 판단했다. 그러고는 관찰사의 공문서가 위조되었을 것이란 합리적인 의심을 품는다. 관인이 찍힌 부분을 손톱으로 긁어보니 아니나 다를까 도장을 오려 덧붙인 위조문서였다. 상급 기관의 판단이라고 무조건 따랐다면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뻔했다. 훌륭한 관리는 서류 이면을 읽을 수 있는 눈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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