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3. 환택(宦澤): 공직자가 지켜야 할 것들 9

by 박동욱

8) 슬기로운 관직 생활

첨지(僉知) 안종도(安宗道)와 정복시(鄭復始)는 같은 해 급제하여 괴원(槐院, 승문원의 다른 이름)에 함께 근무했다. 정복시의 직급이 안종도보다 낮았는데, 안종도가 질책하는 것이 지나치게 엄격하니, 정복시가 괴로워하면서 시를 지었다.

형강의 따뜻한 물결에 쏘가리 살찌는데,

괴원의 깊은 봄날 시간이 더디 가네.

안정자(安正字)의 깐깐함 어찌할 도리 없으니,

정권지(鄭權知)는 고향으로 돌아가느니만 못하네.

정복시의 집이 형강(荊江)에 있었기 때문에 한 말이다.


같은 해 과거 시험에 급제하여, 합격자 명단에 함께 이름이 오른 사람을 동방(同榜)이라 한다. 오늘날로 보면 동기생이다. 동방끼리는 모임을 열어 친목을 도모하고 유대감을 유지했다. 안종도와 정복시는 동방인데다 같은 곳에 근무하게 되었다. 운명은 얄궂게도 정복시를 안종도의 하급자로 만들었다. 안종도가 동방임에도 정복시를 어찌나 들들 볶았던지 시를 지어 괴로움을 드러냈다. 자신의 고향 땅에 쏘가리 맛이 그리운데 승문원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좌불안석이다. 안정자를 어찌해 볼 도리도 없어서, 자신이 고향에 돌아가면 좋겠지만 그럴 수도 없는 처지였다. 아는 놈이 더 무섭다!



세종 때 신상(申商)은 예조판서였고, 허조(許稠)는 이조판서였다. 두 사람의 근무 태도는 뚜렷이 달랐다. 신상은 정오에 출근해 해 질 무렵 퇴근했고, 허조는 새벽부터 출근해 해가 완전히 져야 퇴근했다.

어느 날 신상이 예조에 나왔으나, 얼마 안 되어 곧 나가 버리자 허조가 사람을 보내 전하게 했다.

“어찌하여 늦게 출근하고 일찍 퇴근하시오?”

신상이 크게 웃으며 답했다.

“대인께서 일찍 출근하신들 무슨 이득이 있으며, 제가 늦게 출근한들 무슨 손해가 있겠습니까? 각자의 업무 처리 방식이 다를 뿐이지요.”

신상은 상황을 보고 잘 결단했고, 허조는 부지런하고 엄격하게 실행하였다.


신상과 허조는 완전 딴판이었다. 신상은 늦장 출근에 조기 퇴근을 밥 먹듯 하고 허조는 새벽 출근에 늦은 퇴근이 일상이었다. 어느 날 신상이 일찍 퇴근하자 평소 못마땅하던 허조는 그 사유를 따진다. 신상의 대답이 걸작이다. 요지는 사람마다 스타일이 다르다는 말씀이었다.

조직에는 엉덩이로 일하는 사람과 일머리로 일하는 사람 두 종류가 있다. 허조 입장에서 신상은 월급 루팡을 하는 날라리 같고, 신상 입장에서 허조는 융통성 없는 FM이다. 시간은 성실을 보증해 주지만 성과를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아랫사람에게는 설렁설렁 일하는 것 같지만 효율은 좋은 신상 같은 상사가 더 유능해 보인다.





이재(吏才)란 도필(刀筆, 문서 작성하던 하급 관리)의 업무라 귀하게 여길 것은 못 되나, 재상으로서 이재를 갖춘 이는 또한 얻기 어렵다. 내가 젊어 명부에 이름을 올려 조정에 나아가, 낭관으로서 거공(巨公)들 사이를 노닐었는데, 오직 유서애(柳西崖), 이한음(李漢陰), 이백사(李白沙) 세 상국(相國)만이 이재에 뛰어났다.

임진년·계사년에 왜적이 들끓고 명나라 군대가 성에 가득하던 때, 긴급 군문이 빗발치듯 이어지고 공문서가 산더미처럼 쌓였다. 서애가 관청에 도착하면, 내가 빠르게 쓴다고 하여 반드시 나로 하여금 붓을 잡게 했다. 입으로 불러 문장을 이루니 편을 이어 문서가 쌓였고, 그 속도는 바람과 비와 같이 빨랐다. 붓은 쉴 새 없이 달렸고, 글은 고칠 필요 없이 찬연하게 문장을 이루었다. 비록 자주(咨奏, 명나라에 보내는 문서)라도 마찬가지여서, 사신(詞臣)이 교지를 받들어 정서하여 올릴 때도 그사이에 더하거나 뺄 수가 없었다. 참으로 기이한 재주였다. 한음과 백사도 그 버금가는 재주를 지녔다.



이재(吏才)는 관리로서 일을 처리하는 솜씨, 곧 행정 능력을 말한다. 재상인데 실무 능력까지 갖춘 인물을 손에 꼽을 만하였다. 신흠은 유성룡, 이덕형, 이항복 이 세 사람을 이런 인물로 들었다.『징비록』의 저자 유성룡은 그중 대단한 능력을 뽐냈다. 유성룡은 산더미 같은 공문서를 놓고 입으로 구술하며 신흠에게 받아 적게 했다. 말도 안 되게 속도가 빨랐는데, 글을 완성하고 나면 고칠 것이 하나도 없었다. 외교문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재상이라도 실무 능력을 꼭 갖추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 적어도 아랫사람이 제대로 일 처리를 하고 있는지 판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유성룡과 이원익에 대한 평가를 떠올리게 된다. 유성룡은 속일래야 속일 수 없는 사람이었고, 이원익은 차마 속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유성룡이 그만큼 일 처리에서는 딱 부러지게 했다는 의미다.




송순(宋純)이 이조참판이 되었을 때, 허자(許磁)와 마음을 합쳐 어진 이를 천거하다가 세상과 어긋나, 결국 외지로 유배되어 5년을 보냈다. 이로부터 관직을 버리고 돌아올 뜻을 품게 되었는데, 그의 서숙(庶叔, 할아버지의 서자를 숙부로서 이르는 말)이 자주 말하였다.

“지방에 살던 재상이 서소문으로 나가는 것은 보았어도, 남대문으로 나가는 자는 본 적이 없소.”

이는 대개 서울에서 벼슬하는 자가 죽을 때까지 (벼슬자리를) 떠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가 개성부사로 있을 때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자, 서숙이 강가까지 전송하였다. 공이 술잔을 앞에 두고 그에게 말하였다.

“이제야 비로소 남대문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소!”


송순은 1550년 58세의 나이로 진복창(陳復昌)과 이기(李芑) 등에게 논박당하여 충남 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당시 관직에 환멸을 느끼고 있을 때 서숙이 말했다. “관리가 서소문으로 나가는 자는 봤어도 남대문으로 나가는 자는 못 봤다” 이 말인즉슨 서소문은 시신이 나가는 문이니, 죽을 때까지 벼슬을 내놓지 못함을 비꼰 말이다. 그 후 송순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오자 서숙은 말했다. “이제야 비로소 남대문으로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스스로 관직을 그만둔 일을 칭찬한 말이다.

권력과 관직은 남들이 빼앗기 전에는 자발적으로 내려놓기 힘들다. 관직으로 인한 권력의 맛을 제대로 봤기 때문이다. 그래서 추하게 버티다가 쫓겨나거나 죽어서야 그만둔다. 시작할 때보다 그만둘 때 아름다운 사람은 많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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