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해분(解紛): 꼬인 매듭을 푸는 지혜 5
5) 억울한 연루를 막다
정윤복(丁胤福)이 도헌(都憲, 사헌부 장관)으로서 기축옥사(己丑獄事)의 국청(鞫廳)에 항상 참여하였다.
어느 날, 어떤 사람이 40여 명의 명단을 가지고 와서 역모를 고발하였다. 공이 국청(鞫廳)의 여러 재상에게 말하였다.
“이 명단을 자세히 살펴보니, 계원들이 모인 것 같습니다. 지금 만약 이들을 잡아서 엄하게 국문한다면, 반드시 옥과 돌이 함께 타버리는 환란이 있을 것입니다. 고발한 사람을 다시 심문하여 자세히 조사한 후 처리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여러 재상이 모두 그렇다고 하였다. 고발한 사람을 엄하게 심문하니, 과연 공이 말한 대로였다. 드디어 그 사건을 중지시켰다.
기축옥사(己丑獄事)는 1589년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꾀한다는 고변서에서 촉발되어 다수의 동인이 처벌된 사건이다. 2년 반 정도 지속되면서 1,000명 정도가 목숨을 잃었다. 고발이 꼬리를 물어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상황이 반복되었다.
누군가가 모임을 가진 40명의 명단을 가지고 고발했다. 단순한 친목 모임이 반역의 모의로 뒤바뀌어 버렸다. 마녀사냥에 가까웠다. 누군가가 먼저 외치면 진위와 상관없이 사실로 뒤바뀌어 버렸다. 정윤복은 고발한 사람을 조사하자고 제안한다. 고발한 사람이 어떤 연유로 고발했는지, 불순한 의도가 개입되었는지를 알기 위해서다. 무고(誣告)가 정쟁의 도구로 남용되는 것을 막아야 했다. 만약 고발한 사람의 말을 듣고서 일방적으로 처리했다면 어땠을까? 일단 다 잡아들여서 족치면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이 터져 나오고 사실로 확정됐을 것이다. 독재 시대에 간첩을 조작하던 수법과 다를 게 없다. 정윤복은 고발당한 사람을 조사하는 것이 아니라 역으로 고발한 사람을 조사함으로써 40명뿐 아니라, 그의 가족 등 수백 명의 목숨을 구해냈다.
효종 대에 대사헌이 논하여 아뢰었다. “통제사 유정익(柳廷益)에게 서얼 누이가 있는데, 김자점(金自點)의 첩이 되어 가장 친밀하였으니, 중요한 직책에 둘 수 없습니다.” 영의정 정태화(鄭太和)가 나아가 아뢰었다. “정익의 이름은 김자점(金自點)의 자백에 나오지 않았습니다. 만약 의심만으로 유정익을 파직한다면, 장차 사람마다 스스로 의심하게 될 것입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경의 말이 옳다.” 정태화가 다시 아뢰었다. “김자점이 오랫동안 정승 자리에 있었으니, 당시의 문무 관리 중 누가 그의 집에 출입하지 않았겠습니까? 만약 평소 알고 지냈다는 이유로 억지로 죄목을 씌운다면, 신은 조정에 온전한 사람이 없을까 두렵습니다.” 임금께서 말씀하셨다. “정국을 진정시키는 방책은 오로지 대신들에게 달려 있다. 짐이 경과 함께 이미 굳게 정한 바가 있으니, 비록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자가 있더라도 어찌 감히 그 독을 마음대로 펼치겠는가?”
김자점은 1651년 아들의 역모 사건 때 사형에 처해졌다. 공신으로서의 권력 추구, 궁중과의 파행적인 유착 관계, 청에 대한 매국 행위 등으로 인조 대 이후 오랜 세월을 두고 사림의 비난을 받았다. 역모 사건이 무서운 것은 역모 자체가 아니라 그 이후다.
식사 한번, 인사 한 번으로도 역모의 관련자가 되기에 십상이었다. 역모 관련 인물은 혈연을 시작으로 친구, 동료 등으로 무한 증식된다. 연좌제로 사람을 퇴출시켜서는 안 된다. 그 사람의 고유한 능력과 성과를 바탕으로 평가해야지, 누군가의 관계 때문에 등용하지 않는 것은 곤란하다. 이렇게 한 명 한 명 인사를 검증하고 보면 쓸 사람이 없게 된다. 스스로 인재풀을 축소시키는 결과다. 암세포 도려내려다가 목숨까지 끊어지는 것과 똑같다. 정태화는 이러한 숙청에 제동을 걸고 임금도 여기에 동조한다.
윤장원(尹長源, 장원은 윤결(尹潔)의 字)의 옥사로 인해 자백에 선친이 연루되었다. 선친(許曄을 가리킴)은 당시 병조 낭관으로서 승정원에 입직 중이었다. 추국관이 선친을 심문하려고 청하자, 마침 대사간 진복창이 입궐해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나 부복하며 아뢰었다. “허 아무개는 결코 경박한 사람이 아니옵니다. 그럴 리가 없음을 보증하나이다. 만약 잡아 국문하신다면 일이 더욱 확대될까 두렵사오니, 부디 추궁하지 마옵소서.” 진복창이 재삼 강하게 청하자, 문정왕후가 그 말을 옳다고 여겨 심문하지 않았다. 선친은 이런 일이 있었는지도 모른 채 정원(政院)에 도착하니, 승지들이 모두 화를 면한 것을 축하했다. 선친은 영문을 모르다가 물러나 병조에 돌아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여러 승지들이 모두 감탄하며 칭찬하였다. “화를 당해 간신히 면했는데도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으니, 참으로 강직하고 절개를 지키는 분이로다!” 선친은 늘 말씀하셨다. “뜻밖의 칭찬을 얻었구나.” 진복창은 나의 선친과 전혀 친분도 없었는데 능히 구해주었으니, 이 또한 운명이라 하겠다. 두 형은 진군의 아들을 만날 때마다 반드시 후하게 대하곤 하였다.
이 기록은 허균이 작성한 것으로 그의 아버지 허엽에 관한 이야기다. 허엽이 정치적 곤경에 빠졌을 때 그를 구원해준 것은 일면식도 없었던 진복창이다. 어느 구름에서 비가 내릴 줄 모른다. 인생에서 자신을 도와줄 사람은 기대했던 곳이 아니라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곳에서 찾아오는 경우가 많다. 진복창은 허엽을 살리면서 무차별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옥사도 함께 막아냈다. 허엽은 인생 최대의 위기에서 빠져나왔다. 경위를 몰랐기에 태연할 수 있었지만, 그의 태연함은 강철 같은 절개로 재해석 된다.
허엽을 지켜준 것은 누군가의 친분이나 인연이 아니라 믿을 만한 사람이라는 사회적인 평판이었다. 이런 평판은 인맥을 초월하여 작동한다. 평판은 쌓기는 어렵지만 무너지기는 쉽다. 평판만큼 그 사람이 살아온 세월에 대한 정확한 기록도 없다. 진복창은 알지도 못하는 허엽을 구했고 허엽의 자손들은 대대로 진복창의 자손에게 은혜를 갚았다.
인조(仁祖) 때에, 사간(司諫) 조경(趙絅)이 상소로 좌상(左相) 홍서봉(洪瑞鳳)을 논하며 ‘묵상(墨相)’이라고 지목하였다. 임금이 정원(政院)에 명하여 그 말이 누구에게서 들은 것인지 추궁하게 하였으나, 조경은 말하려 하지 않았다. 임금이 조경을 옥리(獄吏)에게 내려 심문하고자 하여 여러 대신에게 물었다. 김류(金瑬)와 김상용(金尚容)은 임금께 조경의 하옥(下獄)을 청하였다. 유기평(俞杞平) 백증(伯曽)이 특진관(特進官)으로서 입시(入侍)하여, 조경을 즉시 풀어주기를 청하며 말하였다.
“어탑(御榻)은 신하가 올라갈 곳이 아니나, 만일 바로 허락을 받지 못한다면, 신은 평상 위에 올라가 옷자락을 잡아당기더라도 기어이 청을 얻고 말겠습니다.”
임금이 웃으며 허락하였다.
조경은 1636년 6월 좌의정 홍서봉의 수뢰 사건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렸다. 여기에서 홍서봉을 묵상(墨相)이라 비판하였다. 묵상이란 염치를 모른 채 탐욕만 부리는 재상이라는 뜻이다.『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 소공(昭公) 14년에 “탐욕을 부려 관직을 망치는 자를 묵이라 하고, 사람을 죽이면서 거리낌이 없는 자를 적이라 한다.[貪以敗官爲墨 殺人不忌爲賊]”라는 말이 나온다. 홍서봉의 비리는 사실이었다.
임금은 조경의 배후를 캐려고 했다. 김류와 김상용도 거기에 동조하면서 결국 조경은 하옥되었다. 이때 유백증이 나서서 조경을 풀어달라고 말한다. 유백증은 어탑에 올라가서 옷자락을 잡아당기면서라도 임금의 뜻을 돌리려 하였다. 옷자락을 당긴다는 것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임금에게 간쟁한다는 뜻이다. 이러한 위험하고도 절박한 충언을 임금은 받아들여서 조경을 풀어주었다. 유백증은 국면을 전환 시켜 조경을 징계에서 구해냈다. 인조의 웃음은 정말 우스워서가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신하의 뜨거운 진심을 읽었기 때문이다. 조경은 목숨을 걸고 권력의 핵심부에 직격하자 하옥했고 유백증은 그런 그를 구제하기 위해 애를 썼으며, 선조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세 사람의 아름다운 콜라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