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돈화(敦化): 사람의 뿌리를 두껍게 하다 2
2. 우애(友愛): 형제, 한 몸에서 나뉜 가지
고려의 최열(崔烈)은 최사전(崔思全)의 아들이다. 아버지 사전이 일찍이 최열 형제에게 황금 술잔 한 벌을 물려주었는데, 최사전이 죽자 그의 첩이 그중 하나를 훔쳐 갔다. 형 최변(崔弁)이 크게 노하여 첩을 매질하려 하자, 최열이 말하였다.
“이 분은 선군(先君,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총애하신 분이옵니다. 마땅히 가산을 털어서라도 돌봐 드려야 하니, 하물며 이 물건이겠습니까? 제가 받은 것은 아직 있으니, 청컨대 형님께 드리겠습니다.”
왕이 듣고서 가상하게 여겨 말하였다.
“효도와 인자함을 두루 갖추었도다.”
그리고 어필(御筆)로 ‘효인(孝仁)’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아버지의 첩이 아버지가 최변과 최열 형제에게 물려준 황금 술잔 한 쌍을 훔쳤다. 최변은 아버지의 유품을 훔친 절도범에 대한 응징을 주장했지만, 최열은 아버지가 사랑한 사람에 대한 배려를 내세웠다. 최열은 가정 내부의 불화를 바깥에 알리지 않고 해결하는 방법을 찾았다. 최변의 술잔은 첩이 훔쳤고, 최열의 술잔은 아직 남았으니 최열이 그 술잔을 형인 최변에게 양보하였다. 훗날 임금이 이 사실을 알고는 최열에게 효성스럽고 어질다는 의미의 효인(孝仁)이란 이름을 하사한다. 최열은 술잔을 양보한 대신에 효인이라는 값비싼 명예를 얻었다.
공의 형 주(周)는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로 벼슬을 그만두었는데, 공이 매번 정부(政府)에서 큰일을 의논하는 것을 마치고 새벽닭이 울면 반드시 그를 찾아갔다. 찾아갈 때마다 반드시 동네 어귀에서 수행원들을 물리치고, 수레에서 내려 걸어서 들어갔다.
판부사는 공이 언제 올지 미리 알지 못했지만, 매일 밤 의관을 바로하고 등불을 켜며 자리를 베풀어 놓고 침상에 기대어 공이 오기를 기다렸다. 공이 도착하면 반드시 간단한 술상을 차렸다.
공이 천천히 물었다.
“오늘 정부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는데, 어떻게 처리하면 좋겠습니까?”
판부사가 말하였다.
“내 생각에는 마땅히 이러해야 할 것 같네.”
공은 기뻐하며 물러 나와 말하였다.
“‘사람은 어진 부형(父兄)이 있음을 즐거워한다.’ 하였으니, 이를 두고 하는 말이로다.”
허조는 새벽마다 은퇴한 형을 찾아 정사를 물었다. 수행원을 대동하지 않고 만난 것은 자신의 공적인 지위는 놓아두고, 형제간에 허심탄회한 대화를 하기 위해서다. 언제 자신을 찾아올지 모르는 동생을 위해 형은 밤새 준비해놓고 기다렸다. 형 허주는 관직에서 물러나 있었기 때문에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시각을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여러 관직을 거쳐서 실무 경험에서 나온 현실 감각도 도움이 됐을 것이다. 또, 형제라 보안 유지가 확실할 뿐 아니라, 자신의 유불리에 따른 왜곡된 의견을 들을 염려도 없었다. 허조에게 있어 형 허주는 최상의 자문가였다. 험난한 관직 생활에서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황호안(黃胡安)의 아우 열성공(烈成公)이 하인을 시켜 형의 뜰 안에 있는 감을 몰래 따서 가져오게 하여, 호안공을 초대해 함께 맛보게 하였다. 호안공은 그 감이 맛이 좋음을 감탄하였다. 그런데 집에 돌아와 보니 뜰 안에 있던 잘 익어 붉게 물든 감이 모두 없어졌으므로, 그제야 비로소 속아 넘어간 줄을 알았다. 그가 형과 즐겁게 농담하며 지내는 것이 이와 같은 일이 많았다.
마침 세조가 영응대군(永膺大君)의 집에 행차했다가 이 사실을 듣고는, 영응대군에게 말하였다.
"우리 형제의 우애도 마땅히 그와 같아야 한다."
황희의 두 아들 황치신과 황수신의 유쾌한 에피소드다. 형의 집에 있는 감을 몰래 따와서는 자신의 집에서 형을 대접한다. 뒤늦게 자신의 감인 줄 안 형은 자신이 속아 넘어간 줄 알고 호탕하게 웃었을 것이다. 가족 간에는 엄격한 격식과 체통보다는 약간의 장난기가 있는 것이 좋다. 결국 친하다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 이야기를 싫증 내지 않고, 늘 반복하며 나누는 것이다.
이들 형제의 우애는 또 일화에서도 확인된다. 눈이 많이 내려서 동행하기 어렵자 아버지 황희는 동생에게 형을 업으라고 했다. 그리고서는 눈 속에서 형을 내팽개치라 하고는, 내팽개쳐지자 아버지는 그것을 보고 웃었다. 아버지가 형제간에 격식과 서열보다 허물없는 사이를 강조하였다. 수직적인 위계보다 수평적인 관계 속에서 골육상잔의 비극은 있을 수 없다. 가족은 소박한 행복의 공동체다.
이 일화를 세조가 이복동생인 영응대군에게 말하며, 둘 사이도 그들의 우애와 같아야 한다고 했다. 영응대군은 세조와의 사이가 각별했다. 그러나 34살이란 이른 나이에 요절하였다. 세조는 영응대군을 매우 아껴 그가 죽자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 세조가 형제애에 관해 이야기를 나눈 대목은 여러 가지로 생각할 부분이 많다. 세조는 단종을 폐위시키고 왕위에 오른 인물로, 형제인 안평대군은 1453년 계유정난 후 귀양을 갔다가 교동도로 이배되고 사약을 받았다. 금성대군은 1457년 단종 복위 운동 연루 혐의로 역시 사약을 받았다. 정치는 조카와 친동생을 죽일 만큼 비정하다. 그러한 그도 이렇게 아무것도 아닌 소박한 형제의 풍경이 부러웠을지도 모른다.
일찍이 옛 노인의 말씀을 들으니,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이 물러나 여주(驪州)에서 살 때, 그의 아우 사재(思齋) 김정국(金正國)이 장단(長湍)에 살면서 매번 작은 배를 타고 찾아가 뵙곤 하였다고 한다. 아우가 형을 찾아뵙자 모재가 말하였다. “우리는 이미 늙었고, 남은 날이 얼마 되지 않는데, 어찌하여 이 근처로 집을 옮겨, 아침저녁으로 끊임없이 만나지 않는가?” 사재가 말하였다. “두 집안에는 각자 아녀자가 있으니 편벽된 사람이, 어찌 우리처럼 우애할 수 있겠습니까? 아우가 형을 보고 싶으면 아우가 오고, 형이 아우를 보고 싶으면 형이 오니, 이것이 처음부터 끝까지 어긋나지 않는 도리입니다.”
형인 김안국은 여주에 살고 아우인 김정국은 장단에 살았다. 여주와 장단의 직선거리는 40∼45km이니, 예전이나 지금이나 가까운 거리라 할 수 없다. 형은 멀리서 배를 타고 찾아오는 동생이 안쓰러웠던지 집 근처로 이사 올 것을 권유한다. 그러나 김정국은 각자 부인이 있는 형편이니 각자 사는 것이 더 낫다고 하며 거절을 한다. 만일 동서 간에 갈등이라 생기면 그나마 물리적 거리는 가까워도 심정적인 거리는 멀어질 수 있다는 판단에서였다. 친한 관계라고 해서 가까이 살고 자주 보는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니다. 공간이 가깝다고 감정이 가까워지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멀리서 살고 가끔 보면서 나머지 여백을 그리움으로 채워야 한다. 그래서 보고 싶은 사람이 보고 싶을 때 상대방을 찾아가는 것이 서로 좋다. 더 가까워지고 싶을 때 선을 지키는 것이 모든 인간관계를 건강하게 유지하는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