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적인 따스함과 공적인 서늘함
사적인 따스함과 공적인 서늘함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 나셨다. 함천공(咸川公, 이원익의 부친 李億載)이 중년 이후 여러 번 위독한 병에 시달릴 때마다, 공은 매번 어의(御醫) 안덕수(安德壽)를 찾아가 약을 문의하셨다. 안덕수가 늙어서 마비 증세를 보이므로 손님을 만날 수 없자, 한 하녀가 중간에서 말을 전했는데, 공께서는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소매 속에 예물을 준비해 그 하녀에게 주셨다. 안덕수는 그의 뜻에 감동하여 힘을 다하여 약을 지어 주었는데, 약은 항상 효험이 있었다.
공께서 함천공을 모실 때 관직이 막 집의(執義)나 승지에 있었으나, 함천공을 문안하러 오는 사람이 있거나 안부를 묻는 하인이 오면, 공이 반드시 몸소 안팎을 오가며 함천공의 말을 전하셨고, 하녀나 하인을 시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이 고관인 줄도 모르고, 한낱 효자로만 여겼다.
조카 이성전(李性傳)이 호서에서 객사하자, 공은 이미 관직이 높았고, 친히 관을 가져와 장례를 치르셨다. 또 성전의 아들 수함(守諴)이 함천공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자, 그를 위해 집을 마련해 주고자 하였으나 힘에 부치자, 지은 집을 넘겨주었다. 집은 본래 아들 의전(義傳)이 직접 자제를 모아서 지은 것이었다. 어진 마음을 미루어 친족을 보살피고, 녹봉을 나누어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셨다. 관청에서 퇴근하고 짬이 있으면 오직 친척 집안을 방문하는 것만 일삼았다. 하지만 결코 관직에 추천하거나 청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공께서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찍이 장상(將相)의 자리에 올라 지위가 낮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시대 흐름과 맞지 않아 이 몸도 스스로 도모하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친지를 천거할 수 있었겠는가? 뜻밖에도 만년에 성군을 만나 조카와 손자들이 송구스럽게도 관직 명부에 오른 자가 많아 나는 매우 두렵고 부끄럽구나. 내가 양전(兩銓,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합칭이다.)에서 인재를 천거한 적이 없지 않으나, 양전에서는 대부분 등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내 자제들에게 관직을 주었으니, 어찌 내가 사사로이 사랑해서이겠는가?”
오리 이원익은 청백리의 표상이다. 하지만 효심 앞에서는 체면도 내려놓았다. 고관 신분임에도 병든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의 하녀에게 선물을 주며 부탁했다.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아랫사람들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그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였다.
가족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조카가 객사하자 직접 장례를 치렀고, 조카의 아들이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이 공들여 지은 집을 뺏다시피 하여 넘겨주었다. 내 자식의 재산보다 가문의 제사를 모시는 종손의 안위를 더 챙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가족애는 관직 앞에서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사적인 보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가족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지만, 친족을 관직에 추천하거나 청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자신이 힘을 쓰지 않고 임금이 자손들에게 벼슬을 내려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는 고위공직자로서 가족을 천거하거나 등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리와 비난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친척을 위해 아들의 집까지 내줄지언정, 나랏일의 자리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자리도 내어주지 않았다. 공직에 있으면서도 공적 도구의 사유화는 가장 크게 경계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에서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권한을 사용하는 사람은 가뭄에 콩 나듯 만나기가 어렵다. 사적인 따스함과 공적인 서늘함의 균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