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덕으로 집안을 다스리다: 제가(齊家)
5) 덕으로 집안을 다스리다: 제가(齊家)
장령(掌令) 기대정(奇大鼎)의 집안 법도는, 자식과 사위 중에 과거에 급제한 자에게는 따로 재산을 챙겨주지 않았다. 오직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고아나 과부로서 스스로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자에게만 비로소 재산을 따로 챙겨주었다.
이는 과거에 급제한 자는 이미 영달의 길을 얻었으니 그 부를 더할 필요가 없고, 병을 앓고 있는 사람과 고아나 과부는 스스로 생계를 꾸려나갈 수 없어 반드시 떠돌다 굶어 죽게 될 것이니, 부모 된 자로서 마땅히 깊이 염려하고, 보호할 방도를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유산을 상속하는 데는 두 가지 방식이 있다. 자식마다 기계적으로 균등하게 나누어주는 방식과 형편이 어려운 자식에게 더 챙겨주는 방식이다. 각각의 장단점이 있으니 어느 것이 정답이라 단정 짓기는 어렵다.
기대정은 후자의 방식을 따랐다. 과거에 급제한 자식은 제 살길을 마련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들에게 더 많은 재산을 얹어주는 것은 오히려 자립심이나 성취동기를 훼손할 수 있다. 반면 병에 들거나 혼자된 자식은 누군가의 도움 없이는 생존 자체가 위태로운 사회적 약자다. 기대정은 이들에게 우선적인 생계 수단을 마련해 줌으로써, 최소한 내 피붙이가 굶어 죽는 참상만은 막고자 했다. 이는 부모로서 자식들 간의 차가운 공평보다는 따뜻한 안배를 선택한 지혜다. 스스로 설 수 있는 자에게 유산은 독이 될 수도 있지만, 생계조차 위협받는 자에게 유산은 단비가 되어 준다.
조정암(조광조를 가리킴) 선생이 대사헌이 되었을 때, 선생과 같은 해에 진사가 된 사람 중에 가정이 불화한 자가 있었다. 그는 아내를 내보내고자, 가까운 사람을 보내 칠거지악의 의리를 들어 선생께 와서 아뢰었다.
선생이 엄숙한 표정으로 말하였다.
"부부는 인륜의 시작이며 만복의 근원이니, 그 관계가 지극히 중요하다. 부인의 성품이 어둡고 우둔하여 비록 실수가 있더라도, 군자 된 자는 마땅히 바름으로써 이를 대하여 그로 하여금 감화되게 하고 함께 가도(家道)를 이루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후덕(厚德)이다. 만약 모범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갑자기 아내를 내보내고자 한다면, 박정(薄情)에 가깝지 않겠는가? 하물며 이는 한 가정의 윤리 안에서 벌어진 일이니, 바깥사람들이 감히 참견할 바 아니다. 깊이 생각하여 스스로 처리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칠거지악은 아내를 내쫓을 이유가 되는 일곱 가지 사항이다.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는 것[不順舅姑]ㆍ자식을 못 낳는 것[無子]ㆍ행실이 음탕한 것[淫行]ㆍ질투하는 것[嫉妬]ㆍ나쁜 병이 있는 것[惡疾]ㆍ말썽이 많은 것[口舌]ㆍ도둑질하는 것[盜竊] 등이다. 여기에 해당한다고 해도 무턱대고 쫓아낼 수는 없다. 칠거지악에 해당한다고 하더라도 삼불거(三不去)라 하여 세 가지 경우에 해당하면 아내를 쫓아낼 수 없었다. 첫째로 시부모의 삼년상을 함께 마쳤을 때, 둘째로 장가들 때 빈천하였으나 나중에 부귀하게 되었을 때, 셋째로 돌아갈 곳이 없을 때이다.
누군가 자기 아내가 칠거지악을 저질러 쫓아내고자 하여 대사헌인 조광조를 찾아와 의견을 물었다. 사헌부의 수장인 대사헌은 관료의 비행을 감찰하고 풍속을 바로잡는 막중한 직책이었다. 따라서 사대부의 이혼 문제 또한 단순한 가정사가 아닌, 인륜과 도덕을 바로 세우는 차원에서 관여할 수 있었다. 조광조는 아내의 성품에 문제가 있더라도 바른길로 인도하는 것을 권했다. 그러면서 아내의 문제를 감수하는 것은 후덕이지만, 아내의 문제로 내치는 것은 박정이라 하였다. 결국 부부간의 문제 해결 방식의 차이는 후덕과 박정의 차이로 나타난다.
자신의 의견은 후덕에 있음을 분명히 밝히면서도 이것은 바깥사람들이 간섭할 문제가 아니라, 스스로가 결정할 문제라고 말했다. 부부의 일은 당사자 외에는 알기 어려운 내밀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요즘 ‘오은영 리포트-결혼 지옥’이나 ‘이혼 숙려 캠프’같은 프로그램을 보면 무조건 참는 후덕(厚德)만이 정답은 아니며 때로는 헤어지는 ‘박정(薄情)’이 서로를 구원하는 길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조광조는 스스로 결정하고 감당할 것을 당부한다. 그것은 각자마다 내구성이 달라서 상대를 감당할 수 있는 정도가 다르기 때문이다. 관계를 지키거나 관계를 끊는 것은 남에게 맡길 무게가 아니라, 내가 감당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외암(畏庵) 이식(李栻)이 말하였다.
“지금의 법도는 아내가 있는 상태에서 다른 아내를 맞을 수 없으니, 아내를 한 번 내쫓으면 곧 스스로 후사를 끊는 것이다. 비록 아내가 내쫓김을 당했더라도 그 아내에게는 시댁과의 인연을 끊을 도리가 없다. 진실로 삼강(三綱)의 도리를 어기는 죄를 짓지 않았다면 내쫓아서는 안 된다. 더러는 사랑과 미움의 감정으로 사소한 허물을 끄집어내어 갑자기 버린다면, 자손이 없는 것이 가장 큰 불효라 하였는데 이를 어찌하려는가?”
정실부인을 내치면 재취를 얻기 어려웠다. 유처취처(有妻娶妻)는 살아 있는 아내를 두고 새로운 아내를 둘 수 없다는 엄격한 법도다. 첩을 구하는 것은 비교적 자유로웠으나 정실 처를 다시 얻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게다가 첩의 소생은 서얼이라는 멍에를 평생 껴안고 살아야 한다. 그러니 사소한 감정의 문제로 본처를 내쫓는 일은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다. 조선시대에 남편이나 아내에게 이혼은 씻을 수 없는 상처이자 막대한 손해였다.
예나 지금이나 이혼은 큰일이다. 돌싱, 새혼 등 아무리 새 말을 그럴듯하게 만들어내도, 이혼이 남기는 꼬리표는 가볍지 않다. 상대에게 심각한 귀책 사유가 없다면, 이혼은 신중하게 결정해야 한다. 이 사람하고 살 수 없는 사람은 저 사람하고도 살기 어렵다.
조덕건(曺德健)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일찍이 서리(書吏)의 역할을 맡았으며, 창의동(彰義洞)에 살면서 탁월한 품행으로 명성이 있었고, 재종(再從) 이내의 가까운 친척 수십 명과 한집에서 함께 살았다.
그는 뜰 한가운데에 작은 항아리를 묻어두고, 일가친척들 각자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나 서로에게 경계를 주고 싶은 말이 있을 때마다 곧바로 작은 종이에 적어 항아리에 넣게 하였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모두 함께 모여 항아리를 열어 그 안의 글을 꺼내 모두 펼쳐본 뒤 즉시 불태워 버렸으니, 다른 사람이 보지 못하게 하였다. 각자 마음속으로 힘써 노력하게 하였으나, 끝내 누가 한 말인지는 알 수 없도록 하였다.
그의 선영(先塋) 아래에는 따로 제기를 마련해 두었으며, 제사를 지낼 때면 지극히 정성스럽고 공경스럽게 하였다. 지금까지도 마을의 무뢰배들조차 감히 그의 이름을 곧장 부르지 못하고 반드시 ‘덕건씨(德健氏)’라고 불렀다. 조덕건이 세상을 떠난 것은 현종(顯宗) 때였다고 한다.
수십 명의 친척이 한집에 사니 서로 간에 불만이 없을 수 없었다. 조덕건은 비록 신분이 서리였지만 갈등을 관리하는 능력만큼은 탁월했다. 누군가에게 불만이 생기면 불만의 내용을 적어서 항아리에 넣어두게 했다. 누구를 향해 쓴 글인지는 당사자는 알 수 있었겠지만 누가 쓴 글인지는 알 수 없었다. 이는 일종의 ‘조선판 대나무 숲’이자 지혜로운 ‘소원 수리함’이었다.
이러한 일을 통해 누군가를 원망할 수 없게끔 하면서도 누군가에게 반성을 이끌어냈다. 그리고는 불태워버려서 분란의 소지를 없애고 화합을 도모했다. 마을 무뢰배들조차 그를 덕건씨라고 높여 불렀던 것은, 그가 대가족을 유지하는 탁월한 능력과 지혜 덕분이었다.
완평부원군 이원익(李元翼)은 효성과 우애를 타고 나셨다. 함천공(咸川公, 이원익의 부친 李億載)이 중년 이후 여러 번 위독한 병에 시달릴 때마다, 공은 매번 어의(御醫) 안덕수(安德壽)를 찾아가 약을 문의하셨다. 안덕수가 늙어서 마비 증세를 보이므로 손님을 만날 수 없자, 한 하녀가 중간에서 말을 전했는데, 공께서는 방문할 때마다 반드시 소매 속에 예물을 준비해 그 하녀에게 주셨다. 안덕수는 그의 뜻에 감동하여 힘을 다하여 약을 지어 주었는데, 약은 항상 효험이 있었다.
공께서 함천공을 모실 때 관직이 막 집의(執義)나 승지에 있었으나, 함천공을 문안하러 오는 사람이 있거나 안부를 묻는 하인이 오면, 공이 반드시 몸소 안팎을 오가며 함천공의 말을 전하셨고, 하녀나 하인을 시키지 않았다. 사람들은 공이 고관인 줄도 모르고, 한낱 효자로만 여겼다.
조카 이성전(李性傳)이 호서에서 객사하자, 공은 이미 관직이 높았고, 친히 관을 가져와 장례를 치르셨다. 또 성전의 아들 수함(守諴)이 함천공의 제사를 주관하게 되자, 그를 위해 집을 마련해 주고자 하였으나 힘에 부치자, 지은 집을 넘겨주었다. 집은 본래 아들 의전(義傳)이 직접 자제를 모아서 지은 것이었다. 어진 마음을 미루어 친족을 보살피고, 녹봉을 나누어 궁핍한 사람을 구제하되, 오히려 미치지 못할까 걱정하셨다. 관청에서 퇴근하고 짬이 있으면 오직 친척 집안을 방문하는 것만 일삼았다. 하지만 결코 관직에 추천하거나 청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공께서는 종종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일찍이 장상(將相)의 자리에 올라 지위가 낮다고 할 수는 없었으나, 시대 흐름과 맞지 않아 이 몸도 스스로 도모하지 못했는데, 어찌 감히 친지를 천거할 수 있었겠는가? 뜻밖에도 만년에 성군을 만나 조카와 손자들이 송구스럽게도 관직 명부에 오른 자가 많아 나는 매우 두렵고 부끄럽구나. 내가 양전(兩銓, 인사 행정을 담당하는 이조(吏曹)와 병조(兵曹)의 합칭이다.)에서 인재를 천거한 적이 없지 않으나, 양전에서는 대부분 등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제 나에게 묻지도 않고 내 자제들에게 관직을 주었으니, 어찌 내가 사사로이 사랑해서이겠는가?”
오리 이원익은 청백리의 표상이다. 하지만 효심 앞에서는 체면도 내려놓았다. 고관 신분임에도 병든 아버지의 약을 구하기 위해 의원의 하녀에게 선물을 주며 부탁했다. 아버지를 찾아오는 사람들이 있으면 아랫사람들을 시키지 않고 본인이 직접 그 사람들을 일일이 상대하였다.
가족에게도 이러한 태도는 달라지지 않았다. 조카가 객사하자 직접 장례를 치렀고, 조카의 아들이 제사를 모실 수 있도록 자신의 아들이 공들여 지은 집을 뺏다시피 하여 넘겨주었다. 내 자식의 재산보다 가문의 제사를 모시는 종손의 안위를 더 챙긴 것이다.
그러나 그의 뜨거운 가족애는 관직 앞에서만큼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그는 자신의 권력이 사적인 보상으로 이어지는 것을 극도로 경계했다. 가족의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섰지만, 친족을 관직에 추천하거나 청탁을 들어준 적은 없었다. 자신이 힘을 쓰지 않고 임금이 자손들에게 벼슬을 내려도 부끄러워하고 두려워했다. 이는 고위공직자로서 가족을 천거하거나 등용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비리와 비난을 선제적으로 차단하려는 목적에서였다. 친척을 위해 아들의 집까지 내줄지언정, 나랏일의 자리에 있어서는 단 하나의 자리도 내어주지 않았다. 공직에 있으면서도 공적 도구의 사유화는 가장 크게 경계할 일이다. 예나 지금이나 공직에서 말 그대로 공공의 이익을 위해 권한을 사용하는 사람은 가물에 콩 나듯 만나기가 어렵다. 사적인 따스함과 공적인 서늘함의 균형은 얼마나 아름다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