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은인에 대해 의리를 지키다

by 박동욱

은인에 대해 의리를 지키다

부원수(副元帥) 유극량(劉克良)은 송경(松京, 개성)에 살았는데, 그의 어머니는 옛 재상 홍섬(洪暹)의 여종이었다. 공은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무예를 익혀 무과에 급제했다. 여러 관직을 거쳐 현달해지자 대신들이 앞다투어 그를 장수 재목으로 천거하였다.

어머니가 공에게 말하였다.

“나는 본래 어느 집안의 여종이었단다. 젊어서 옥 잔을 잘못 깨뜨려 벌을 받을까 두려워 도망쳤다가, 네 아버지를 만나 너를 낳았지.”

공은 이 말을 듣고 크게 놀라 곧바로 한양으로 올라가, 주인집을 찾아내어 그 사정을 아뢰고, 상소를 올려 과거 급제를 취소하고 다시 노비로 돌아가려 하였다.

홍섬이 말했다.

“그대는 나의 노비가 아닌데, 어찌 이런 말을 하는가?”

공이 답했다.

“어머님께서 이미 말씀하셨으니, 어찌 감히 법을 어기고 주인을 배반하며 임금을 속이겠습니까?”

홍섬은 그를 의롭게 여겨서 면천 문서를 써주자, 공은 사례하고 떠났다. 그러나 매번 홍섬을 주인이라 불렀다. 고을 수령이 되거나 변방의 장수가 되어서도 선물을 끊임없이 보냈다. 직접 뵐 때마다 마을 입구에서부터 걸어 들어가며, 바치는 물건은 반드시 손수 들고 바쳤다.

한번은 위장(衛將)으로 군사를 나누어 배치하는 중이었는데, 홍섬이 궁내에서 숙직을 서다가 할 말이 있어 쪽지에다 몇 자를 적어 그를 불렀다. 공이 곧바로 자리를 뜨려 하자, 병조와 도총부의 관원들이 말했다.

“군사를 배치하는 일은 국가의 대사인데, 어찌 경솔하게 떠나려 하시오?”

공이 답했다.

“옛 주인의 부름을 받았으니, 감히 지체할 수 없소.”

그러자 같은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놀라 감탄하였다. 임진왜란 때 전사하였다.



어머니는 옥 잔을 깨뜨린 뒤 처벌이 두려워 도망친 노비였다. 이게 사실로 밝혀지면 유극량도 노비 신분으로 추락하게 되고, 어렵게 이룬 급제도 급제 후에 이룬 성취도 다 물거품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유극량은 이 사실을 숨기는 대신 어머니의 옛 주인 홍섬을 찾아가 저간의 사정을 솔직하게 이야기한다. 홍섬은 그를 기특하게 여겨 서류상 아무런 문제 없이 깨끗한 신분으로 만들어주었다. 유극량은 홍섬을 찾아갔고, 홍섬은 그를 위해 문서를 써주었다. 한 사람은 의로웠고 다른 한 사람은 배포가 컸다. 유극량은 그 후로도 홍섬을 평생의 주인으로 섬기며 감사한 마음을 잊지 않았다.

이 이야기의 핵심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법적인 강제가 아닌 자발적 의리가 어떻게 관계를 만들어가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 있다. 지금은 주종 관계도 상하의 구분도 사라진 시대이다. 하지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법과 계약을 넘어서는 신뢰가 관계에 깊이를 더해준다는 원칙만은 여전히 유효하다.

조선시대의 의리는 신분 질서 속에서 관계를 지속시키는 방식이었지만, 오늘날의 의리는 제도 밖에서 개인의 선택과 노력 속에서 지속된다. 유극량과 홍섬의 일화는 법과 계약을 넘어선 신뢰가 인간관계의 무게와 존엄을 결정한다는 점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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