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1) 거절: 받지 않는 용기

by 박동욱

1) 거절: 받지 않는 용기

고려시대 최석(崔碩)이 순천부사로 재직하다가 임기가 차서 비서랑(秘書郞)으로 중앙에 복귀하게 되었다. 당시 순천부에는 오랜 관례가 있었으니, 태수가 교체되어 떠날 때면 백성들이 반드시 말 여덟 필을 송별 선물로 바치는 것이었다. 최석이 떠나려 하자, 고을 사람들은 말 여덟 필을 가져와 그중 좋은 것을 골라가라고 청하였다. 이에 최석은 웃으며 말했다.

“말이 개경까지 무사히 갈 수만 있다면 충분하니, 어찌 좋은 것을 골라가겠나?”

집에 도착한 후 말을 돌려보내니 고을 사람들이 받지 않았다. 최석이 말하였다.

“내가 너희 고을에 있을 때 말이 새끼를 낳은 것까지 데려왔으니, 내가 욕심을 부린 꼴이다.”

그러고는 망아지까지 돌려보냈다. 이 일 이후로 말을 바치는 폐습이 없어졌다.

고을 사람들은 덕을 칭송하며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八馬碑)라 하였다. 세월이 오래되어 비석이 넘어지자 뒤에 최원우(崔元祐)가 비석을 다시 세우고 시를 지었다.

來徃昇平節序移 승평부에 오가는 동안 계절이 바뀌었는데

送迎多愧奪民時 보내고 맞느라 농사철 뺏어 몹시 부끄럽네.

莫言無徳堪傳後 후세에 전할 만한 덕 없다 말하지 마소.

復起崔君八馬碑 다시 최군의 팔마비를 세웠다오.



뇌물은 은밀히 오가지만 관행은 당당히 행해진다. 관행이나 관례는 때로 법보다 더 무서울 때가 많다. 법을 어기면 처벌을 받지만 관행이나 관례를 어기면 공동체에서 아예 배제되기 때문이다. 이 고을에는 한때 선의에서 비롯된 관행이 있었다. 전임 부사가 고을을 떠날 때 감사의 뜻으로 여덟 마리의 말을 선물하는 것이다. 처음에는 백성들이 큰 비용을 들이면서도 전임 부사의 공덕을 생각하여 기꺼이 감당했으리라. 하지만 좋은 의도의 관행도 세월이 지나면 부담스러운 폐습이 되고 만다. 부사는 으레 전출 갈 때 말을 챙겨갈 것으로 여기게 되고, 백성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말을 준비할 수밖에 없었다. 진심 어린 자발적 선물이 마음이 내키지 않아도 낼 수밖에 없는 준조세로 변질된 것이다.

최석은 말 여덟 마리를 받고 개경에 도착한 뒤, 자신에게 있던 망아지까지 합쳐서 순천에 돌려보낸다. 원금에 이자까지 더해 갚아준 셈이다. 폐습을 없애서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려는 마음에서였다. 이후로 순천에서는 이런 폐습이 사라지게 되었고 백성들을 팔마비(八馬碑) 빗돌을 세워서 그를 기렸다. 한 사람의 용기 있는 거절이 수십 년 묵은 나쁜 시스템을 뒤바꾼 것이다.






홍고암(洪顧菴) 순복(舜福)은 성품이 강직하고 지조가 청빈하였다. 처조부 김명록(金命錄)이 고을 수령으로 있을 때, 공이 우연히 그를 만났다. 김씨가 말하였다.

“그대는 본래 가난하거늘 어찌 물건 하나도 요구하지 않는가?”

공이 대답하였다.

“관아의 물건은 공께서도 주시지 말아야 하고, 저도 받지 말아야 합니다”

김씨가 말하였다.

“말이야 옳지만 작은 송별 선물 정도가 어찌 의리상 해롭겠나?”

공이 답하였다.

“어쩔 수 없다면 꿀 다섯 홉과 개가죽 반 장이면 충분합니다.”

김씨는 곧바로 웃으며 그 물건들을 보내주었으나, 공은 집에 돌아와 이를 모두 돌려보내며 말하였다.

“개가죽은 안장이 찢어질까 염려하여 수선용으로 받았고, 꿀은 먼 길에 더위를 먹었을 때를 약으로 쓰려고 대비해 둔 것이었습니다. 이제 두 가지 걱정이 사라졌으니, 이를 남겨둔다는 것은 의리에 어긋나므로 돌려보냅니다.”

비록 작은 일이나, 그 지조를 볼 수 있다.



홍순복은 관가의 물건은 상대가 주지 말아야 하고 자신이 받지도 않아야 한다는 원칙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물건을 권한 사람은 다름 아닌 처조부다. 딱 잘라 거절하면 어른을 무안하게 만들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일부러 가장 부담없는 사소한 물목을 요구한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비상시에 쓰려고 받았으나 무사히 왔으니 필요 없다”는 명분을 만들어 되돌려 주었다. 상대의 호의와 자신의 원칙을 모두 지킨 고품격의 거절이다.

이와 비슷한 정붕(鄭鵬)의 일화가 있다. 그가 청송 부사로 있을 때 친구이자 재상인 성희안(成希顔)이 편지를 보내 잣과 꿀을 부탁했다. 친구 사이에 충분히 할 수 있는 사소한 부탁이었지만, 정붕의 답장은 단호하고 서늘했다. “잣은 높은 산봉우리에, 꿀은 백성의 벌통 속에 있으니, 태수 된 자가 어찌 이를 구할 수 있겠소?” 잣을 따려면 백성들이 높은 산에 올라야 하고 꿀은 채취하려면 백성들의 벌통을 뒤져야 한다. 부사가 친구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백성을 고달프게 할 수는 없다는 준엄한 꾸짖음이었다. 성희안은 이 말에 부끄러움을 느끼며 사과의 말을 전했다.

홍순복과 정붕의 거절은 매정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아름다운 원칙을 지킨 것이다. 홍순복이 돌려보낸 물건을 다시 받은 김명록도, 정붕이 보낸 편지에 사과의 말을 전한 성희안도 훌륭하다. 단호한 거절이 아름다운 관계로 복원되었다.






조장령(趙掌令) 석주(錫周)가 송도 경력으로 재직할 때 신던 신발이 매우 낡았다. 청감(廳監)이 어느 날 새 개가죽 신발을 가져와 바치자, 공이 정색하며 말했다.

“내가 새 신발을 신는데 어찌 감관(監官)의 손을 빌리겠는가?”

물리치도록 명하였다.

청감이 공무로 유수(留守) 앞에 나아가 대화 중에 이 일을 자세히 고하자, 유수가 말했다.

“청렴함이 어찌 그리 지나친가? 신발을 가져오라. 내가 마땅히 보내주마.”

청감이 말했다.

“사또께서 보내시면 반드시 감히 사양하지 못할 것입니다. 청에 있는 큰 사슴 가죽으로 다시 만들어 올리겠습니다.”

유수가 고개를 끄덕여 허락하였다.

며칠 후, 유수가 과연 전갈을 보내 마음을 전하자, 공은 어쩔 수 없이 받아 두었다. 마침 처남 한굉(韓翝)이 한양에서 누이를 만나러 왔을 때, 공이 말했다.

“너는 새 신발을 갖고 싶으냐?”

마침내 그에게 주었다.



조석주는 낡은 신발을 신고 있었다. 청감이 새 신발을 바치자 그는 단호히 거절했다. 소박한 호의이지만 뇌물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직무와 관련 있는 부하 직원에게 받는 물건은 어쨌든 사적인 부채감이 생길 수밖에 없다. 만약 한번 받기 시작하면 오늘은 신발을 받고, 내일은 옷을 받고, 그 뒤로는 더 큰 것을 기대할지도 모른다.

이 소식을 들은 상급자인 유수가 사슴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조석주가 일단 신발을 받아두었다가 처남에게 주었다. 상급자의 체면을 살려주면서 자신의 원칙은 지켜냈다.

신발 하나에도 거절의 방식을 달리했다. 청감에게는 단호히 거절했고, 유수에게는 일단 받았지만 끝내 자신은 신지 않았다. 관계의 위계에 따라 거절의 방식을 달리했지만, 결코 받은 신발을 신지 않았다. 조석주는 낡은 신발을 세상에서 가장 빛나는 신발로 만들었다. 신발 하나도 허투루 받지 않겠다는 엄격함이 참 그리운 시절이다.






이판서(李判書) 희검(希儉)이 만년에 동문 밖에서 살며 호를 동고(東皐)라 하였으니, 곧 하정(夏亭) 유상공(柳相公) 관(寬)의 옛집이었다. 하정 유관은 이름난 청백리로서 지붕이 새어도 고치지 않고 비 오면 우산을 받치며 살아, 사람들이 그의 청렴함을 아름답게 여겼다. 공은 그 집의 옛 모습을 그대로 지키며 비가 새지 않을 정도로 약간 수리만 하였다.

손님이 그 초라함을 비웃자, 공은 “우산을 받치던 것에 비하면 호화롭다”라고 답하였다. 어려서부터 늙을 때까지 손에서 책을 놓지 않았으며, 옷은 몸 가릴 정도, 음식은 배 채울 정도로만 하였다. 끼니가 자주 떨어져도 전혀 개의치 않았는데, 결국 죽은 뒤에는 염할 옷도, 장사 지낼 곡식과 비단도 없어 친척에게 빌려야 했다. [碑錄]




청백리로 유명했던 유관의 옛집에 이희검이 들어와 살았다. 유관은 지붕이 새는 채로 우산을 받치며 살았고 이희검은 무너진 곳만 약간 수리한 채 살았다. 누군가 이희검의 초라한 집을 비웃기라도 할라치면 “우산 받치고 살던 때보다 호화롭지 않소?”하고 답했다. 그는 평생 책을 손에서 놓지 않았으나, 옷이나 음식 따위에는 신경 쓰지 않았다. 오죽하면 죽은 뒤에도 장사 지낼 일체의 것을 친척에게 빌려야 할 지경이었다. 하지만 그는 물질적 빈곤을 정신적 풍요로 이겨낸 한평생을 살았다. 이희검은 낡은 옛집에서 산 것이 아니라, 그 집에 서린 청백리 정신을 함께 누린 것이다. 아름다운 정신의 기막힌 동거다.






정교리(鄭校理) 붕(鵬)은 선산 사람이다. 청렴한 절개로 스스로 단속하니 그의 문 앞에는 뇌물 보따리가 뚝 끊겼다. 당시 유자광(柳子光)은 적개좌리공신(敵愾佐理功臣)으로 무령군(武靈君)에 봉해졌다. 그런데 간사하고 탐욕스러워 제멋대로 권세를 휘두르니 그 기세가 조정을 기울게 할 정도였다.

공은 유자광과 인척간이어서 비록 문안 인사는 그만두지 않았다. 그러나 여종을 보낼 때마다 반드시 삼끈으로 팔을 단단히 묶고 표시를 한 뒤 보냈다가, 돌아오면 풀어주었다. 이는 고통을 느껴 빨리 갔다가 빨리 오게 하여 그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

어느 날 공이 입직을 섰는데 집안에 양식이 떨어지자, 공의 부인이 유자광 집에 양식을 빌려달라고 하였다. 유자광이 기쁜 듯 말하였다. “친척의 정의(情誼)는 서로 구휼하는 데 있다. 교리께서 지나치게 고집이 세지만 내가 어찌 냉담하겠는가?” 하고는 곧바로 쌀은 자루에 넣고, 장은 항아리에 담아, 종에게 시켜 노새에 실려 보내주었다.

공이 직소(直所)에서 나와 윤기 흐르는 흰 쌀밥을 보고 어디서 얻었는지 물었다. 부인이 사실대로 알리자 공은 밥상을 물리치고 웃으며 일어나 말했다.

“입직하던 날 아침에 비지를 사다 죽을 쑤어 주기에, 내가 양식이 떨어진 줄 알았소. 그런데도 내가 조치하지 않았으니 이는 나의 실수이지, 집사람의 허물이 아니오.”

드디어 친구들에게 편지를 띄워 사용한 만큼을 빌려 채운 뒤, 원래 받은 쌀과 함께 돌려보냈다. 가난 속에서도 절개를 굽히지 않음이 이와 같았다.




정붕(鄭鵬)과 유자광(柳子光)은 완전히 성품이 달랐지만, 인척이기에 인사를 나눌 정도의 관계는 유지하였다. 하지만 정붕은 여종을 유자광의 집에 보낼 때는 팔을 꽉 묶어서 봉인까지 했다. 종이 아픔을 느껴서라도 유자광의 집에 오래 머물지 못하게 하려는 의도였다. 유자광과는 말도 섞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셈이다.

정붕의 집에 양식이 떨어지자 아내가 정붕 모르게 유자광에게 양식을 빌렸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고 정붕은 몹시 불쾌했지만, 아내를 탓하기보다 가장의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의 탓으로 돌렸다. 그리고는 친구들에게 빌려서라도 쓴 만큼의 쌀을 채워 유자광에게 곧바로 돌려보냈다. 선비에게 더러운 곡식을 먹는다는 것은 곧 불의에 타협하거나 동조하는 행위였다. 안응세(安應世)도 평생토록 불의한 곡식은 단 한 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는 부모님께서 물려주신 깨끗한 몸을 더러운 곡식으로 더럽힐 수 없다고 했다. 굶주릴지언정 간신의 쌀로 배를 채울 수 없다는 서릿발 같은 기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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