돗자리 하나, 갑옷 한 벌
돗자리 하나, 갑옷 한 벌
이평정공(李平靖公) 약동(約東)이 일찍이 제주목사로 재임하였는데, 그가 돌아갈 때 오직 채찍 하나만을 가지고 있었다. 조금 있다가 말하기를 “이것도 관아의 물품이다” 하며, 그것을 관아의 누각에 걸어두었다. 세월이 오래되어 채찍이 떨어지자, 고을 사람들이 그 걸었던 자리에 채찍 모습을 그려 붙여 두고, 사모하는 마음을 담았다.
바다를 건널 때, 배가 바다 한가운데서 갑자기 흔들려서 위태로워졌다.
공이 꿈쩍도 하지 않고 말하였다.
“내 행장엔 사사로운 물건이 하나도 없는데, 어찌 수하가 속여서 더럽힘으로써, 신명이 나에게 경고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당초 본주(本主)의 장수와 사졸들이 공이 일찍이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으므로, 갑옷 한 벌을 가져와서 공이 갑옷을 입을 날을 기다렸으나, 공이 알면 반드시 물리칠까 두려워 수행하는 비장(裨將)에게 몰래 부쳐, 바다를 건넌 뒤에 자세히 아뢰려 하였던 것이다. 이때 이르러 모두가 ‘강신(江神)도 그 얼음 같은 절개를 더럽히려 하지 않아 이런 기이한 일이 생겼다’고 여기고, 마침내 사실대로 고하였다.
공이 그것을 바다에 던지라 명하니, 파도가 잦아들어 배가 갈 수 있게 되었다. 지금까지 그곳을 '투갑연(投甲淵)'이라 부르며, 그의 청백함은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는 신화가 되었다. 제주목사 임기가 끝났을 때 채찍 하나만 가지고 있었는데, 그나마 관물이라며 관아의 누각에 걸어두었다. 세월이 지나 채찍이 떨어졌으나, 고을 사람들은 채찍의 모습을 그림으로 그려 붙였다. 그림으로라도 기억하고픈 청백리였다. 육지로 돌아오는 뱃길에서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했다. 이약동은 “내 행장에 사사로운 물건이 없는데 이런 위기가 닥치다니, 누군가 나를 속여 부정을 저질렀을 것”이라고 의심했다. 알고 보니 부하들이 이약동이 거절할까 두려워 몰래 갑옷 한 벌을 챙겨 실었던 것이었다. 이약동은 주저하지 않고 갑옷을 바다에 던지라고 명하자 파도는 잔잔해졌다. 그의 청렴은 채찍의 자취 그림과 투갑연이란 지명으로 사람들에게 기억됐다.
이렇게 관가의 물건에 대한 결벽증적인 태도는 여러 사람의 기록에 남아 있다. 김명중(金命仲)은 풍덕군수를 마치고 돌아올 때 가족들이 관아에서 쓰던 돗자리를 가져왔다. 그가 이 사실을 알고는 불같이 화를 내고 “당장 돌려보내라”고 호통쳤다. 이웃 친구가 돗자리 하나를 돌려보내는 것은 너무 유난스러워 보이니 자신에게 달라고 하자, 김명중이 그에게 주었다.
또, 이극배(李克培)는 동생 이극돈(李克墩)의 집에 가서 처마 밑에 사복시에서 쓰는 관용 새끼줄이 있는 것을 보고 크게 꾸짖었다. “사복시 줄은 말을 매는 데 써야지. 어찌 네 집 뜰에 있느냐”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나가 버렸다.
공적인 자산에 대한 아무런 죄의식도 없이 사적으로 편취하는 일은 지금도 공직 사회에서 비일비재하다. 공복(公僕)이란 말이 무색하다. 공복이란 백성에게 봉사하는 것이지, 특권을 누리는 것이 아니다. 공직의 기강은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돗자리 한 장과 새끼줄 하나를 대하는 태도에도 판가름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