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비를 사양한 참판
노비를 사양한 참판
최참판(崔叅判) 치운(致雲)이 중국으로 사신을 갔다가 돌아온 후, 공로에 따라 밭 5백 결(結)과 노비 30인을 하사받았다. 공이 단호히 노비 하사만을 사양하며, 무려 일곱 번이나 상소를 올렸다.
허조(許稠)가 이에 대해 논평하였다.
“이 사람은 겉치레로 상을 사양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속으로 진심으로 원치 않는 것이니, 마땅히 그 뜻을 들어주어 훗날 청렴한 이름을 이루도록 해야 합니다.”
공이 집에 돌아와 기쁜 마음으로 부인에게 말하였다.
“오늘에야 내 간청이 받아들여졌소!”
부인이 한숨을 쉬며 대답하였다.
“임금께서 주신 것마저 사양하다니, 복도 없도다!”
세종 15년, 야인(野人)이 명나라 황제의 명을 받들어 조선을 침략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최치운은 사신으로 명나라에 가서 황제를 설득해 칙서를 받아와 침략을 막았고, 그 공로로 땅과 노비를 하사받았다. 땅은 받았지만 노비는 무려 7번이나 상소를 올려 사양했다. 사양하는 시늉만 한 것이 아니라, 정말로 노비를 받기 싫다는 뜻을 분명히 밝힌 것이다. 그런데 왜 땅은 받았으면서 노비는 사양했을까? 임금이 내린 상을 다 거절하는 것은 자칫 항명으로 비칠 수 있다. 본인의 의도와 상관없이 임금의 은총을 거부하는 꼴이 된다. 토지와 노비 전부 받을 수는 없어서, 그중에 땅을 선택한 것이다. 토지는 소유의 대상일 수 있지만 인간은 소유할 수 없다는 그만의 원칙이 작용했던 듯하다. 허조는 최치운의 결정을 깊이 이해하고 임금을 설득했다. 그러나 최치운의 아내는 달랐다. 아내의 눈에 노비를 거절한 일은 굴러 들어온 복을 걷어찬 일로 해석되었다. 그녀에게 노비는 인간이 아니라 재산이었기 때문이다. 부인에게 복이 날아간 날이, 최치운에게는 원칙을 지킨 명예로운 날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