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4) 검박(儉朴) — 소박함의 미학

by 박동욱

4) 검박(儉朴) — 소박함의 미학

모재(慕齋) 김안국(金安國)과 성우상(成右相) 세창(世昌)이 함께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할 때였다. 두 사람이 함께 숙직하게 되었는데, 성세창은 본래 부잣집 출신으로 이불과 베개를 모두 명주로 만들어 극도로 화려하고 사치스러웠다. 반면 김안국은 본래 빈궁하고 성품도 사치를 좋아하지 않아 베 이불과 나무 베개를 사용하니, 쓸쓸하기가 가난한 선비와 같았다.

성공이 몹시 부끄러워하며 밤새 편히 잠들지 못했다. 날이 밝자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말했다.

“김안국이 만약 내 사치를 비웃었다면 내가 이처럼 부끄러워하겠소”

이에 급히 검소한 물건으로 바꾸라고 명한 뒤에야 감히 함께 잠을 잤다고 한다.



사가독서(賜暇讀書)는 당대 최고의 인재들에게 휴가를 주어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하고 그 경비 일체를 나라에서 부담한 제도다. 한 번에 선발되는 인원은 보통 6인 내외였으며, 많을 때는 12인까지, 적을 때는 1인만 뽑힌 때도 있었다. 대단한 영예가 아닐 수 없다.

김안국과 성세창은 함께 뽑힌 동료였으나 생활 수준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성세창은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사람이었다. 이불과 베개가 모두 명주로 만든 것을 썼다. 그런데 김안국은 가난한데다 검소하여 베 이불과 나무 베개를 사용했다.

만약 김안국이 어쭙잖은 충고를 성세창에게 했다면 오히려 반발심이 일어났을지도 모른다. 김안국은 그저 당당히 자신의 침구를 사용했고, 성세창은 김안국의 침구를 보고서 호사를 누린 것에 대해 깊은 부끄러움을 느꼈다. 그래서 검소한 침구류로 교체했다. 집에 돌아와 부인에게 말했다. “김안국이 나를 비웃었다면 이렇게 부끄럽지는 않았을 것이오.” 평소 검소한 태도를 보인 김안국도 대단하지만, 그의 소박한 물건을 보고 스스로 각성한 성세창도 훌륭하다.

진정한 명품은 옷이 아니라 그 옷을 입은 사람의 격조였다. 허조(許稠) 또한 그러했다. 세종 때 사대부들이 모두 화려한 황색 옷을 입을 때, 그는 홀로 검소한 회색 답호(褡�, 벼슬아치가 입는 옷의 한 가지로, 예복(禮服) 밑에 입는 조끼형이며 밑이 긴 옷)를 고집했다.

옷뿐만이 아니다. 손순효(孫舜孝)는 높은 벼슬에 올랐음에도 손님이 오면 검은콩, 씀바귀, 솔잎 같은 소박한 반찬을 내놓았다. 그는 자식들에게 “우리 집은 초야에서 일어났으니 대대로 전해 내려온 옛 물건은 없다. 다만 청렴하고 결백한 것을 전해주면 충분하다.”라고 말했다.

김안국의 베 이불, 허조의 회색 옷, 손순효의 소박한 반찬은 가난의 증거가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물건도 그 사람을 명품으로 만들어 줄 수는 없고 아무리 좋은 음식도 그 사람을 고상하게 만들 수는 없다. 사람은 좋은 물건을 걸침으로써 빛이 나는 것이 아니라, 물건에 대한 집착을 버림으로써 비로소 빛이 난다.




김사재(金思齋) 정국(正國)이 황 아무개에게 보낸 편지에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가 집 짓기를 그치지 않는다는 말을 내가 서울에서 들었소. 만약 남들의 말과 같다면, 차라리 그만두고 고요하게 살면서 천명을 따르는 것이 나을 것이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나이 일흔을 상수(上壽)라 하니, 만일 나와 그대가 상수를 누린다 하더라도 남은 시간은 불과 십여 년 남짓인데. 어찌 마음을 수고롭게 하며 수다쟁이들의 꾸짖음을 자초하는 것이오?

나는 지난 20년 동안 빈곤하게 살면서, 집 몇 칸을 두어 밭 몇 이랑을 갈고, 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 각각 몇 벌씩 두었소. 그러나 눕고서도 남은 땅이 있고, 옷을 입고서도 여벌 옷이 있었으며, 밥그릇 밑에 남은 밥이 있었소. 이 세 가지 남은 것을 가지고 한세상을 편히 살았소. 비록 넓은 집 천 칸, 옥 같은 곡식 만 섬, 아름다운 비단옷 백 벌이 있다 하더라도, 썩은 쥐나 다름없이 여기며, 오히려 여유있게 이 한 몸을 살아가며 넉넉함을 느꼈소.

그대의 의식주가 나보다 백 배는 낫다 들었는데, 어찌 다시 그칠 줄 모르고 쓸모없는 물건을 모으는 것이오? 오로지 없어서는 안 될 것이라곤, 책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친구 서너 명, 신 한 켤레, 잠을 청할 베개 하나, 바람 통할 창 하나, 등을 대고 따뜻하게 할 기둥 하나, 차 달이는 화로 하나, 늙은 몸을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를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일 뿐이오. 이 열 가지는 비록 번거롭더라도 하나도 빠뜨릴 수 없나니, 늘그막을 보내는 데 이보다 더 무엇을 구하겠소?”




나이 일흔이 넘어서 집을 짓는 사람에게 보낸 편지다. 살면 얼마나 산다고 집 짓는데 시간과 정력을 허비하느냐는 힐난이다. 그에게 대저택과 산해진미는 썩은 쥐에 불과했다. 그러면서 담담히 자신의 삶을 말해준다.

삼여(三餘)는 공간, 의복, 식량의 여유다. 누군가에게는 부족하다고 느낄 수 있지만 그는 여기에서 여유를 느꼈다. 아무리 많이 가지고 있어도 부족한 사람이 있고, 조금 가져도 풍족한 사람이 있다. 여유는 소유의 정도가 아니라 마음의 크기다.

그가 가지고 있는 10가지를 소개한다. 이것은 소유하겠다는 다짐이 아니라 소유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사람은 살면서 꼭 요긴한 몇 가지 물건만 있으면 된다. 물건을 하나 더 소유하는 것은 집착하고 신경 쓸 일이 하나 더 늘어난다는 뜻이다. 그런 의미에서 미니멀리즘은 탁월한 삶의 자세다. 빈 공간을 넓힘으로써 정신은 풍성해진다.

상진(尙震)은 고관이 된 후에도 일부러 재산을 모으지 않았다. 창고가 점차 기울어 무너지자, 종이 수리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고쳐본들 저 큰 창고를 무엇으로 채우겠느냐?”라며 거절했고, 결국 창고는 무너져 사라졌다. 창고도 사라지면서 그의 집착도 따라 사라져버렸다. 우리는 어쩌면 한평생 부질없는 것을 채우느라, 정작 소중한 인생을 소진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퇴계 선생은 평소 검소함을 중시했다. 세숫물은 질그릇에 받아 쓰고, 부들자리에 앉으며, 베옷에 끈으로 띠를 둘렀다. 칡으로 만든 신에 대나무 지팡이를 짚고 담담하게 지내셨다. 시냇가의 집이래야 겨우 10여 가(架)로 된 작은 규모였다. 몹시 추운 겨울과 무더운 장마는 사람들이 견딜 수 없는 것인데, 선생은 여유롭게 그곳에 거처하였다.

영천군수 허시(許時)가 일찍이 찾아뵙고 말하였다.

“좁고 누추함이 이와 같으니, 어떻게 견디십니까?”

그러자 선생께서 천천히 말씀하셨다.

“익숙해진 지 이미 오래되어, 불편한 걸 못 느끼네.”



퇴계는 본래 검소한 사람이었다. 시냇가의 집은 겨울의 추위와 장마의 빗줄기를 막아주기에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그저 질그릇 세숫대야, 부들자리, 칡으로 만든 신발, 대나무 지팡이와 함께할 뿐이었다.

영천 군수가 직접 선생을 찾아왔다가 이 모습을 보고서 어떻게 이런 곳에서 견디시냐고 물었으나, 선생은 오래 익숙해져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다고 답했다. 영천군수의 눈에는 퇴계의 집이 참아야만 살 수 있는 고통스러운 공간이었겠지만, 퇴계에게는 익숙하고 편안한 삶의 공간이었다.

퇴계는 불편함을 감내하는 것이 아니라 아예 불편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환경에 휘둘리지 않는 무심의 경지였다. 진리를 꿈꾸는 사람에게 초라한 집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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