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평대군의 초청을 거절하다
안평대군의 초청을 거절하다
이문강공(李文康公) 석형(石亨)은 식견이 뛰어났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그 명성을 듣고 흠모하여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한 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끝내 가지 않았고 그가 보낸 선물도 받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앞일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고 여겼다.
이 짧은 기록은 권력에 대한 훌륭한 거리 두기를 보여준다. 이석형은 안평대군이라는 개인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도사린 정치적 위험을 감지했다. 당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선견지명이라 평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단순한 왕자가 아니었다. 시와 서예에 능해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고 그의 거처 비해당(匪懈堂)은 조선의 인재들이 모이는 살롱이었다. 그곳에 초대되는 것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이너서클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안평대군은 왕권에 대한 잠재적 도전 세력으로 의심받기 쉬운 위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이 비대해지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석형은 가시적인 호의 뒤에 가려진 미래의 위험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선택은 능력보다 중요한 때가 있다. 권력의 그늘에 가까이 가지 않음으로써 도덕적인 권위와 안전을 확보한 셈이다. 훗날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안평대군은 몰락하고 그 추종자들도 화를 입었다.
이와는 유사한 사례지만 다른 방식으로 안평대군을 피한 사람으로 안지(安止)가 있었다. 이석형이 정면으로 거절했다면 안지는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안지는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거나, 글을 심사하는 자리에서 횡설수설하며 노망난 연기를 했다. 모든 사람이 늙은이가 한물갔다며 더 이상 초청하지 않았다. 이석형은 차가운 이성으로 선을 그었고, 안지는 뜨거운 연기로 몸을 숨겼다. 방식은 달랐지만, 권력에서 멀어져 생존한 것만은 똑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