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는 세상에서 나를 지키는 조선의 스무 가지 원칙

1) 명철보신(明哲保身) — 권력의 그림자를 피하는 선견지명

by 박동욱

1) 명철보신(明哲保身) — 권력의 그림자를 피하는 선견지명

이문강공(李文康公) 석형(石亨)은 식견이 뛰어났다. 안평대군(安平大君)이 그 명성을 듣고 흠모하여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한 번 만나기를 청하였으나, 공은 끝내 가지 않았고 그가 보낸 선물도 받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이를 두고 앞일을 내다보는 지혜가 있다고 여겼다.



이 짧은 기록은 권력에 대한 훌륭한 거리 두기를 보여준다. 이석형은 안평대군이라는 개인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그 뒤에 도사린 정치적 위험을 감지했다. 당대 사람들이 그의 행동을 선견지명이라 평한 것은 이 때문이다.

안평대군은 단순한 왕자가 아니었다. 시와 서예에 능해 당대 최고의 예술 후원자였고 그의 거처 비해당(匪懈堂)은 조선의 인재들이 모이는 살롱이었다. 그곳에 초대되는 것이야말로 당대 최고의 이너서클에 들어간다는 의미였다.

동시에 안평대군은 왕권에 대한 잠재적 도전 세력으로 의심받기 쉬운 위치였다. 수양대군과 안평대군의 세력이 비대해지면 충돌을 피할 수 없었다. 이석형은 가시적인 호의 뒤에 가려진 미래의 위험을 읽어낼 수 있었다. 선택은 능력보다 중요한 때가 있다. 권력의 그늘에 가까이 가지 않음으로써 도덕적인 권위와 안전을 확보한 셈이다. 훗날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나 안평대군은 몰락하고 그 추종자들도 화를 입었다.

이와는 유사한 사례지만 다른 방식으로 안평대군을 피한 사람으로 안지(安止)가 있었다. 이석형이 정면으로 거절했다면 안지는 우회적으로 거절했다. 안지는 가겠다고 해놓고 가지 않거나, 글을 심사하는 자리에서 횡설수설하며 노망난 연기를 했다. 모든 사람이 늙은이가 한물갔다며 더 이상 초청하지 않았다. 이석형은 차가운 이성으로 선을 그었고, 안지는 뜨거운 연기로 몸을 숨겼다. 방식은 달랐지만, 권력에서 멀어져 생존한 것만은 똑같았다.





윤원형(尹元衡)은 문정대비(文定大妃)의 동생이었다. 그가 국정을 맡고 있을 때 대비가 그의 첩 난정(蘭貞)을 봉하여 부인으로 삼게 하였다. 난정은 이미 정실부인처럼 스스로 처신했지만, 사람들도 화를 두려워하여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오직 한 배에서 나온 형제인 정담(鄭淡)만이 미리 그 일이 반드시 재앙이 될 것임을 알고, 화근이 될 인연을 스스로 멀리하여 일찍이 청탁하거나 왕래한 일이 없었다. 또, 거처하는 집 문 안에 담장을 양의 창자처럼 꼬불꼬불하게 쌓아, 옥교(屋轎, 지붕이 있는 가마)가 드나들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난정 또한 찾아와 만날 수 없었다. 비록 드러내어 거절하지는 않았지만, 그가 난정을 끊으려 한 뜻은 깊었다.

윤원형이 패망하고 난정이 죽는데 미쳤으나, 정담은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다. 정담은 스스로 호를 물재(勿齋)라 하였는데, 문장을 잘 짓고 고금에 통달하였으며, 『주역』의 이치를 깊이 이해했으나 겸손함을 지켰으므로, 사람들이 이를 더욱 현명하다 여겼다. 정담은 무신 청계군(淸溪君) 정윤겸(鄭允謙)의 서자이며, 찬성(贊成) 정종영(鄭宗榮)의 서삼촌이었다. 정씨 노인이 나에게 이 일을 말해주었다.



정난정은 사극의 단골 소재다. 그녀는 첩의 소생으로 태어나 기녀가 되었고, 훗날 윤원형의 애첩이자 둘째 부인이 되었다. 윤원형의 본부인 연안 김씨를 독살했다는 의혹까지 받았다. 그녀는 문정왕후를 뒷배로 하여 정치에 깊이 개입하였다.

오빠인 정담(鄭淡)은 『주역』에도 정통한 사람이라 정난정의 비극적 앞일을 예견하고 있었다. 그래서 여동생과의 관계를 대놓고 끊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지만, 철저히 만나지 않으려 했다. 사람과 관계를 끊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심리적 거리두기다. 상대와 만나지 않으며 서서히 멀어지는 방식이다. 다른 하나는 물리적 공간의 단절이다. 같은 공간에 있지 않음으로써 상대를 멀리한다. 정담은 이 두 가지 방식을 모두 사용하여 상대와의 결별 의사를 분명히 했다.

결국 윤원형의 실각과 함께 정난정의 몰락은 예견된 일이었다. 나중에 정난정은 음독하고 윤원형은 자결했다. 하지만 정담은 조금도 연루되지 않았다. 여동생으로 인해 얻은 혜택이 없었으니 입은 피해도 없었다. 권세의 그늘에서 얻는 이익은 반드시 위험이라는 대가를 동반한다.

이러한 지혜는 임억령에게도 찾아볼 수 있다. 동생 임백령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권력을 잡자 임억령은 “잘 있거라 한강수야, 고이 흘러 물결 일으키지 마라.(好在漢江水, 安流不起波)”라는 시를 남기고, 한강을 건너 떠나 버렸다. 아우가 죽은 뒤에야 한강 땅을 다시 밟았다. 정담은 담장을 쌓았고 임억령은 강물을 건넜다. 두 사람 모두 혈육의 정을 뒤로하며 타락한 권력과 단호히 단절했다.






조용주(趙龍州) 경(絅)은 이이첨(李爾瞻)이 권력을 마음대로 휘둘렀을 때, 비록 인척 관계로 친분이 있었으나 항상 향기와 악취의 구별이 있었다. 당시 조경은 아직 벼슬하지 않은 상태였는데, 어느 날 이이첨이 갑자기 찾아와 말했다. “그대가 이토록 초라한 처지인데, 어찌 청운의 뜻이 없단 말인가?”

조용주가 답하였다.

“진흙탕에서 벗어나 조정에 올라가는 것이 어찌 선비의 큰 소원이 아니겠습니까? 다만 곤궁한 선비로서 스스로 쉽게 얻을 수 없습니다.”

이이첨이 웃으며 말했다.

“다만 원하지 않았을 분이지, 진실로 원했다면 어찌 이루지 못한 것을 근심하겠소?”

이내 일어나 떠났다. 얼마 후, 조정에서 특별히 과거 시험을 열어 선비를 뽑았는데, 이는 이이첨이 꾸민 일이었다. 이이첨이 사람을 시켜 조경에게 붓 한 자루를 가져다주며 말했다.

“잠시 과거 시험장에서 쓰도록 하시오.”

붓을 꺼내서 보니 붓대만 있고 붓털은 없었다. 이상히 여겨 붓대 안을 들여다보니 쪽지에다 작은 글씨로 쓴 시험 내용이 적힌 문서 한 장이 있었다. 조경은 매우 놀라 그날로 하인을 고용하고 말을 빌려 포천(抱川)으로 돌아가, 더는 벼슬길에 나설 마음을 접었다. 이후 이이첨이 종종 선물을 보내며 안부를 물었으나, 조경은 일절 답하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조경에게 다녀온 뒤, 이이첨이 물었다.

“조 아무개의 당에 거는 편액은 무어라 했소?”

그가 말했다.

“육송(六松)이옵니다.”

이이첨이 말했다.

“이는 나를 죽이려는 뜻이로다.”

육(六)은 륙(戮)과 발음이 같고, 송(松)은 이이첨의 어린 시절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인조반정 이후 조경은 과거에 급제했다.




이이첨과 조경은 인척 관계였다. 이이첨은 광해군의 즉위 이후 대북의 영수가 되어 정국을 주도했다. 대북 세력을 강화하며 소북 일파 숙청, 영창대군 서인 강등과 사사, 인목대비 유폐 등의 패악을 저질렀다. 이이첨은 조경을 자신의 일파에 포섭하려고 했고, 조경은 그럴 의사가 전혀 없었다.

이이첨은 조경을 염두에 두고 과거 시험을 특별히 개최했고, 남몰래 시험 문제를 조경에게 전달했다. 조경은 원래부터 이이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이러한 부정을 저지르는 것을 보고 완전한 결별을 결심했다. 시험은 치르지 않았고 벼슬길에 오를 뜻도 접었다. 그 후 이이첨이 여러 번 연락을 해왔지만 답하지 않았다. 육송이란 당호(堂號) 풀이는 다소 과도한 감이 없지 않으나, 그만큼 이이첨도 조경이 자신을 경멸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자 이이첨은 가족을 이끌고 도망가던 중 광주의 이보현(利甫峴)을 넘다가 관군에게 잡혀 참형되었다. 조경은 인조반정 이후 세상이 바뀌자 그제야 과거 시험을 보았다. 만약 이이첨이 깔아 준 판에 올라 시험에 합격했다면 이이첨의 공범이 되어, 인조반정 때 같은 운명을 맞았을지도 모른다. 오늘날에도 성공을 위해 변절이나 협잡을 서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원칙을 포기하고 얻는 성공은 진정한 성공이 아니라 실패의 다른 이름이다.

이러한 사례는 의원 김유위(金由謂)에게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는 의술로 이름이 높아 권세가들의 집을 드나들며 재물을 모았다. 그러던 어느 날 권세가들의 집에 출입하는 것을 중단했다. 권세가가 몰락하면 그 뒷수습을 하느라 전에 얻었던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잃게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당장의 혜택보다 훗날 치러야 할 비용이 더 크다는 계산이다. 조경이 ‘도덕적 원칙’으로 거절했다면 김유위는 ‘냉정한 계산’으로 거리를 두었다. 조경과 김유위는 세상에 공짜 점심은 없으며, 부정한 이득은 반드시 징벌적 이자를 쳐서 갚아야 한다는 진리를 꿰뚫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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